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수명이 줄어들더라도 범인을 잡고 싶냐는 거예요..”
“수명 1년 말입니까? 돈을 내지 않으면?”
“네.”
“어떻게 수명을 거둬갑니까? 뭐 어디 장기라도 떼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면 수명을 받아가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서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그런 걸로 진범을 잡을 수 있다면 물론이지요.”
김경식은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속에서 천불이 터지는데, 결혼생활도 거덜 나, 내 전 재산도 날아가게 생겼어. 그동안 내 인생 다 끝장나게 생겼는데 지금 여기서 뭔가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새 출발도 못 하겠다. 그걸 생각하면 진짜 사기꾼 놈들을 내손으로 죽이고 깜빵을 가도 감내할 수 있을 판인데 수명 1년 정도야…….’
그러자 류하리가 박수를 딱 쳤다.
“들었지요?”
“아무리 들어도 그냥 안 믿으니까 하는 소리지 각오가 되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김경식은 진심으로 한 말이지만 시현은 여전히 못미더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약서를 쓰게 하고 나서 나중에 정산할 때가 되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이런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닐 것 같은데 여럿을 엮으면 계약도 좀 더 한 번에 많이 거둘 수 있을 텐데요?”
정작 시현을 설득하는 건 김경식도 아니라 류하리였다.
“진짜 경찰이 그래도 됩니까?”
“왜요?”
“아니, 그 뭐랄까. 스스로 알아서 할 때는 의욕이 생겼는데 이렇게 어디 얼마나 해 볼까 보자 하면서 멍석을 깔아주니까 매우 하기가 싫군요.”
“까탈스러우시네요.”
“원래 미식가는 좀 입맛이 까다로운 법이지요.”
그렇게 말했지만 시현은 계약서를 꺼냈다.
“정말 하기 싫지만 고객님이 일단 입으로 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했으니 어쩔 수가 없군요. 그럼 여기 서명하시겠습니까?”
“네? 잠깐만요. 정말 수명을 제공한다고 되어 있는데요?”
계약서를 읽어본 김경식이 대경실색했다.
입으로야 수명도 낼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말 그걸 계약서로 들이미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깔끔하게 돈으로 해결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
“사기 당해서 금전적으로 힘드시지요? 보아하니 혼자서 당한 일 같지는 않은데 피해자 모임이 있는지요? 일단 그 쪽 모임이랑 상의해 보시고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성급히 계약하지 마시고.”
시현은 그리 말하고 계약서를 거두었다. 그러자 류하리가 아쉬워했다.
“계약 오늘 안 하나요? 아깝네요.”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이…….”
시현은 류하리의 오지랖에 눈살을 찌푸렸다.
* * *
시현은 일단 계약 없이 김경식을 돌려보내고 류하리를 노려보았다.
“왜요?”
“본인도 본인이 무슨 잘못 했는지 알죠?”
“아니, 뭐 저는…….”
“일단 조사는 해 두겠습니다.”
“아. 하실 건가요?”
“알다시피 저희 시현탐정사무소는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요. 지금 고객 같은 경우는 계약 과정이 험난할 거기 때문에 우선 사전 조사를 해 두고 나서…….”
“선 조사를 해 두고 나서 정작 사람들이 오면 사소한 단서로 추리한 것처럼 일사천리로 말하겠지요. 그럼 사람들이 아, 이 사람은 탐정 소설의 명탐정 같은 거구나 하고 감탄하고. 그렇지요?”
“네, 그것도 고객만족을 위한 연출이니까요.”
시현은 자신이 사전 조사에 힘쓴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같이 불을 지른 이상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협력이요?”
“네. 경찰이시니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물론 저도 조사를 할 겁니다만 경찰은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보가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경찰에서 정보를 유출하라는 소리인데?
그러나 시현은 류하리를 은근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제게 덤터기를 씌워놓고 혼자서 뒷짐 지고 구경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
시현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다 자신도 쓰게 생겼다.
