제27화
듣고 있던 류하리도 미카엘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이렇게 나에겐 더 좋은 뭔가가 있지만 너에겐 안 보여줄 거야, 라고 굴면 보통은 허세지. 이 남자가 허세 안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류하리는 시현이 열심히 이것저것 밑밥을 깔아둔 다음에 정작 본게임에 들어가면 허세를 부리는 걸 잘 봐왔다.
스트리머 살인사건 때에도 관계자들 전원에게 전단지 뿌리는 작업, 정말 필요했었나?
밑밥을 뿌려두는 작업들을 이래저래 산탄총처럼 많이 쏴놓고 그중 하나 얻어서 맞으면 정확한 저격으로 잡은 것처럼 허세를 떨어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고 자신의 유능함을 어필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산탄총처럼 많이 쏘는 것 자체도 능력이긴 하지만.
시현이 보여주는 걸 액면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이건 허세가 아닙니다. 더 적은 비용에 더 나은 서비스, 여기에 어떤 허세가 있겠습니까?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해 두지요.”
“그런데 저희라고 하면 저도 포함인가요?”
류하리가 당황해서 물어보았다.
“네. 제 조수 아닙니까.”
“아니, 왠지 이제는 주말에 교회를 못 갈 것 같은 느낌인데.”
“원래 안 갔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어? 그런 것도 알고 있어요?”
류하리의 질문에 시현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어떤 솔루션을…….”
시현은 씨익 웃을 뿐이었다.
* * *
하태완은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집에서 씻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태완을 보내고 시현과 미카엘은 응접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돈을 냈으니 이제 내가 고객일 텐데 고객서비스가 엉망이군.”
시현은 대답 대신 사탕바구니를 미카엘에게 내밀었다.
젤리나 고급 사탕이 담긴 쪽과 싸구려 박하사탕만 잔뜩 담긴 것 두개가 있었는데 시현은 그중 박하사탕을 미카엘에게 내밀었다.
“…….”
노골적인 찬밥 대접에 미카엘이 당황했다.
“고객만족이 최우선이라면서?”
“당신에게 출입을 허가한 시점에서 그 돈값은 다한 겁니다. 적당히 노닥거리고 나면 돌아가시지요.”
“원 참.”
미카엘은 박하사탕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그래서 이제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자고. 설마 나보다 더 복수를 잘 할 수 있다고 정말 말하는 건 아니겠지? 허세였지 그거?”
“아뇨. 허세가 아닙니다.”
“내가 돈을 더 내야 말해 주려나?”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시현이 미소를 지었지만 그 순간 정말 테이블 위에 돈다발이 하나 더 놓였다.
5만 원권 100장…….
그걸 내려놓은 미카엘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새끼 허세 떨더니만 어찌 나오나 보자.’
그런 눈치였다.
하긴 그가 누군가에게 가하는 고통은 인간이 감히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미카엘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 고문을 고작 인간이 우습게 보고 있으니……
“허세인지 아닌지 테이블에 덮어둔 카드 패를 확인하는 데 500만원이라.”
“내 궁금함을 해소하는데 이 정도는 싸지. 이 정도 지출은 나에겐 아무런 문제도 아니야. 돈으로 날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미카엘의 눈이 시현을 노려본다.
“자, 말해 봐. 과연 나보다 네가 더 이걸 잘 할 수 있다고? 그게 허세가 아니라 진짜란 말이지?”
그 순간 류하리는 자신의 입김이 새하얗게 얼어붙는 걸 느꼈다.
어느새 차가워진 실내 안에서 그림자가 춤춘다.
어둠과 그림자가 시현의 발밑에서 춤추며 시현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허튼 말장난으로 기만하려고 하지 마라. 자, 말해 봐!”
어느새 미카엘에게서 흉흉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다.
‘허억?!’
류하리가 놀라서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영혼조차 얼어붙는 것 같은 한기가 그녀의 폐부를 얼어붙게 했다.
