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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맨31-42화 (42/269)

제42화

청원살인 #1

어두운 방, 벽에 붙어 있는 작은 TV에서 한영건설 회장 최중선, 집행유예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쳇.”

최형림은 그 뉴스를 보며 넥타이를 풀었다.

“당신 아버지지?”

“…….”

최형림이 돌아보니 방구석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여성이 와이셔츠 한 벌을 입은 채 감자칩 봉투를 뜯고 있었다.

사이다패스였다.

“재벌가 아들인데 집이 별로 안 크네? 그렇다기보다는 검사 치고도 검소한 것 같은데?”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심 한복판의 원룸 오피스텔, 가구나 집기도 특별히 좋아 보이는 게 없었다.

“몸에 걸친 것들 몇 개랑 차만 좋구나. 품위유지용인가?”

“그가 재벌이지 제가 재벌인 건 아니거든요. 검사 급료가 적진 않지만 결국 공무원 급료고요.”

“하하. 청렴결백하셔서 그러나?”

“언제부터 있었지요? 왜 제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겁니까?”

“샤워 좀 했어. 그래서 말인데 당신. 무슨 생각이지?”

“무슨 의미로 묻는 겁니까?”

“날 수사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것 같아서. 설마 날 잡아넣어서 공을 세우려는 거야?”

그 순간 갑자기 최형림의 세계가 뒤집혔다.

사이다패스가 손으로 최형림의 멱살을 잡고 침대에 처박고 올라탄 것이다.

가녀린 체구의 여성이 올라타 있지만 그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은 마치 맹수가 앞발로 찍어 누르는 것 같다.

뿌드드드득…….

최형림의 옷이 뜯어진다.

“날 우습게보지 마. 당신이 딴 생각 품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런데도 왜 내버려두는지 알아? 당신쯤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거든?”

“쯧.”

최형림은 그녀의 무지막지한 힘에 깔려있음에도 혀를 찼다.

“죽이지도 않을 거면서 이런 짓은 좀 그만두지 그래요. 좋은 옷이 몇 벌 없는데…….”

“내가 못 죽일 것 같아? 지금 상황에서 옷부터 걱정하다니.”

“적어도 지금은 못 죽일 텐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검사라는 고급 정보원이 없으면 당신은 흔한 분노조절장애 살인범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날 팔아넘길지도 모르는 놈을 참으면서까지…….”

“새 수사부장이 옵니다. 책임과 권한 모두 그가 지겠지요. 수사부장이 살해당한 엄청난 사건을 나 같은 평검사가 지휘할 수는 없습니다. 즉…… 당신을 당장 잡아넣지 않아도 제가 지는 부담은 거의 없습니다.”

“당신은 날 안 잡아도 된다?”

“네. 지금 당신은 좀 큰 피라미예요. 잡으면 분명히 인사평가가 높아지겠지만 그 정도로는 제가 원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최형림은 고개를 돌려 TV에서 나오고 있는 최중선 회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사이다패스가 최형림의 목을 놓았다.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에게 뛰어드느라 바닥에 떨어뜨린 감자칩 봉투를 집어 들어서 안에서 감자칩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당신이 날 잡아넣어서 공을 세우려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었는데 꼴을 보아하니 한동안은 믿어도 되겠군. 당신을 믿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나 못지않은 또라이라는 걸 말이지.”

“그럼 부탁이니 이제 좀 제 눈앞에서 사라져 주시지요? 사적인 영역까지 들어오는 건 매우 불쾌하군요.”

그때 최형림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성신아 경위의 연락이었다.

“오, 사적인 영역에 어떻게든 발을 들이밀려는 경찰 아냐? 그녀도 네가 개털인 거 알고 있나? 재벌가 한영건설 자제인 줄 알고 비비적거리고 있을 텐데?”

“그래도 귀여운 면이 있지요.”

최형림이 그렇게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큰일 났어요, 선배님!]

“무슨 일인가요? 성 경위님?”

[어, 언론사가 엠바고를 깨고 사이다패스인지 뭔지의 선언문을 공개했어요!]

“……아.”