* * *
“끄응.”
류하리는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갈등하고 있었다.
전세사기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게 성신아 경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연락하면 무시했는데 내가 전화를 걸어야 하다니.”
하지만 일단 자신이 일을 저지른 이상 책임질 수밖에 없다.
“그 탐정에게 호의를 위장해서 손님을 넘겨주려고 했는데 나까지 책임을 같이 지게 생겼군. 어쩔 수 없지.”
류하리는 망설이다가 성신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국번이오니…….]
“뭐하냐?”
[어머. 이게 누구야. 수석 졸업생 류하리 경위 아냐? 바쁘셔서 동기 전화쯤은 싹 씹으시던 분이 왜 전화를 거셨담? 혹시 결혼하니? 축의금 필요해서 그래? 아니, 너희 집은 부자니까 축의금보다는 혹시 친구가 없어서 그러는 거 아냐?]
“지금 너희가 그 전세 사기사건 조사 중이야?”
[너희라니 누구누굴 말하는 걸까?]
“너랑 선배님 말야.”
[내가 답해 줄 이유가 있나?]
“긍정하는 걸로 알겠어. 그래서 말인데 상황이 어때?”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데? 만나서 이야기할까?]
“아니. 격무로 바쁘실까 봐 그랬지.”
‘이게 만나서 얼굴보고 말하면 얼마나 빈정거릴려고?’
류하리는 그리 생각했지만 현재 칼자루는 성신아가 쥐고 있었다.
[에이, 그래도 얼굴보고 이야기 하지?]
“알겠어. 어디서 볼까?”
* * *
강남경찰서 인근 카페에서 류하리와 성신아가 만났다.
“왜 여기로 부른 거야?”
“아니,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그래서. 우리 부잣집 딸내미에 사격 선수셨던 수석 졸업자 류 경위님께서는 대체 뭐가 궁금해서 그렇게 물어보시려고? 이거 차석에 집안도 안 좋은 내가 대답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렇게 길게 말하면 혀 깨물진 않아?”
“아니, 워낙 많이 말해서 이제 익숙해.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은~ 간장 공장 공장장이 그린 기린그림이고 뭐 그 정도?”
대체 얼마나 류하리에게 빈정거리고 싶었으면 혀도 안 씹고 잘도 말하는 걸까?
“우선 피해액 규모가 얼마야?”
“흠. 아니, 네가 왜? 너는 그 서장님이 맡긴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 아니었어?”
류하리가 시현을 감시한다는 건 이제 성신아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야.”
“그런 경우도 있나?”
“그래서 대충 피해액 규모가 나올 거 아냐. 피해자들 모여서 소를 넣었으면?”
“음 소송 규모는 약 800억 정도야.”
“800억? 피해자 인원은 어느 정도고.”
“공유해 줄 수 있는 건 공유해 줄게.”
성신아 경위는 꽤나 시원하게 류하리에게 자료를 넘겨주었다.
“소송 규모는 800억이지만 실제로 사기 조직이 만진 돈은 더 많을 거야. 애초에 이런 조직은 부동산 투기 조직이거든.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 부동산을 마구 사들이고 그 리스크는 불쌍한 전세 세입자들에게 사기로 헷지 하는 조직이니 부동산 투기로 번 돈도 꽤 되겠지.”
“의외네? 왜 이렇게 시원하게 내게 넘겨주는 거야?”
“아니. 너 이거 건드리면 미운털 박힐 걸?”
“미운털? 무슨 소린데?”
“조사해 보면 알거야.”
성신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조사 안 하고?”
“나야 경찰 월급도 소중한 빈티 나는 집안 애잖아? 기껏 경찰 간부 코스를 밟고 있는데 모가지 날아가지 않게 조심해야지. 하지만 너희 집은 부자잖아? 모가지 날아가도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네가 모가지 걸어야지. 안 그래?”
성신아는 그렇게 말하고 커피 잔을 들고 일어났다.