인간의 영혼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 저 끔찍한 존재는 시현이 자신에게 허세를 부린다 생각하고 승부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 시현이 허세였다고 인정한다 한들 용서할까?
어쩌면 자신을 모욕한 죄를 물어 시현을 바로 난도질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거 참. 그러시다면야 역시 고객만족이 최우선이죠.”
시현은 그리 말하고 돈다발을 받아 챙겼다.
“어?”
류하리와 미카엘이 동시에 놀랐다.
설마 그걸 받을 줄이야?
“이봐.”
“잠시.”
시현이 손을 까딱였다.
“응?”
미카엘이 의아해하자 시현이 귓속말을 시작했다.
“…….”
“어떻습니까?”
“어. 음.”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정말?”
“네. 고통의 총량을 겨루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객만족을 겨루는 거니까요. 어떻습니까?”
“하…… 하하하하.”
미카엘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미치겠군! 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어째서 당신 같은 걸 발견 못했을까?”
“만족하셨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재미있겠는걸. 내가 도울 일은 없나? 나도 좀 끼었으면 좋겠는데.”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자력으로 하겠습니다. 도움은 사양하지요. 그리고 고객 대접은 그 궁금증을 풀어준 것으로 끝입니다. 또 하나 더. 다음부터 당신에게는 좀 요금을 더 올려 받겠습니다. 당신에게 500만이 푼돈이라면 푼돈에 계속 끌려 다닐 수는 없지요. 500만이란 금액은 내가 필요해서 책정한 게 아니라 절박한 사람들의 진실성을 시험하기 위한 금액입니다. 아, 물론 탐정 업계 스탠다드 요금이기도 하고요.”
“알겠다. 납득하지. 역시 당신, 대단해.”
그 순간 미카엘의 몸이 푹 꺼지듯 지면에 쓰러졌다.
그리고 일어난 존재는 미카엘이 아니라 스트리머 살인사건 때 류하리의 목에 칼을 겨누었던 남자였다.
“당신은?!”
“보아하니 주인님이 매우 만족하신 것 같군.”
남자는 부럽다는 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현은 귀찮다는 듯 의자에 앉아서 손을 털털 털었다.
“알겠으니까, 가. 좀.”
“…….”
그는 말없이 물러났다.
“그래서. 뭐라고 말한 거예요?”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진짜. 설마 저도 500만원 꽂아야 해요?”
“안됐지만 탐정은 경찰을 고객으로 삼지 않습니다. 시현탐정사무소의 우수한 고객서비스를 체험하시고 싶으시다면 경찰 그만두셔야 합니다.”
“그가 만족하고 떠난 걸 보니 허세는 아닌 것 같은데……아, 궁금하게 계속 그럴 거예요?”
“이해해 주시길.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거니까.”
시현은 끝까지 입을 다물고 대신 사탕바구니에서 젤리를 꺼내 입에 던져 넣었다.
* * *
하태완은 씻고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자도 자도 잠이 부족하다. 몇 날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좀비처럼 배회했었기 때문에 그의 몸은 죽지 못해서 실낱같은 숨결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그의 집의 벨이 울렸다.
“마중 나왔습니다.”
탐정 시현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시죠? 조수 분은?”
“조수는…… 경찰 신분이라 오늘 일은 안 보는 게 나을 겁니다.”
“네? 그녀가 경찰이라고요?”
하태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잠입해서 절 조사하는 경찰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일에는 떼어놓고 왔습니다. 오늘은 꽤 화끈한 일을 할 생각이거든요. 뭐 고객님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말이지요.”
“…….”
“일단 함께 가실까요? 컨디션은 어떠십니까? 식사는 하셨는지요?”
시현은 그에게 패스트푸드점의 로고가 박혀있는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하태완은 그걸 받아들고 시현을 따라나섰다.
* * *
김치 공장의 휴게실 바깥.
이제 막 일을 끝내고 휴식시간을 맞이한 중년 여성 한 명이 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응? 뭐야. 동이니?”
