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성취가 훈련을 좀 받았다면 굳이 대여금고라는 단어를 말해서 자신이 어디에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지 말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런데 성취, 이 사람은 성취감이나 자존감을 자신의 물질로 표현하고 보상받고 하는 경향이 강하군요. 내가 은행의 VVIP다. 대여금고도 빌릴 수 있다. 그런 걸 은연중에 자랑하고 싶어 하니까 생각 없이 이렇게 쉽게 정보를 까발린단 말이지요.”
“그렇군요. 그럼 이곳에…… 라고 해도 대여금고를 그냥 조사할 수 있을 리는 없잖아요? 대여 금고 열자고 하면 어지간한 일 아니면 영장청구만 해도 법원에서 절 미친 놈 취급할 걸요? 어쩌면 은행 돈 받아먹는 언론사에서 이걸 물고 늘어져서 절 매장시킬지도 모르죠.”
은행의 대여금고라는 건 부와 명예, 권력을 갖춘 셀레브리티들을 위한 서비스다.
그 서비스를 손대려 하면 당연히 사회 전반에서 무서운 반발이 날아들 것이다.
“은행을 털 수도 없고, 역시 성취가 직접 열게 해야겠군요.”
“하지만 열까요? 성취도 그게 자기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 텐데요?”
성취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성취와 연관된 높으신 분들의 추태와 치부가 고스란히 증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 증거만 없어진다면 성취는 어느 날 갑자기 자살로 처리되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류하리가 그런 높으신 분도 아니건만…… 그녀의 머릿속엔 술병과 주사기가 널려있는 채 죽어 있는 성취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살이나 사고사로 처리하기 참 쉬운 놈 아닌가.
“그렇다면 성취 손으로 은행 대여금고에서 빼서 옮기게 해야겠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 * *
“…….”
무뚝뚝한 남녀가 전화기에 찍히는 번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전에 시현탐정사무소에 찾아와 미카엘의 빙의를 받아들인, 미카엘의 하수인들이었다.
무표정한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지, 데드맨?”
[혹시 미카엘이 사이다패스에 관여하고 있나?]
“그건 내가 너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혹시 사이다패스에게 정보를 전해 줄 수 있나 해서. 좋은 정보가 있는데…….]
“좋은 정보?”
[성취의 대여금고는 K은행 XX지점이다. 그렇게 전해 주면 될 거야.]
“뭐? 성취?”
[그래. 그럼!]
“자, 잠깐.”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시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 * *
“아…….”
류하리는 그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대체 누구에게 정보를 가르쳐 준 거예요.?”
“사이다패스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자요.”
“그런 사람을 알고 있어요?”
“이러면 성취가 대여금고에서 물건을 빼겠지요.”
“그러자고 적에게 정보를 가르쳐줘요? 당신은 성취를 지키기로 계약했잖아요?”
“정확하게는 사이다패스로부터 지키기로 했지요. 다른 것들에게 지킨다고는 안 했습니다.”
“…….”
류하리는 시현의 말을 듣고 벙 쪄버렸다.
“물론 성취에게 약점을 잡혔던 높으신 분들이 계약을 완수하기 전에 성취를 죽여버리면 수명을 못 받으니까 적어도 계약을 완수할 때까지는 살려둘 겁니다. 아시잖아요. 시현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거.”
“네. 잘 알죠. 고객만족. 거 어지간하면 당신의 고객이 되어선 안 되겠군요. 당신은 만족이라는 단어를 좀 남다르게 쓰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류 경위님은 성취를 미워하는 겁니까, 좋아하는 겁니까? 분명히 처음엔 싫어하는 걸로 보였는데.”
“물론 싫지요. 저도 경찰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성취가 저지른 행위는 파렴치하잖아요? 이미 정상급 아이돌로서 인기나 부, 그 모든 걸 남들보다 더 넉넉하게 가진 인간이 이런 짓을 벌였는데 좋아할 리가 없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를 사기쳐먹는 걸 방관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기는 아닙니다.”
“뭐 사기라고 말하기엔 분명히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게 고객만족이란 말인가요?”
