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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맨31-38화 (38/269)

제38화

‘비록 발로 뛴 다음에 나중에 추리한 척 허세 떠는 핫 리딩 형 탐정이지만 그래도 눈치는 비상하구나. 머리가 좋긴 좋네. 그 탐정.’

류하리는 새삼스럽게 시현에게 감탄했다.

서장에게 중간보고를 하고 나니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아서 신난 류하리가 보무도 경쾌하게 깡총깡총 경찰서 안을 뛰어다녔다.

그런데 경찰서 분위기가 이상하다.

“아, 류 경위님.”

그녀의 팀장인 박진감 경위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어.”

“네?”

“일단 이리 와봐.”

박진감 경위는 수사과의 조사실로 류하리를 불렀다.

조사실 근처에서부터 고성이 들려왔다.

“이 사기꾼 새끼! 네놈 때문에!”

“아이고, 나 죽네! 사람 죽는다! 경찰들은 뭐하냐? 선량한 시민 다치는데?”

민원인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경찰들에게 잡혀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민원인들끼리 싸움이 났어.”

“네?”

확실히 민원인 간에 싸움이 났다.

퀭한 눈, 잠을 며칠째 못 자 광인처럼 변한 젊은 남자가 눈을 부리부리 빛내고 있고 그 너머에 살집 있고 둔해 보이는 중년남자가 엄살을 떨고 있다.

경찰들이 말리고 있는데도 젊은 남자는 죽일듯한 기세로 중년 남자에게 달려들려 하고 있는데 비쩍 마른 몸에서 무슨 힘이 나는지 주위 경찰들이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건 바지사장이고. 저 사람은 거기에 걸려서 전세금을 잃은, 전세사기 피해자야.”

“아. 네. 굉장히 알기 쉬운 이야기로군요.”

“알기는 쉽지만 문제는 꼬여있지. 우선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튀어나온 민원인이 조사받는 사람을 때린 것부터가…… 우리 책임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스트리머 살인사건 때 경찰서 안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민원인이 사람을 때렸다면 이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즉, 경찰들은 이 상황을 조용히 덮고 싶다.

하지만 맞은 사람은 오히려 기승을 부렸다.

“이봐! 내가 여기 조사받으러 왔지만 그래도 폭행으로 저놈을 고소할 수는 있는 거잖아?!”

“이 사기꾼 놈이! 지금 뻔뻔하게! 당신 때문에 나는 신혼집 전세금도 날리고 이혼하게 생겼다고! 폭행죄? 아예 죽여줄 테니까 어디 모가지 내밀어 봐!”

“아니, 저기…….”

민원인이 기세등등하자 바지사장이 몸을 사렸다.

아무리 뻔뻔한 사기꾼이라도 지금 저렇게 눈 돌아간 사람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류 경위. 당신이 좀 맡아줘.”

“아, 알겠습니다.”

류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민원인에게 접근해 보았다.

“저, 실례합니다만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조서를 꾸며야 할 것 같은데요.”

“넌 또 뭐야?”

민원인 김경식 씨는 성질을 내려 하다가 상대가 굉장히 미인 경찰이라는 걸 알아보고 당황했다.

“잠시 따라오시죠.”

김경식 씨는 말없이 류하리를 따라갔다.

* * *

류하리는 김경식 씨에게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까지 조사된 조서들과 대조해 보았다.

“아…….”

그런데 정말 보면 볼수록 막막하다.

전세사기라는 이건 너무 잘 설계된 사기다.

법적으로 책임은 바지사장이 지게 되어 있는데 이 바지사장은 월 200만원을 주면서 계약할 때 도장만 찍게 한 인물이다.

법인의 자금은 대부분 현금이나 애매한 방식으로 빼내서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사기 친 장본인으로 보이는 재무담당 CFO는 이미 국외로 도피한 뒤였다.

“뭐해? 아가씨? 간단한 일이잖아. 저놈이 날 폭행했으니까 폭행죄로 잡아넣으라고.”