“커피 잘 마셨어. 부잣집 따님이 사줘서 그런지 특별히 맛있는데?”
“으이구.”
* * *
주식회사 정주택 하우징.
그것이 이번 전세 및 보증금 사기를 일으킨 회사의 이름이다.
신축빌라나 오피스텔 매물들 중 팔리지 않은 회사 보유분을 모아서 염가에 수합해서 전세를 내주고 그 전세금을 자산운용을 해서 이자를 번다.
그러다가 집값이 오르면 팔아서 수익을 내는 방식의 사업을 벌인다는 게 이 회사의 사업모델이다.
하지만 이 경우 집값이 폭락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 집값 폭락할 때를 위해서 대표이사는 바지사장으로 매번 임기 때마다 교체해왔다.
법인 등기를 떼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흐음.”
최형림 검사는 서류를 탁탁 테이블에 쳐서 수평을 맞추고 스테이플러로 서류를 찍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잘 알잖나.”
검사부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빈손으로 퍼팅연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연관된 법무법인이…… 우리 선배님 가 계신 곳이네. 그분께 누가 되지 않게 적당히 군불 지피다 끝내게.”
“바지사장 정도 잡고 끝내란 말씀이시군요.”
“쉿. 거 젊은 친구라 굳이 입 밖에 낼 필요 없는 것도 말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군.”
“죄송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물의 빚지 않고 정리할 테니까요.”
최형림은 서류를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돌발사태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요?”
“돌발사태?”
“네. 피해자들이 선을 넘는다든가 하면…….”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최형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휴대폰을 들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성신아와 헤어진 류하리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성신아는 언제나처럼 류하리를 놀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말에 뼈가 좀 들어 있었다.
‘조사해 보면 미운털이 박힌다니 무슨 뜻이지?’
그런데 그때 그녀의 눈에 익숙한 인물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시현이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군요. 류 경위님.”
“당신과 만나는 건 우연이 아니겠죠? 당신의 그 능력이 있으니까요.”
류하리는 이제 시현의 능력을 알고 있다.
시현에겐 수명을 보는 능력과 그것을 기반으로 상대의 위치를 아는 능력이 있다.
“여기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우연입니다. 집중할 때만 보이는데 그게 꽤 피곤하거든요. 정말 일 때문에 온 겁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서류를 꺼내 보였다.
주식회사 정주택 하우징의 법인정관이었다.
“뭘 찾아온 거예요.?”
“여기 법무사 도장 보이시죠?”
정주택 하우징의 법인정관 표지 에는 법무사 권선우 사무실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네.”
“법인을 설립하고 등기할 때 업무를 대행하는데 보통 이건 법무사무소에 맡기지요. 그 법무사무소의 주소가 여깁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빌딩을 가리켰다.
“없는데요? 대신 있는 건…….”
법무법인 선양이라는 다른 이름의 로펌 사무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망했나 보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법무법인 선양이 바로 피해자들이 수임한 법무법인입니다.”
“네?”
“뭔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흠. 성신아가 왜 여기서 보자고 했는지 알 것 같군요.”
류하리는 기막혀했다.
“하지만 번듯한 변호사가 사기에 가담하다니…….”
“혹시 X유 다단계 사건 아십니까?”
“네. 그게 왜요?”
“그 사건의 사기조직이 피해자들에게 갈취해 간 것만 2조가 넘는데 아무리 변호사라도 그만한 돈을 벌려면 얼마나 힘들 것 같습니까? 설령 전관예우를 받는 판검사 출신 변호사라 하더라도 개인자산 100억을 넘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즉, 사기행위에 가담하는 변호사가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니라는 건가요? 그만한 돈이라면 변호사라도 양심팔고 사기꾼이 된다?”
“네. 그렇습니다. 특히 로스쿨이 생기고 변호사 공급이 늘어난 지금은 더욱 더 그렇지요.”
시현이 그렇게 말할 때였다.
데드맨31
계약의 경쟁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