“고객에게 물 한 잔을 줘도 최상의 만족감을 주려면 우선 고객을 사막에서 헤매게 해서 체액 한 방울 안 남을 정도로 바짝 말리면 됩니다. 그 순간의 물 한 방울이야 말로 최고의 고객만족,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
류하리는 시현의 뻔뻔함에 감탄했다. 진짜 이 정도면 감탄이 절로 나올 수준이었다.
* * *
최형림은 전화를 받고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미카엘?”
[실은 재미있는 첩보가 들어왔는데……. 이걸 말해도 되나 모르겠어.]
“재미있는 첩보?”
[데드맨이 전해 준거다. 날 보고 사이다패스랑 알고 있다면 사이다패스 관련자에게 전해 달라고 하던데.]
“…….”
[사이다패스가 나와 계약한 계약자인지 떠보기 위함이겠지만 내용이 너무 좋아.]
“여기서 제가 그 정보를 받고 활용하면…… 데드맨이라는 자는 사이다패스가 미카엘과 계약을 나눈 계약자이거나. 적어도 관련자라고 알게 되는 거군요.”
[그렇지. 상대 수법에 말려드는 거라 좀 싫은데 그래도 내용이 너무 좋아. 아, 내가 이건 두 번 말했나?]
대체 얼마나 내용이 좋으면 저 미카엘이 두 번이나 말할까?
최형림은 궁금해졌다.
“네. 정보는 받아서 나쁠 게 없겠지요. 그런데 미카엘. 그녀는 당신의 계약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좋은 거지. 나는 데드맨의 당돌한 점을 좋아하지만 그놈이 나를 호구로 보고 놀리는 건 원하지 않아. 그런데 나에게 말했는데 그게 어쨌건 사이다패스에게 전해진다면 아무리 데드맨이 영특해도 오판할 거 아냐?]
“영특하다라…….”
최형림은 미카엘의 단어선택에 쓴웃음을 지었다.
미카엘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드맨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최형림은 그런 데드맨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사실 경찰대학을 다니고 검사가 되었다면 당대의 인재라 할 수 있다.
거기에 화려한 외모, 재벌가의 자제라는 점까지 더해져서 최형림은 언제나 남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미카엘의 관심이 최형림이 아니라 데드맨에게 더 많이 향하니 부끄럽게도 이런 상황에서 질투심을 조금 느꼈다.
그렇다고 미카엘의 관심이 고픈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냥 자신과 남이 있으면 당연히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 익숙한 것이다.
자신을 제치고 남이 더 많은 관심과 호의를 받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약간의 질투심조차 생경하다.
[그럼 알려 주지. 들으면 당신도 놀랄 거야.]
미카엘은 시현에게 들은 정보를 전해 주었다.
“…….”
최형림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정말 재미있는 친구군요. 그 데드맨이라는 친구는!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놀아나고 싶지는 않지만 미끼가 너무 좋군요.”
성취의 보험용 파일은 높으신 분들의 치부가 잔뜩 들어 있는 아주 귀한 정보다.
최형림 입장에서는 너무너무 군침이 돌아서 견딜 수 없는 미끼가 아닌가?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미끼가 걸려있으면 아무래도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아예 듣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들어버린 이상 현혹될 수밖에 없다.
“어디 얼마나 잔재주를 부리는지 한 번 보도록 하지요.”
* * *
시현과 류하리는 성취를 재워두고 그들도 쪽잠을 잤다. 류하리는 간이 침대에서, 시현은 의자에 앉아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휴대폰 알람 소리에 시현이 눈을 떴다.
“아함. 자 그럼…….”
그는 일어나서 성취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툭툭 쳐서 깨웠다.
“뭐, 뭐야?!”
“일어나세요, 성취.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니?”
“K은행 XX지점 대여금고가 사이다패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어째서 당신이 그걸 알고 있지?”
“당신도 아시겠지만 적이나 저나 사람들의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적을 상대하면서 은행 대여금고에 넣어뒀다고 안심해서는 안 되지요.”