“뭐?!”

김경식은 분개해서 바지사장의 멱살을 다시 잡으려 했다.

그때 류하리가 그들 둘을 말렸다.

“진정하세요. 저기 폭행이 있었지만 당신도 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정상참작을 받고 싶은 거지요? 폭행으로 이분 얽어 넣으면 사기에서 정상참작을 받지 못하실 텐데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류하리는 은근히 바지사장을 위협했다.

법대로 하면 폭행죄가 맞겠지만 대한민국 경찰이라는 게 융통성이 있는 일이라 그대로 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신도 사과하세요.”

“사과라니 저는 저놈 때문에 집 재산 다 날리고 이혼하게 생겼는데…….”

김경식으로서는 납득 못할 소리다.

당장 눈앞에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사과를 하라니?

“이 사람도 피해자예요. 괜히 명의 팔았다가 혼자서 뒤집어쓰고 감방가게 생겼는걸요.”

“피해자는 무슨! 한패거리가 분명하다니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새끼부터 폭행죄로 처넣어!”

바지사장과 김경식은 언성을 높이며 취조실 안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취조실의 문을 누가 두들겼다.

근육질 헬스남자, 권 경장이었다.

“아, 류 경위님. 저 사람 수배 걸렸어요.”

“네?”

“강남경찰서 쪽에서 수배 걸었어요. 구속영장 나왔고요. 증거인멸 위험 있다고…….”

“어?!”

그제야 바지사장도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흥분해서 머리에 피가 올랐었지만 구속한다고 하자 피가 싹 식는 느낌이었다.

“아니, 나도 사기당한 피해자라고! 난 그런 건 줄 몰랐단 말야!”

“그래서 말인데 폭행으로 이분 신고하시겠어요?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셔야 조금이라도 형량이 줄어들 것 같은데요.”

“아, 알겠소. 젠장. 고소 안 하면 되지? 나도 진짜 몰랐소. 난 그저 내 풍부한 사회경험을 높이 평가해서 재취직 시켜준다고 해 가지고 한 것뿐인데…….”

바지사장은 결국 류하리의 요청에 따라 폭행으로 김경식을 고소하는 것은 포기했다.

“휴우…… 당신도 조심하세요. 경찰서 안에서 폭행을 하다니…….”

“아. 죄, 죄송합니다.”

‘흠. 그래도 나 사이에서 중재 잘했잖아? 나 좀 경찰다운 듯?’

류하리는 스스로에게 뿌듯해하며 김경식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집도 잃고 이혼도 하게 되었다는 건 무슨 소린가요?”

“아, 저, 그게 말이지요.”

김경식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딩동…….

시현탐정사무실의 벨이 울렸다.

잠시 후 칫솔을 입에 문 시현이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그곳에는 류하리 경위와 당황한 표정의 김경식이 있었다.

“뭡니까?”

시현이 칫솔을 문 채로 물어보았다.

“늘 하는 그거 안 해요? 손님이 될지도 모르는 분 데려왔어요.”

“내가 살다 살다.”

시현은 멍한 표정으로 칫솔을 입에 물고 문에서 비켜섰다.

“오래 사셨나 봐요?”

류하리가 들어서며 빈정거렸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 살았지요. 하지만 형사님이 저에게 고객을 알선하는 경우는 처음 봐서요.”

“고객일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부탁드려요. 일단 상담부터 하시죠?”

“저…… 여긴 뭐요?”

김경식이 당황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찰이 오라고 해서 갔더니 탐정사무소이니 황당할 수밖에.

시현도 황당한 판에 민원인은 오죽하겠는가?

“자자,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아, 네. 실례합니다.”

김경식은 류하리가 안내하는 대로 탐정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차는 뭐로 하시겠어요? 커피? 녹차?”

류하리가 멋대로 시현탐정사무소의 탕비 설비를 뒤진다.

“음.”

시현은 화장실로 가서 칫솔질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시현탐정사무소의 소장. 시현입니다.”

