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오셨군요.”
시현은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류하리를 맞이했다.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이 남자를 보며 류하리는 물어보았다.
“성취의 파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요?”
“네. 대충은. 제가 성취의 죽음을 알려 준 기자가 제게 알려 주었지요. 수사 측에서는 딥페이크 영상이라고 주장한다지요? 때마침 가짜 영상들이 쏟아져서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다고.”
시현이 그렇게 말하고 손에 트럼프 카드 한 벌을 들었다.
-파라라라락!
시현의 손에서 카드가 날려 사무실 곳곳에 뿌려졌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영상이 가져올 충격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가짜 영상들을 만들어서 뿌려두었나 보군요. 흠, 역시 저쪽도 수완이 좋아요. 아주 좋아.”
“어렵게 성취의 파일을 손에 넣었는데 이렇게 되면…….”
“저는 괜찮습니다.”
“네?”
“성취가 동영상 좀 찍었다고 해서 저 높으신 분들을 단번에 끌어내릴 수는 없지요. 다만 이 정도만 되어도 그들의 명성에 금이 가고 신뢰를 잃게 하겠지요. 이 정도로 일단 만족합니다.”
“아니, 저 놈들이 법과 정의를 자기들 마음대로 휘두르는 꼴을 보면서 그 정도로 만족하라고요?!”
“후후후. 경찰분이 하실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
흥분했던 류하리가 입을 다물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다만 때가 아닐 뿐입니다.”
“때가 아니라고요?”
“네. 수습하기 위해서 저쪽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이럴 때 괜히 건드려봐야 상대에게 구멍이 어디 나 있다고 알려 주는 꼴입니다. 구멍이 나 있는 배가 도크에 있는 상황인데 이때 공격해 봐야 가라앉지도 않고 바로 수습할 수 있을 겁니다. 배가 대양에 간 다음에 다시 공격하도록 하지요.”
“무슨 소리예요?”
“성취 사건을 덮기 위해 저쪽이 애쓰고 있을 때 괜히 나서봤자 덮인다는 겁니다. 이쪽은 원본파일이 있으니까 한동안은 기다려 주죠.”
“아.”
“이런 일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설마 단번에 뭘 폭로해서 기존의 권력자를 다 끌어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야…….”
류하리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점을 지적하는 당신이 너무 얄미운데?’
그래서 류하리는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네.”
“이 카드 뿌린 거 당신이 다시 줍나요?”
“…….”
“뭐 하러 날린 거예요? 기분 내느라?”
“연습하는 겁니다. 연습.”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주섬주섬 카드를 줍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저, 실례합니다.”
초로의 남성 한 명이 노크하며 들어왔다.
“혹시 여기가 탐정사무소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시현은 바닥의 카드들을 줍다 말고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 * *
“제가 탐정 시현입니다. 저희 탐정사무소는 언제나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상담내용은 철저히 비밀을 지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저는 김지헌이라고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딸아이가 스토커에 시달리고 있는데. 아니, 있었는데, 라고 해야겠지요.”
“ 있었다?”
“딸아이가 스토커에게 그만…… 그런데 저는 외항선원입니다. 부끄럽게도 딸이 그런 일을 겪었을 때 멀리서 억류당하고 있어서 딸 초상 치를 때도 못 온 쓰레기 같은 아비지요.”
“…….”
김지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 주름주름마다 깊은 고통의 흔적이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따님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싶다. 그런 뜻인가요?”
시현이 그렇게 물어보자 류하리가 흠칫 놀랐다.
“자, 잠깐만요. 그건…….”
사적 제재.
그것은 경찰인 류하리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다.
하지만 시현은 흥미 깊은 표정이었다.
“일단 조사비용은 주당 500만원에 추가 경비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만약 그 이상을 원하신다면…….”
“돈은 있소.”
“돈보다 더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렇게 들었소.”
“들었다고요?”
“실은 고찬하라는 사람의 추천을 받고 왔소.”
“아…… 그분이요.”
고찬하라면 시민극단의 연극배우를 하며 당구장을 운영하는 이로 시현의 협력자 중 하나. ‘상무님’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좋아요. 일단 의뢰를 받겠습니다. 조사에 착수한 후, 매일매일 일간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거 고맙군요. 연락처는 여기로 부탁드립니다.”
시현은 흔쾌히 의뢰를 받았다.
* * *
“어쩌려고 그러세요?”
류하리는 김지헌이 떠나자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뭐를요?”
“저 분이 말하는 사건은 최근에 있던 여교사 스토킹 살인 사건이에요.”
“네. 압니다. 작년 11월 사건이지요?”
시현은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사건 개요를 읽었다.
“‘전직 여교사, 과거 제자에게 살해당하다.’ 전직 중학교 여교사 김모씨, 자택(경기도 X시 XX동) 인근에서 옛 제자에게 피살당했다. 5년 전 모 중학교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두 사람, 이후 최모씨는 꾸준히 김모씨에게 구애해 오며 스토킹을 일삼다 결국 자택 앞에서 매복 후, 숨겨둔 흉기로 살해해…… 최모씨는 평소에 칼로 사람을 베어 죽이는 게임을 즐겨 했었다. 하하. 기자들이 헛소리 하는 건 꼭 빠지지 않는군요.”
“네.”
류하리도 입맛이 썼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그 원통한 마음을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사건에서 유가족이 원한을 품는다면…….”
이미 가해자는 체포되었고 실형이 확정되어 교도소에 있다.
