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60화 (60/269)

제60화

“전화기를 가져가지 않았다니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궁금해하고 그래? 너희 집도 내 집처럼 들락날락거리는 걸.]

“…….”

[그래서 어쩌지? 선언서를 던져놓고 나오긴 했는데 이번은 그냥 망했다고 치고 바로 다음 사건을 일으켜서 만회할까? 노약자라고 언론이 과연 내게 그렇게 실망할까?]

“노부부 참살, 이 단어를 음미해 보시지요. 헤드라인으로 쓰였을 때 감흥이 어떨지? 증거도 없이 죽이면 곤란하다고 제가 수사 가이드도 주지 않았습니까?”

[잘 안 되더라고. 내가 성격이 꼼꼼하지 못해서.]

“하아.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보지요. 당신은 당분간 근신 좀 하세요.”

최형림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끄응.”

최형림은 미간을 엄지손가락의 중관절로 누르면서 두통을 참고 있었다.

시현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올 때 맡겼던 개인 짐을 되찾고 그 안에서 사탕을 꺼내 최형림에게 건네주었다.

“두통이 있으면 탄수화물을 좀 드시죠?”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시현은 사탕을 입 안에 넣고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사건 개요를 설명해 주세요.”

“살해현장은 박주성 부장님 부모님의 자택, 살인 도구는 뭉툭한 둔기입니다. 피해자는 부장님의 부모님을 포함해 마을 번영회 간부들, 도합 여섯 명입니다.”

“마을 번영회라? 철도가 지나면서 토지보상을 받으면 마을 전체가 사라질 텐데? 마을을 없애려 하면서 번영회라고 이름 짓다니. 역설적인 작명법이군요.”

“뭐, 토지 주인들은 번영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살해당해버렸으니 번영을 누리진 못하겠군요.”

“그래서? 살해현장 사진을 볼 수 있을까요?”

“네.”

최형림은 시현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음…… 응접실에서 다 죽어 있군요.”

“사이다패스는 단번에 여섯 명을 한 자리에서 죽였어요. 총화기가 아니라 둔기로 한 자리에서 여섯 명을 살해한다는 건 단독범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공범이 있다는 소리겠지요.”

“절 그 공범으로 보고 구속수사영장을 발부했다, 그 뜻이군요.”

“예.”

“하지만 저는 살인이 발생했을 시간에 읍내 여관에 체크인 하고 부동산 등기를 떼어 보고 있었지요. 하하하. 넓은 의미의 공범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살해현장의 공범일 수는 없지요.”

즉, 구속수사 영장이 발급되었던 혐의는 아주 초반에 박살났다. 물론 다른 방향에서는 공범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구속을 풀어주고 수사해야 옳다.

원칙적으로는…….

그러나 이 구속수사영장은 일단 법원이 발급하면 그다음에 효력이 정지되는 건 순전히 수사기관의 마음에 달려있다.

적어도 영장최대기한인 열흘까지는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경찰은 기왕 영장 나온 거, 그것과 상관없이 당신을 잡아 두려고 했지요.”

“그럼, 어떻게 절 풀어주실 겁니까? 설마 경찰들에게 절 바로 넘겨 달라고 요구하진 않으실 거지요?”

“변호사를 쓰시지요. 제가 직접 풀어주면 책임이 저에게 오니까.”

최형림으로서도 노골적으로 시현을 풀어주면 상부의 질타를 받게 된다.

“아, 변호사 수임료도 경비로 들어갑니다. 즉, 최 검사님 비용이라는 거지요.”

“…….”

“평검사 급료로 지불하자면 좀 아프겠지만 한영건설그룹 회장님의 자제분이시니까 괜찮겠지요?”

“혹시 수명으로 지불하면 경비는 빼줍니까?”