최형림은 혀를 차고 사이다패스를 비난의 눈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최형림의 방엔 아무도 없었다.

“제길.”

* * *

사이다패스라고 자처하는 살인마가 살인현장에 선언문을 뿌렸다.

그 사실은 현재 엠바고가 걸려 있었다.

선언서를 만들어 뿌리고 자신의 입장을 설파하는 범죄자는 보통 공명심이 강하다.

이런 사람을 언론이 받아주게 되면 신이 나서 날뛰게 되고……. 수사하기에는 오히려 편해진다.

아무래도 언론이 받아주기 시작하면 선언문을 계속해서 낼 수밖에 없고 내려고 하면 할수록 흔적이 많이 남게 된다.

그러나 수사가 편하자고 범죄자의 공명심을 채워줄 수는 없는 일이다.

수사기관의 체면이 걸린 일이다.

더구나 사이다패스가 작성한 선언문의 내용은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이어서 사람들의 호응을 살 수가 있었다.

사이다패스를 확신범, 사상범으로 보이게 만드는 선언문의 전문을 공개해서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검찰과 경찰은 일단 언론사에 엠바고를 걸고 현재 정보공개를 얼마나 할지 고심 중이었다.

‘선언문이 존재한다는 건 알리되 선언문의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다.’

‘선언문의 존재는 물론 스스로 칭하는 사이다패스라는 이름도 알려선 안 된다. 범인의 공명심을 충족시켜주면 수사기관의 명예가 실추된다.’

‘하지만 선언문을 계속 감출 경우 범인이 점점 더 강력한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 책임은 누가 지나?’

그런 식으로 선언문의 존재조차 공개할까 말까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 언론 매체중 하나 , ‘다스미디어’라는 회사가 엠바고를 깨고 선언문 전문을 공개해버린 것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

서부지검 수사부장을 살해해버리는 과감함, 선언문에 담겨있는 반체제, 반권위적인 대담함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야. 부장검사를 죽이다니. 대단해.’

‘마약쟁이들이랑 사기꾼도 죽였다면서? 훌륭하다. 협객이야!’

‘미친 놈들아. 살인자를 칭찬하고 있냐?’

‘다른 살인강도와 달라. 다른 살인 강도들은 방범이 허술한 집에 사는 사람들을 죽이지만 저놈은 변호사니 검사니 그런 사람들을 죽이잖아?’

‘어휴. 부자 죽이면 그저 신난 거지 빨갱이새끼.’

‘쯧쯧. 키보드 앞에선 키 185의 전문직이 되나 보지? 너는 뭐 변호사나 판검사라서 그쪽 편 드냐?’

‘정말 이 세상에 뭔가 뜻이 있어서 사람을 죽인 거라면 이 사람 죽여 봐.’

‘나 이 새끼에게 학창시절에 괴롭힘 당했는데 이놈 사이다패스가 죽여주지 않으려나?’

사이다패스를 지지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 의심하는 자, 이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억울함을 풀려 하는 자까지 나타났다.

수사기관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지고 서부지검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분노한 검찰이 엠바고를 깬 언론사, 다스미디어를 공격하려 했지만 다스미디어가 엠바고를 깨트리자마자 다른 언론사들도 일제히 엠바고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다들 더 자극적인 기사를 써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버렸다.

‘일단 다스미디어는 내버려둬라. 지금은 검찰이 경거망동할 수가 없다.’

검찰의 일거수일투족에 세간의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엠바고 깼다고 언론사를 공격하게 되면 가뜩이나 나빠진 검찰에 대한 인식이 나락으로 달릴 것은 뻔했다.

* * *

시현은 세면대 앞에서 자신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30이라는 숫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제 슬슬 청원자를 구해 줄 때가 아닌가?”

-…….

타자기가 힘없이 타닥거렸다.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기다리세요.

“혹시 구하지 못하는 건, 그 사이다패스 때문인가? 기한 내에 청원자를 더 데려오지 못하면 나도, 그녀도 해방되는 게 맞지?”

-…….

“내가 원한 바이긴 하지만……. 좀 실망이군. 나와 그녀의 인생을 비틀어놓은 네가 내 생각보다 좀 무능한 거 아닌가?”