설마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을 살해해 달라고 온 건 아닐 테니 그렇다면 피해자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할 때, 그 대상은 초동 수사에 미온적이어서 살인 사건으로까지 상황이 번지게 내버려둔 사람, 바로 경찰이 될 가능성이 컸다.
류하리는 거기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뭐, 너무 넘겨짚지 마시지요. 경찰을 해친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따지고 보면 당신이 경찰에게 사적 제재를 가했기 때문에 저와 당신이 만난 것 아니겠어요? 강남경찰서장 사건 말이죠.”
“사적 제재라뇨. 어디까지나 그쪽이 부정부패한 걸 알린 것뿐인걸요. 오히려 그 때문에 지금 경찰들이 절 사적인 감정으로 감시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
류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시현을 감시하는 것 자체가 경찰의 치부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염려하지 마시길, 시현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고객만족이라는 게 당장 눈앞의 쾌감이어선 안 되겠지요. 고객의 남은 인생까지 생각해야 진정한 고객만족이 아니겠습니까?”
시현이 그렇게 말을 어물쩍하게 돌렸다.
경찰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소리는 안 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이쪽도 경찰에 손대고 싶진 않다는 의향은 느껴진다.
‘끄응. 이거 지은 죄가 있으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피해자 유가족 마음도 이해되고, 이 남자가 이 정도만 해도 그 경찰이 어지간히 나쁜 놈 아니면 봐주겠다는 뜻이니까.’
류하리도 이제 시현의 말의 경중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시현은 절대로 경찰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건 가급적 손대지 않겠다는 소리이며 만약 그가 손댈 정도라면 어차피 부패하여 써먹을 데 없는 인간쓰레기일 것이다.
‘아아, 경찰로서 이래도 되는 걸까? 점점 더 주류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류하리는 자신이 경찰 사회의 주류에서 멀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시현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알겠어요. 그래도 이 일 혼자 진행하지 마세요. 알겠죠? 저도 꼭 함께 할 테니까.”
“감시해야겠다, 그 말입니까?”
“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무슨 짓을 할지…….”
류하리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갑자기 전화가 왔다.
“아, 잠깐만요.”
류하리는 전화를 받아보았다.
박진감 팀장이었다.
[류 경위님! 사이버 수사과에서 지원요청이 왔는데…….]
“네? 아, 네. 해야죠, 일!”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현장에 나가야 할 거야. 장소는 문자로 남겨줄게.]
“네, 알겠습니다.”
류하리는 전화를 끊고 시현을 돌아보았다.
“정보3과도 바쁘군요.”
“아, 하여튼 이거 끝나는 대로 올 테니까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원 참. 경찰을 혹으로 달고 다니니까 번거롭군.”
시현은 류하리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 *
김지헌은 멍하니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렸다 개어서 맑은 공기, 길 곳곳에는 아직 약간의 습기가 남아 있지만 청명하고 맑은 공기다.
“여기 계셨군요.”
“아. 오셨습니까? 조수 분은?”
“그녀가 없어야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기 마련이지요. 알잖습니까? 월급쟁이의 입은 무작정 신뢰할 만큼 무겁지 않다는 것.”
시현은 그렇게 말했다.
듣는 김지헌 입장에서는 조수는 그냥 월급쟁이라서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할 경우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시현도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류하리가 월급쟁이인 건 사실이니까.
경찰에게 월급을 받아서 그렇지.
“일간 보고는 문자나 메일 같은 걸로 보낼 거라 생각했소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요.”
“뭘 말이오?”
“어디까지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어디까지?”
“이 사건에 관여된 사람들 중 따님의 원통함에 일조한 이들로 규정할 사람들이 적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그런 일에도 경중을 두고 다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선에서 흑백을 가릴 것인가. 그걸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
김지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쇼. 탐정 나리.”
“네?”
“나는 별로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소. 뱃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랬소. 누구나 인생에서 거쳐 가면서 자식을 낳으니까 낳았을 뿐이고 딸자식이라고 있지만 어떻게 자랐는지, 뭘 생각했는지, 어떻게 컸는지 잘 모르겠소. 그냥 이혼하고 나서 그때그때 가끔씩 생일 선물 챙겨주고, 학비 챙겨주고, 양육비 주면서 내가 딸이 있구나. 그 정도로만 알고 살았단 말이오. 뭐, 상선 선장이니까 돈은 적잖게 벌어서 별로 부담이 안 되었던 것도 있었고…….”
그는 그리 말하면서 떨리는 손을 들었다.
“하지만 자식이 부당하게 살해당하고 나서야 불현듯 기억에서 떠오르는 건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억과 감촉이오. 아직 젖먹이인 아기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잡았을 때의 감촉이…… 신기하게도 수십 년 전의 일인데! 정작 그 당시에는 그냥 지나쳤던 기억인데 지금은 선명하게 떠오르오. 지금도 보시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아. 매 순간, 지금도 손에 와 닿는 어린 아기의 손길이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소! 웃기지 않소? 내가 아니라 남이 보면 우스울 거요. 딸이라고 뭐 얼마나 서로 부대끼며 살았다고 이제 와서 딸의 부당한 죽음에 분노하니 마니, 내게 그런 자격이 있소? 그런데…… 그런데 이 촉감이 미칠 것 같단 말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고용한 거요. 알겠소? 날 보고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왔냐고 해도 나는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는 거요!”
“알겠습니다. 충분히 알겠습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따라오시지요.”
데드맨31
슬기로운 탐정생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