[엄마! 나 급히 필요해서 그러는데 돈 한 30만 원 정도 줘.]
“뭐? 아니, 그런 돈이 어딨니!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네가 사고 쳐서 그거 배상해 주느라…….”
[그러니까 돈 주라고. 돈! 안 그러면 나 또 중고거래로 돈 땡길 거야? 엄마가 안 주면 사기 쳐서 다른 놈에게 땡길 거라고. 그럼 배상금이랑 뭐랑 해서 더 나가는 거잖아!]
“제발, 보호감찰 기간이잖니…….”
[엄마가 안 주면 배상금이랑 해서 더 많이 나가는 거야. 지금 30만 원 주고 끝낼 거야? 아니면 30만 원에 배상금 해서 더 낼 거야? 엉?]
“아니, 그…… 대체 어쩌라는 거니. 아, 알겠어. 어떻게 해 볼 테니까 제발 사기만은 치지 마렴. 흑…….”
중년 여성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아, 구질구질하게 울지 마. 쫌. 그깟 30만 원 갖고 왜 울어? 어휴, 내가 왜 이런 거지같은 집에 태어나서. 고작 30만 원 가지고 쪽팔리게……. 끊는다! 얼른 송금해!]
정작 아이는 적반하장으로 엄마에게 성질을 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 * *
그리고 그 장면을 언덕 위에서 시현은 집음기를 이용해 모으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그녀가 당신 가해자 아이의 부모입니다.”
“오, 맙소사.”
헤드폰을 쓰고 대화내용을 도청하던 하태완은 양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뭐 이런 끔찍한 놈이 다 있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만약 제가 그 악마와 계약한다면 어떻습니까?”
하태완은 저 모친의 고통을 동정했다.
뼈 빠지게 일해도 자식이 저런 놈이면 싫어도 좋아도 빨대 꽂힌 채로 돈을 마련하며 말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실제로 지금 그 모친은 다른 공장 동료들에게 사정사정해서 돈을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 모친을 위해서도 이런 놈들은 미카엘이 마련한 그 지옥에 처넣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고통의 총량 면에서는 그쪽 계약이 더 낫습니다.”
시현도 그건 인정했다.
“물론 그와 계약하게 되면 당신도 그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지금 당신은 자신이 어찌되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지요?”
“네. 솔직히 뭘 먹어도 맛도 모르겠어요. 살아도 사는 게 아닌데…… 나 하나 지옥에 떨어져서 저것들을 지옥에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군요.”
“네? 하…… 하하하. 주위에선 다들 잊으라고만 해요. 어쩔 수 없으니까. 운이 나빴다.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 애들 상대로 복수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그런데 왜 복수하면 안 되지요?! 왜?!”
“하고 싶으면 해야죠.”
“…….”
“시현탐정사무소는 고객님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고객님이 복수로 만족한다면 당연히 해야지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 점은 당신도 고통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네?”
“당신 자신도 내심 복수는 하면 안 되니까 복수를 할 거면 나도 지옥에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지금 계속 말했지요. 그 계약을 받아들이면 당신도 고통 받는다고.”
“네.”
“정말 그놈들이 나쁜 놈들이라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왜 무고한 당신이 같은 벌을 받는 걸 받아들입니까? 그것 자체가 본인은 아직 진심으로 납득 못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
“자신이 파멸하면서 이루는 복수 어디에 만족이 있겠습니까? 그런 건 고객만족이 아니에요. 저희 시현탐정사무소에서 추천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럼…….”
“우선 틀을 깰 필요가 있군요. 파격이라는 걸 해 볼까요?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계약을 진행해야 합니다.”
“…….”
“수명 3년. 제 비용은 그겁니다.”
“3년이라. 정말 수명을 받아갈 수 있는 겁니까? 아니…… 물어보는 것 자체가 바보 같군요. 받아갈 수 있겠지요.”
데드맨31
촉법의 사각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