“에이, 농담하시는군요. 한영건설그룹이면 종합건설업으로 한국에서 5위 안이고 엔지니어링, 인프라 사업, 그리고 무역사업에도 문어발, 아니, 손을 뻗친 대기업 아닙니까? 그런 분은 수명보다 돈이 싸지 않겠습니까? 이 기회에 저도 돈을 펑펑 쓰면서 조사를 진행하고 싶군요. 그럼 빨리 끝낼 수 있으니까.”

시현은 그리 말하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도, 돈을 펑펑 쓴다고요?”

최형림은 시현의 호기로운 발언에 당황했다.

* * *

“으…… 위장약을 먹어야겠구만.”

장변TV라는 채널을 운영하기도 하는 장 변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현의 전화를 받은 그는 어떻게든 시현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맞히는 시현에게 거슬렀다가는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 급하게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려 1시간 50분 만에 경찰서에 도착했다.

“이거 수임 안 하고 싶은데.”

“안 하시게요?”

시현이 미소를 지으며 장 변호사를 돌아보았다.

그 미소가 너무 해맑아서 무섭다.

“아니, 아니네. 그런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민사전문이라. 이거 간만인걸.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 이 목록의 서류를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최형림 검사가 장 변호사에게 필요한 서류 목록을 넘겨주었다.

“검사님도 어째 풀어주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군요? 왜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수임료를 좀 할인해 주시죠. 일은 거의 제가 다 하는 것 같은데.”

“두, 두 분이 굉장히 친하신가 보군요? 수임료를 깎아 달라는 소리를 검사님이 하실 줄이야.”

“뭐, 어쩌다 보니.”

최형림은 별로 내키지 않아 했고…….

“친한 사이죠. 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최형림과 무려 어깨동무를 했다.

“…….”

최형림의 표정이 좋지 않다.

급체라도 올라온 사람 같다.

‘와, 둘이 진짜 친한가 보군. 이렇게 서로서로 장난도 치는 걸 보면. 이 미치광이 탐정 놈이 검사랑도 이렇게 친하단 말야? 이 친구 젊을 때 첫 근무를 서부지검 수사부에서 하는 걸 보면 엄청 잘나가는 검사일 것 같은데. 앞으로도 조심해야겠군.’

장변은 그 내막도 모르고 멋대로 시현의 위험도를 더더욱 상향조정했다.

“자, 됐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시현탐정사무소는 언제나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시현은 최형림에게 경례를 붙여 보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그럼 이젠 어쩌실 겁니까?”

장변은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제 일에 따라다니시게요?”

“아, 아뇨. 이제 필요 없으시면 저 돌아가고 싶어서요.”

장 변호사 입장에서는 시현은 가급적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바로 찾아내는 이상한 남자.

그리고 나중에 들어본 바로는 다른 흥신소나 탐정들, 심지어는 조직폭력배들조차 그를 알고 있으면 접촉을 꺼려한다더라.

시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시현을 두려워하고 꺼려하는데…… 그런 이가 자신을 전담 변호사인양 불러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수임을 거절할 수도 없고. 왜 서부지검 검사가 협력적인 거야?’

장변 입장에서 보면 최형림 검사가 시현의 석방을 위해 힘을 쓰는 것만 보았으니 더더욱 시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사까지 자기편으로 삼고 좌지우지하는 걸로 보이니 말이다.

시현에게 밉보이면 저 검사까지 자신을 잡아먹으려 들 게 아닌가?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시현은 절대로 자세한 사항을 말해 주진 않았다.

“수임비는 계산서 발행해 주세요. 출장비랑 필요 경비 다 넣으셔서 넉넉하게 써 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의뢰인에게 청구할 테니까요.”

“아, 네. 그, 그래도 변호사회 수임기준에 맞춰서 청구하겠습니다. 어차피 저는 수임보다는 스트리밍으로 버니까. 수임을 받으면 오히려 번거롭기만 하고 손해지요, 손해. 경제적으로 하등 이득이 없습니다.”

장변이 그렇게 말하는 거는 ‘그러니까 제발 나에게 위임하지 마라.’라는 뜻이었지만 시현은 대놓고 씹었다.