시현이 말하는 걸 보고 있던 류하리가 말문이 막혔다.
‘와, 진짜 개새끼다.’
자신이 적에게 알려 줘 놓고선 시치미를 뚝 떼다니.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시현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이다.
성취의 반응을 보아하니 시현의 예측대로 K은행 XX지점에 성취의 대여금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이 경우는 성취 이놈이 어리숙한 건가? 왜 굳이 대여금고에 감춰뒀다고 말해? 한국에 대여금고가 몇 군데나 있다고? 외국 영화 많이 봐서 그럴싸해 보여서 그랬나 본데 하여튼 허세는…….’
류하리는 성취의 어리숙함을 탓했지만 이 경우 성취의 어리숙함보다는 시현의 영특함, 아니, 악랄함과 뻔뻔함이 더 돋보였다.
성취는 당황했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우선 전화기를 들었다.
“일단 확인해 보지.”
그는 K은행의 XX지점, 자신을 담당하는 프라이빗 뱅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사색이 되어 돌아보는 게 아닌가?
“오, 오늘 아침에 거, 검찰에서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던데? 영장이 없어서 알려 주진 않았지만 내가 여기 프라이빗 뱅킹에서 관리하는 고객인지 물어봤다고?”
“검찰?”
류하리는 의외의 사실에 당황했다.
여기서 왜 검찰이 나오는 것일까?
분명히 시현은 미카엘에게 전화해서 정보를 전해 주었을 텐데.
물론 미카엘은 그 윤 회장의 아들이니 검찰 쪽과 라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이 성취의 대여금고를 여는 건 윤 회장이 원하는 바가 아니지 않을까?
“으윽…….”
그러나 성취에게는 검찰이건 경찰이건 사이다패스건 전부 다 자신을 노리는 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성취는 겁이 너무 나서인지 아니면 알코올 중독의 부작용인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아직 은행 영업시간이고 사이다패스는 대낮에 은행원을 털어서 은행직원들을 죽여가면서까지 일을 하고 싶어 하진 않아 할 겁니다.”
류하리는 시현의 말을 듣고 혀를 찼다.
‘빌라 경호원들을 살해하지 않은 것도 사이다패스가 현재로서는 평판을 신경 쓰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걸 예측하고 은행 영업시간 안이라고 편하게 잠을 자다니? 만약 지금이라도 돌아서 사람을 죽여대면 어쩌려고?’
시현의 담력이 정말 대단하다.
아니, 애초에 담이 크지 않으면 적에게 자신의 입으로 귀한 정보를 누설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지.
“그럼…….”
“이리 된 거, 대여금고에서 꺼내서 직접 옮깁시다.”
시현이 대여금고를 열자고 제안하자 성취가 꺼림칙해하며 시현을 노려보았다.
“그 대여금고 안에 있는 건 내 목숨 줄이야. 함부로 열었다가 유실이라도 되면…….”
“애초에 유형의 금고에 넣어둔 것부터 잘못입니다.”
“뭐?”
“금고에 넣어뒀다고 말하면 저 같은 사람은 단번에 그게 메모리카드나 종이서류, 사진 등 일종의 유형의 데이터라는 걸 알게 되잖습니까? 그것만 파괴하면 끝나는.”
“그럼 어쩌라고?”
“차라리 해외 서버에 올려두고 정해진 시간에 접속해서 갱신하지 않으면 자료가 공개되게 만드는 게 낫지요. 그쪽이 당신의 안전을 담보하기엔 더 좋지 않습니까? 당신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하면 데이터가 공개될 테니까 가두지도 않으려고 할 겁니다.”
“그, 그렇군.”
“그럼 가 볼까요? 대여금고 엽시다!”
류하리는 시현이 성취를 구슬려 정말 성취의 손으로 대여금고를 열게 하는 걸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성취가 알코올 중독 상태라 의사 결정능력이 저하되어 있긴 하지만 저렇게 쉽게 구슬리다니?
‘그렇지만 왜 검찰이 연락했지?’
데드맨31
청원살인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