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아이돌 가수는…… 한 인간의 영혼으론 도저히 감당 못 할 일이야.”
성취는 폐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말을 토해냈다.
“무슨 뜻이죠?”
“안티도 팬도 모두 다 끔찍해. 기획사도 방송국도 이 일로 얽히는 모든 놈들이 다 끔찍하다고! 그런데 더 끔찍한 건 뭔지 알아? 이제 아이돌을 그만두어서 그것들에게서 해방되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나야! 그렇게나 팬과 안티에게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 이제 저 새끼도 한물갔지~ 라는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
“그래서 나는 성공을 원했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공! 힘과 권력! 돈 말야! 더 이상 무대에 서서 거짓으로 웃지 않더라도 내 팬이나 안티 모두가 그놈은 그래도 대단했어, 라고 언급할 만큼의 성공을 하고 싶었다고.”
“흠, 충분히 동정할 만한 이야기예요. 피해자가 없었다면 말이죠.”
류하리의 어조는 싸늘했다.
“당신은 결국 자기연민만 할 뿐, 피해자는 안중에도 없군요.”
“날 보고 어쩌라고? 사이다패스에게 죽을까? 그래야 당신 속이 시원해지겠어?”
“자료를 공개해서 이 더러운 일에 가담한 권력자들에게 저항하고 당신이 만든 피해자들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끼기라도 해 보시지요?”
“싫어. 그런 짓을 할 바엔…… 일단 윤 회장님에게 부탁해 보지.”
성취는 자료 공개를 거부했다.
이제 더 이상 성공한 아이돌 가수가 되는 것도, 성공한 사업자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저 자신이 쥐고 있는 타인의 약점, 그것을 방패막이로 삼아 간신히 숨만 붙이고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죽음을 각오하고 권력자들에게 덤벼들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아, 진짜 답답하네! 그 윤 회장이 잘도……”
류하리는 정말 성취를 한대 후려갈기고 싶어졌다.
여기까지 와서도 윤 회장에게 굽신거린단 말인가?
“더 이상 당신은 그에게 가치가 없어요! 윤 회장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만 원할 뿐이지요.”
“…….”
“그래도 여전히 윤 회장에게 기대겠다는 건가요?”
“뭐가 되었건 해외로 도망치고 싶진 않아. 그렇게 되면 정말 끝이잖아.”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에서 재기할 순 없어요. 도박이나 음주운전도 죄질이 나쁘지만 이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니까요. 그만 포기하고 자기 인생을 사시죠. 그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도 생각보단 나쁘지 않다고요.”
“그렇게까지?”
그러자 성취가 류하리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뭐랄까.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눈치였다.
“아가씨.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이요? 흠. 류하리입니다만?”
“그래? 류하리인가?”
성취는 상처를 닦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를 봐서 그거 하도록 하지. 자료는 넘겨줄 테니까 날 해외로 도피시켜 줘.”
“……네?”
류하리는 갑자기 돌변한 성취의 태도에 당황했다.
게다가 자신을 봐서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 * *
숙소로 돌아오자 알코올 중독자나 다름없는 성취는 다시 병든 닭처럼 곯아 떨어졌다.
시현은 그런 성취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류하리가 시현의 곁에 섰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당신이 만약 자료를 얻으면 어떻게 할 건가요?”
“사실 자료는 이미 얻었습니다. 지금은 동의를 얻은 거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나요? 당신이 그를 구슬려서 데이터를 옮기게 한 시점에서 이미 데이터는 당신 손에 떨어졌고, 그 사실을 알려 주면 어차피 성취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잖아요?”
이미 자료가 유출된 거나 다름없는 시점에서…… 성취가 그나마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은 자신의 손으로 자료를 공개하고 속죄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시현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성취는 시현의 뜻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시현은 자료를 사실상 손에 넣고서도 성취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취하는 가?
“아시다시피 시현탐정 사무소는 항상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그 고객만족이라는 건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하잖아요?”
“자의적으로 해석하긴 하지만 그것에도 나름 도의적 가이드라인이 있는 거지요.”
“네. 도의적 말이지요. 놀랍군요. 당신에게 도의적인 면이 있었다니.”
“어쨌건 덕분에 성취가 설득되었잖습니까? 제가 협박해서 자료를 공개하는 것과 그 스스로 선택해서 자료를 공개하는 건 천지차이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왜 이 남자.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을까요?”
“자신을 너무 생각해 주는 적극적인 팬의 사랑 때문이지요.”
“네?”
“실은 당신이 계약서를 가지러 갔을 때. 그러니까 빌라에서 성취와 계약을 나눌 때 제가 성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실 성취의 매우 극심한 팬이었다고.”
“아니?”
“아시다시피 이 남자의 행동원리에는 절대적으로 허세, 남의 시선이 크게 작용합니다. 팬과 안티의 시선을 생각해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범죄자가 되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신의 시선과 행동을 의식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류하리는 그냥 화딱지가 나서 매순간 쏘아붙였지만 성취는 그걸 자신에게 열광했다가 크게 실망한 팬의 진심어린 질타쯤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그렇게 쉽게 믿던가요?”
“아시다시피 이 친구는 자의식과잉이 심하잖아요? 여성이 자신의 팬이었다고 하면 의심하기보다는 믿겠지요.”
류하리는 기가 막혀서 시현을 바라보았다.
“와아…… 진짜 개새끼시네요.”