“아, 네. 저, 저는 김경식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지요?”

“그게 말입니다.”

김경식은 다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 했다.

“과연…….”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대로는 해결보기 힘든 일이라 제게 데려온 거로군요.”

시현의 시선이 류하리로 향했다.

“네. 어떻게 할 수 없을까요? 너무 사정이 딱해서 어떻게 해드리고 싶은데 경찰인 저로서는 한계가 있네요.”

“…….”

시현이 어이없다는 듯 류하리를 바라보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네? 저요?”

“예.”

시현은 류하리를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했다.

“우선 이 상황은 꽤 골치 아픕니다.”

“왜죠?”

“이 사기 사건은 이미 경찰이 조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사기 조직은 이미 돈은 빼돌리고 바지사장 하나 대신 총알받이로 세워두었을 겁니다. 맞죠?”

“대단하군요. 어떻게 보지도 않고 그렇게 알 수 있죠?”

류하리는 아직 시현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시현은 김경식의 사연이야기만 듣고 바지사장에겐 실제로 돈이 없으며 사기조직은 돈을 이미 빼돌린 뒤라는 걸 알아챘다.

“당연하죠. 그러니까 제게 온 거 아닙니까? 정상적으로 해결될 문제라면 제게 오지도 않았겠지요.”

왠지 자존심 상한다.

‘아니, 이 남자 뭐든 이렇게 아는 체하네. 나도 명색이 경찰인데 기분 나쁘게.’

그러나 시현의 말, 생각, 그의 판단이 궁금했던지라 류하리는 참고 듣기로 했다.

“문제는 이 사건을 해결해도 저 사람이 구제받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사기꾼들은 돈을 빼돌린 시점에서 이미 원금을 상당히 손해 봤을 겁니다. 뭐 모르죠. 가상화폐나 주식 같은 데 투자했는데 갑자기 그게 급등해서 원금보다 오른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게 흔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제가 금원을 제공해서 저 사람을 구제할 수도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제가 사람의 수명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이 계약 자체가 무의미해지거든요. 지금 당장 돈을 싸들고 가서 노숙자나 도박중독자, 마약 중독자들에게 푼돈으로 수명을 1년씩 갈취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기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범죄수익을 환수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탐정으로서 일할 때 저는 주에 500만원씩 조사비를 받습니다. 그걸 저 사람이 낼 수는 없겠지요. 수명을 받으면 그걸 안 받고 일해도 되겠습니다만…….”

“왜요?”

“아니, 저는 농담으로 고객만족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얼마 되지 않는 만족감을 주고 수명을 빼앗고 싶진 않아요.”

즉, 시현은 범인을 잡을 수는 있지만 그걸 잡아도 수명을 빼앗을 만큼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주일 배우 사건 때는 눈탱이를 쳤잖아요?”

“눈탱이라니요. 그때는 저 아니었으면 죽을 사람 살려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 정도는 받아도 무방하지요.”

“알겠어요. 그럼 제가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죠. 뭐.”

“네?”

류하리가 의뢰인, 김경식에게 돌아갔다.

“실례합니다만 김경식 님.”

“예?”

“지금 같은 경우 진범을 잡는다 하더라도 피해를 온전히 원복 받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알고 계시죠?”

“네.”

“그래서 말인데요. 만약 돈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범인을 잡는 걸 원하시나요? 대가를 개인적으로 치러야 하더라도?”

“대가를 개인적으로 치러야 하다니. 얼마나 내야 합니까?”

“돈으로는 주당 500만이죠?”

류하리가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필요 경비도 들어갑니다.”

“그런 큰 돈을…….”

불륜조사 때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미 사기를 당해서 경제적 피해를 입어 여유가 없는 사람이 제대로 범인을 잡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런 거금을 낼 수는 없다.

“그게 아니면 수명 1년이라면 어때요?”

류하리의 질문에 김경식은 눈을 깜빡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데드맨31

계약의 경쟁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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