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시현은 불안해하는 성취를 데리고 은행으로 향했다.
성취는 명품 선글라스와 명품 가방,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왜 쫓기는 주제에 그렇게 튀는 모습을 합니까?”
“아니, 이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날 알아보잖아. 나 성취야. 성취. 월드스타.”
“전성기 때보다 살이 20킬로는 쪘으니까 괜찮습니다. 팬들도 못 알아 볼 거예요.. 그리고 뭐 이제 팬들이 남아 있나?”
류하리가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
“뭐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남은 게 명품밖에 없나보죠.”
“…….”
시현은 성취가 가지고 있는 패션소품이나 의상들이 명품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지만 듣고 있는 성취 입장에서는 인기나 외모, 탤런트는 다 떨어지고 명품만 남았다고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그보다 대여금고나 열어봅시다.”
“그, 그래.”
성취는 은행직원에게 부탁해 대여금고를 열었다.
대여금고 안에 들어 있는 건 딸랑 메모리스틱 한 개였다.
“다행이야. 아직 무사하군.”
“뭐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젠 어떻게 하지?”
“이 자료는 다시 대여금고에 넣어두고 디지털 복사본은 떠서 서버에 업로드하지요.”
“나는 컴퓨터 같은 거 잘 모르는데?”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시현이 자처했다.
보고 있던 류하리는 내심 실소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데이터를 당신 손에 넣는 거잖아? 그거?’
데이터의 업로드와 관리를 시현에게 맡기다니. 시현이라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빼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 시현도 그걸 노리고 한 짓이겠지만 성취는 현재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는 시현에게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해 봐.”
“네.”
시현은 능수능란한 솜씨로 OTG케이블을 통해서 대여금고 안에 있던 메모리스틱의 데이터를 읽어 들였다.
업로드하는 동안 데이터를 좀 볼 수 있었는데 검사, 판사, 정치가, 고위관료, 연예인, 그 외 명사들이 허리하학적으로 개방적인 모습들이 동영상에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면상, 근엄한 척 찍혀있는 자료사진들이 동영상 사이사이 자료로 삽입되어 있는 게 보였다.
“으웩.”
류하리가 그걸 보며 헛구역질을 했다.
“정말 알만하신 분들이로군요.”
“그렇지?”
“이 상대 여성들은 미성년자들?”
“그래. 당시 등본을 받아뒀으니까. 그들 중 미성년자를 주로 자료를 모아뒀지.”
“미성년자는 어떻게 구했습니까?”
“뭐 아이돌이나 연예인으로 키워주겠다고 하면 철없는 여학생들 모으는 건 일도 아니었지. 내가 또 세계구급 아이돌이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당신을 믿고 장래를 의탁하러 온 어린 여학생들을 배신하고 팔아 넘겼다 이거군요. 참 자랑스러우시겠어요?”
듣고 있던 류하리가 짜증을 냈다.
“그럼 어쩌라고?”
“어쩌긴요? 그간 벌어둔 거 아껴 쓰고 안전하게 자산 관리하면서 아이돌 인생 2막을 시작했어야죠. 그 정도만 해도 남들보다 엄청 풍족한 인생 아닌가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이돌 인생 2막? 그런 게 어딨어? 그냥 죽는 게 낫지!”
“뭐 지금 몸꼴을 보면 이미 아이돌로는 죽었네요. 그냥 살찐 아저씨가 된 것 같은데?”
류하리의 빈정거림 앞에 성취는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자, 그만두세요. 시현탐정사무소는 언제나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했지요? 지금도 충분히 현역으로 통할 것 같다고 말해 주세요.”
“그게 더 잔인한 것 같은데?”
류하리는 시현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때 파일의 업로드가 끝났다.
“자, 파나마 쪽 서버를 경유해서 분산저장해 두었습니다. 여기 이 계정으로 72시간마다 갱신해 주지 않으면 각 언론사와 포탈, 그리고 스트리밍 사이트에 송출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이건 된 건가?”
“네. 이걸로 설사 이 대여금고를 털려도 당신의 안전은 보장되지요. 하지만 문제는 오늘 우리가 여기 올 걸 적도 알고 있다는 거지요.”
“뭐?”
“괜찮습니다. 이 시간대는 아직 괜찮다니까요. 그럼 가실까요?”
시현과 류하리, 그리고 성취가 은행의 VVIP용 통로를 통해 나오자 그곳에는 한 여성이 다리를 꼬고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났다.
사이다패스였다.
* * *
‘검찰이 이 은행에 연락했다더니만 사이다패스가 왔어?’
류하리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사이다패스는 법치를 거부한다고 하며 성명서를 냈었다.
그런데 어째서 검찰이 연락을 한 뒤에 사이다패스가 온 걸까?
류하리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 사이다패스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녕. 아주 재밌는 짓을 했던데?”
“원래 내가 좀 창의력이 넘치지.”
“…….”
류하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행의 직원들, 그리고 은행창구 업무를 보기 위해 와 있는 손님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사이다패스는 좀 해괴한 복장을 한 여자애로 보였다.
시현이 걸어 나가려 하자 사이다패스는 시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사람이 많다고 몸을 사릴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데드맨.”
그때 은행 청원경찰이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두 분 사이에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말투는 정중하지만 경계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아, 아는 사이입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자 사이다패스가 흠칫 놀랐다.