“제 철두철미함을 칭찬하는 것으로 알아듣겠습니다.”
“…….”
* * *
인천공항의 출국 게이트 앞, 성취는 명품 선글라스로 눈을 감추고 있었다.
시현과 류하리가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인가. 너무 좁은 동네로 보내는 거 아냐? 앞으로 어지간하면 이곳에서 평생을 지내야 할 텐데. 너무 갑갑할 것 같아.”
“그나마 총기가 없는 곳이니까요. 다른 곳은 총기가 있어서 암살자를 보내기 쉽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지. 음. 한국을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제이 지처럼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 토종 한국인인데.”
그렇게 말하던 성취가 류하리를 돌아보며 윙크를 했다.
선글라스 너머라 잘 보이지 않지만…… 아니, 보이는 게 문제였다.
‘아, 이 자식이 진짜.’
류하리는 자신을 팬으로 생각하고 의식하는 성취의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떠듬거리며 말했다.
“알코올 중독 주의하고 재활에나 신경 쓰세요. 재활.”
“하하. 알겠어. 고맙군. 류하리 양. 내가 당신은 평생 기억하지.”
“아니, 뭐 제가 해드린 것도 없는데요. 기억할 필요 없어요. 빨리 잊으세요.”
아마 성취의 머릿속에서 류하리는 자신을 너무나 생각해 주는 열성팬일 것이고, 그런 류하리의 성실한 설득 덕분에 갱생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런 류하리를 평생 기억해 주겠다니, 팬 입장에서는 이 순간이 평생 기억되는 한 순간이 아닐까?
물론 류하리는 성취의 팬이 아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남자의 자의식 과잉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 서비스에 만족하셨습니까?”
시현은 성취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정산이라고 외치시면 됩니다.”
“뭐? 크게?”
“아뇨. 작게, 사실은 입 밖으로 안 내고 마음속으로 외쳐도 됩니다.”
“신기한 사람이군. 싱가포르로 대피할 이런 준비에 돈도 꽤 많이 들었을 텐데. 정말 보수가 그 정도로 괜찮겠어?”
“필요경비와 수명이면 됩니다.”
“수명이라…… 그래. 정산.”
성취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시현의 눈이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어?”
성취도 순간적으로 시현에게서 이상함을 느꼈다.
시현은 그를 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머리 위를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 시현 외에는 보이지 않는 수명의 잔여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 수치의 감소가 멈추자 시현의 눈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네. 잘 받았습니다.”
“지, 지금 그거 뭐야? 진짜야?”
“네. 그럼, 편안한 여행되시길.”
시현은 성취와 작별인사를 하고 공항을 뒤로 하고 나왔다.
* * *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고위직들과 사회 명사들의 약점을 잡았잖아요? 성취에게 받은 자료로 협박해서 돈이라도 뜯어낼 건가요?”
류하리가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시현은 공항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은 그렇게까지 궁하지 않아서 그런 짓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쉽게 돈을 주지도 않고요. 돈을 주기보다는 상대를 죽이거나 파멸시키는 쪽을 더 선호하니까요.”
“그럼 경찰과 검찰에 맡기면요?”
“그게 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다는 이야기지요. 경찰과 검찰에도 관련자들이 많을 텐데 그들에게 칼자루를 맡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시현의 말에는 경찰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어서 경찰인 류하리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었지만 그 영상을 직접 보았던 류하리로서는 부인할 수가 없었다.
“쓰지도 않을 고위직들의 약점 파일을 그렇게 힘들여서 얻었단 말이에요?”
“쓸 겁니다. 다만 제가 직접 쓰는 형태는 아닐 겁니다.”
“그나저나 성취, 그 인간은 과연 싱가포르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워낙 자의식과잉이 심한 인간에 해외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점은 걱정할 필요 없을 겁니다.”
“흐음? 왜죠?”
“…….”
하지만 시현이 대답하기 전, 누군가가 시현에게 다가왔다.
K신문의 장 기자였다.
“이쪽이 맞나? 늦지 않았지?”
“네.”
“어디지?”
그러자 시현의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현재…… 출국장의 퍼스트클래스 라운지군요. 비행기는 5시40분 겁니다.”
“고맙군. 이건 크게 달아두지. 그럼.”
장 기자는 허둥지둥 빠르게 걸어갔다.
“뭐죠?”
“K신문의 고참 기자입니다. 평소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지요.”
“설마 성취를 팔았나요? 그가 출국하는 걸?”
류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취는 집행유예 상태다.
물론 집행유예와 출국금지처분은 별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세세한 법률의 차이를 모른다.
그가 해외에 나갔다는 사실이 언론에 밝혀지면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선 경찰의 무능을 질타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싱가포르가 총기도 없고 치안이 좋다 하더라도 성취가 그곳으로 출국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결국 언젠가 암살당할 수도 있지 않은가?
“뭐 어떤 의미에서는 팔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시현은 애매하게 말했다.
류하리가 그 의미를 알아챈 것은 그날 저녁, 뉴스를 보고 나서였다.
* * *
성취는 VIP라운지에 들어와 있었다.
항공권은 VIP용이 아니지만 성취 소유의 카드에는 VIP라운지 사용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탐정. 정말 이상한 놈이었지. 대체 정체가 뭐지?”
성취는 VIP라운지에서 음식을 접시에 담다가 문득 멈춰 섰다.
주류가 눈에 들어왔다.
데드맨31
청원살인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