-무능? 지금 감히 저를 능멸하는 겁니까?

“능멸 못 할 건 뭔데?”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류하리가 들어왔다.

“안에 있었어요? 어째…… 한적하네요?”

“네. 갑자기 일이 끊겼군요.”

“일이 끊겨요? 혹시 사이다패스 때문인가요?”

“글쎄요.”

시현탐정사무소의 주특기는 불륜 조사, 하지만 시현의 진짜 일은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고 수명을 거두는 것이다.

수명을 거래할 정도의 소망, 그것도 금전적인 이득이 아니라 울분과 억울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사이다패스는 매우 강력한 경쟁자다.

“저번 일은 어떻게 되었어요?”

“법무법인 선양과 관련자들이 살해당하면서 상담하던 분들은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포기했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사기당한 금액을 되찾을 수는 없을 텐데요.”

“네. 그렇지만 그들 대다수는 사실 사기당한 자금을 온전히 돌려받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속인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것이 더 우선했었지요. 그 울분이 사이다패스에 의해서 해소되었으니…… 자신들의 수명을 요구하는 수상한 계약에 응할 리가 없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혀를 찼다.

“살짝 짜증이 나긴 하는군요. 공짜로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업계의 물이 흐려지니까요.”

사이다패스가 존재하면 시현의 ‘장사’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요? 그럼…….”

류하리는 기대했다.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는 게 분명한 연쇄살인마. 그런 놈을 잡기 위해서는 역시 초자연적인 힘을 쓰는 탐정, 시현의 도움이 절실하니까.

하지만 시현은 류하리의 기대하는 눈초리를 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공짜로 일하는 사람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제가 공짜로 일할 수는 없지요.”

“아, 또 그렇게 말하는군요.”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아니,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지금 검찰이 주도해서 수사팀을 꾸리고 있어요.”

류하리는 자발적으로 경찰 쪽의 정보를 알려 주었다.

“서부지검 부장검사가 살해당했으니 당연히 검찰이 주도해서 수사팀을 꾸리겠지요. 그래서. 류 경위님은 수사팀에 합류했습니까?”

“아뇨.”

류하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따로 하는 일이 있잖아요.”

류하리가 그리 말하며 시현을 가리켰다.

즉, 시현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수사팀 등에 합류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대로 사이다패스에게 잠재적인 고객을 모두 빼앗기고 탐정 사무소 닫으실 건가요?”

“한동안은 지켜봐야겠지요. 언론이 크게 떠들어대고 있지만 언젠가는 시들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많고, 이 연쇄살인마가 거기에 다 부응할 수 있을 리는 없지요.”

시현은 그렇게 장담했다.

그런데 그때, 타자기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오. 사이다패스가 그렇게나 설치고 있는데도 계약할 만한 대상이 있나 보군요.”

“그러게요. 의외네요. 역시 갈군 보람이 있나?”

“갈군?”

“아뇨. 이쪽 말입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타자기에 꽂혀있는 종이를 살펴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네?”

* * *

성취는 한때 한국 최고의 남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전역에 팬이 있는 톱스타였던 그도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은퇴한 이후 사업가로 진로를 정했다.

연예기획사, 그리고 요식업, 주점 프랜차이즈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막대한 부를 자랑하며 성공신화를 써나갔다.

하지만 그의 성공신화는 더러운 뒷거래로 달성된 것이었다.

연예기획사를 이용해 연예계 데뷔를 미끼로 어린 여성들을 모아 유력자들에게 접대부를 공급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프랜차이즈 산업, 클럽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게다가 그의 배후에 있는 것이 바로 레반테스 호텔의 소유주, 윤 회장.

성취의 불법행위들이 폭로되었을 때 검찰과 경찰, 그리고 언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몰려들어 성취를 옹호해 주니 성취와 관련된 기사는 싸그리 내려가고 사건은 유야무야,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서 불기소, 무혐의, 그리고 집행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이렇게 성취 사건은 유야무야 어둠에 묻히는 것인가 했었는데…….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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