“별거 아냐.”
시현은 사탕 한 줌을 꺼내서 사이다패스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사이다패스는 놀란 눈으로 시현과 자신의 손바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러나 시현은 별 생각 없이 사이다패스의 손에 떨군 사탕들 중 하나를 집어서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독은 없다.
그걸 보여주는 것일까?
“하하. 고마워. 데드맨.”
“뭐 얼마 하지도 않는 건데.”
시현은 그리 말하고 얼떨떨해하는 성취와 경계하는 류하리를 데리고 은행을 빠져나왔다.
* * *
번화한 상가건물의 바깥, 무수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슬슬 퇴근시간 무렵이다.
그곳에서 성취와 시현, 류하리는 인파를 방패막이로 삼아 사이다패스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사람 많은 곳에선 덮치지 않는군. 다행이야. 최소한의 상식은 있는 것 같아서.”
성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심하지 마세요. 방금 전 그 짓을 안 했다면 덮쳤을 겁니다.”
“뭐?”
성취는 시현의 말에 놀랐다.
“청원경찰이 너무 가까웠습니다. 다행히 제가 주의를 잘 끌어서 그녀의 살의를 막았지요.”
‘그건 당신 주장이지.’ 라고 말하기에는…… 류하리가 보기에도 그랬다.
시현이 무고한 이들을 끌어들여 사이다패스를 막은 것은 이번이 두 번.
당연히 사이다패스는 이 기회에 사람들을 죽여 자신이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녀의 살기가 치솟는 순간 사탕을 꺼내어 그녀의 주의를 흐트러뜨린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저 은행 안에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럼 포기한 게 아니겠군요.”
“그렇죠.”
당장은 물러났지만 그것이 곧 포기는 아니다.
사이다패스는 또 다시 찾아와 성취를 노릴 것이다.
“젠장.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야? 평생 저 여자를 피해 다녀야 하나? 당신도 날 저 여자에게서 지켜주기로 했잖아? 이대로 영원히 나랑 뭐 동거라도 할 거야?”
“그건 싫군요.”
“그렇지? 그럼 뭔가 수라도 내봐.”
“…….”
류하리는 성취가 시현을 닦달하는 걸 보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현에게 뭔가 수를 내보라니…….’
이미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현이다.
그에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다.
“저 여자의 위협에서 당신을 지키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
“첫째는 저 여자를 죽여버리는 법.”
“그래! 그거야!”
“하지만 시현탐정사무소가 아무리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해도 그런 노골적인 범법행위를 할 수는 없지요.”
‘하면서.’
류하리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윤 회장님에게 부탁해서 어떻게 할 수는 없을까?”
“윤 회장이 당신을 그렇게 아끼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 그럼 경찰에게 신고할 수는 없나? 생긴 건 알고 있잖아?”
“그녀를 경찰에 신고하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본모습이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야?”
“그녀는 변신을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게 아니면 저렇게 튀는 모양새인데 왜 지금까지 경찰에 걸리지 않았겠어요?”
“변신?”
성취는 어이없어 했지만 황당한 소리라고 일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녀가 상당히 높은 담벼락을 간단히 뛰어넘고 사람을 쳐 날리는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럼 다른 방법은?”
“두 번째는 여론 조작입니다.”
“여론조작?”
“사이다패스의 청원 사이트에서 당신이 1등이니 생기는 문제 아닙니까? 고객님이 최우선이 되지 않도록 하면 사이다패스도 다른 표적을 우선시할 겁니다.”
“그런 방법이…… 가능할까? 설령 다른 표적이 1등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놈이 죽으면 그다음엔 다시 내 차례가 되잖아?”
“이해가 빠르시군요. 예, 이건 어디까지나 미봉책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아시지요? 이 자료를 공표하는 겁니다.”
“뭐?”
“그렇게 하면 여론이 반전될 겁니다. 적어도 당신은 공익제보자가 될 테고, 물론 여전히 이 범죄에 가담한 인물이긴 하지만 이제 당신에게만 집중되던 비난의 화살이 나뉘게 될 거고 확실히 당신은 그녀의 살해 우선순위에서 내려갈 겁니다.”
“그런 짓은 죽어도 못 해.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난 죽어. 아니, 죽으면 다행이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꼴이 될 수도 있단 말야.”
“해외로 도망칠 길을 만들어드리죠.”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성취가 코웃음 쳤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해외에서 죽은 듯이 사람들 눈치 피해서 살라고? 아무도 날 못 알아보는 곳에서 그냥 숨만 붙여서 살라고? 그게 사는 거야?”
“지금도 그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듣고 있던 류하리가 빈정거렸다.
“나는 그렇게 시시하게 살고 싶지 않아. 그건 사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는 거야!”
성취는 그리 말하고 길을 가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나는 저런 평범한 사람들처럼 하루하루 죽어가고 싶진 않다고!”
“원래 인생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뭐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남들의 삶을 그따위로 말하는 건가요? 사람들의 믿음을 배신한 배신자 주제에.”
류하리가 흥분하자 시현이 그녀를 말렸다.
“자자. 그만. 둘 다 너무 흥분했습니다.”
“…….”
시현은 기분이 상해있는 성취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해하시죠?”
“?”
류하리는 시현이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성취는 시현의 행동에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데드맨31
청원살인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