“네. 다른 임무를 받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신 변호사셔서 그만.”

‘네가 수임 안 받고 스트리밍에만 정신 팔린 놈이니까 널 쓴다.’ 시현은 오히려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었다.

“…….”

“그럼 증거 시료를 채취하러 가 볼까요?”

“저도 따라가야 하는 건가요?”

“안 오셔도 됩니다.”

“그, 그럼.”

장변은 뒷걸음질 치며 시현에게서 멀리 도망쳤다.

마치 토끼 굴 속으로 도망치는 토끼처럼…….

* *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최형림은 시현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증거를 채취해야지요.]

“증거 말입니까?”

[차를 조사했을 때, 범퍼에 균일한 간격의 상처가 있더군요. 트랙터 로더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차는 이미 보험사에 인도되었을 텐데요?”

[이들이 차량 범퍼를 때워서 재생했거든요. 농기구 사무실을 보니까 부분도색과 수리를 하는 장비들이 있더군요. 농기구나 차량들을 덴트 시공할 수 있는 장비가 있는 걸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증거는 이미 인멸된 게…….”

[로더에 남아 있을 겁니다.]

“로더에? 트랙터에 다는 보습 말이지요? 그거로 땅 한 번 파기만 해도 증거가 인멸되었을 텐데 남아 있을까요?”

차량과 트랙터가 격돌하면 차량의 페인트가 트랙터 로더에 묻어서 남게 된다.

이건 물로 씻는다고 해서 바로 떨어지지 않는다. 현미경으로 미세하게 조사하면 충돌시의 열과 압력에 의해 변형된 페인트 조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트렉터 로더로 땅을 파버릴 경우다.

땅을 파면 보습이 땅의 광물들, 돌과 미네랄들에 격돌하며 페인트 조각들이 떨어져 나갈 게 분명하다.

[아니면 농기구 대리점의 정비창에라도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샅샅이 찾아야 해요.]

“그렇지만 당신은 경찰도 아닌데, 어떻게 대리점을 조사할 겁니까?”

[간단하지요. 농기구 대리점을 사버리는 겁니다.]

“……네?”

최형림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농기구 대리점을 산다고요?”

[네. 농기구 대리점주는 이번 살인 사건에서 사이다패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 자식들은, 갑작스러운 부모의 죽음으로 이 가게를 상속받게 되겠지만 농기구 대리점이라는 게 장래성 있는 사업이 아니니까요. 상속세도 내야 할 테고 현금이 많이 필요하겠지요.]

“……잠깐만요. 농기구를 사는 게 아니라 대리점을 산다고요?”

[네. 땅에도 페인트 조각이 떨어져있을 수 있으니까 종합적으로 조사를 하려면 이것 전부를 사야 합니다.]

“돈이 많이 들 텐데요?”

[한영그룹 자제님이 뒤에 있으니 뭐 걱정이겠습니까?]

“…….”

그러니까 시현은 최형림을 믿고 저 엄청난 거금을 써서 조사하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최형림은 연쇄살인범과 대면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강심장이다. 그렇지만 지금, 최형림은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억…….”

입을 벌리자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많은 돈은 드릴 수 없는데요.”

[아, 안심하세요. 사업체 인수비용 전부를 청구하는 게 아니니까. 어차피 이 사업체는 제가 운영할 게 아니라 증거를 빼내고 나면 다시 팔아 치울 거예요. 다만 그 경우 거래가에서 손해를 보는 것과, 세금 정도는 경비 처리 부탁드립니다.]

사업체를 인수했다가 되팔 경우의 세금과 감가상각은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그걸 최형림에게 청구한다고?

최형림이 한영건설그룹의 자제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가족에게 손 벌리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아니, 설령 진짜 흠결 없는 재벌가 자제라 해도 이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돈을 쓸 수는 없다.

데드맨31

선경마을 살인사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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