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전 당신을 재밌게 해 주자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음?”
“전 저의 목적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 거고 그 결과 당신이 재미를 느끼건 말건 그건 알 바가 아닙니다. 뭐, 협력해 주시는 건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당신을 재밌게 해 주려고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오히려 당신에겐 별로 즐겁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제게 당신 눈치나 보는 광대가 되길 원하는 겁니까?”
최형림은 미카엘에게 선을 그었다.
미카엘이 최형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무기질적인, 인간답지 않은 미소였다.
“흐음.”
싸늘한 시선이 최형림의 피부를 꿰뚫는다.
마치 건강검진 받으러 환자복을 입고 엑스레이나 CT촬영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다. 속속들이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저 비인간적인 시선을 느끼면서도 최형림은 오히려 태연히 미카엘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역시…… 당신도 참 인재긴 인재란 말야.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으니 말야.”
미카엘은 씨익 웃어 보이고 경호원에게 손짓했다.
경호원이 짐을 꺼냈다.
“우선 전당포에 맡겼던 거 찾아왔어. 그리고 찾아오는 김에 중고긴 하지만 보증서 있는 것들로 몇 개 더 골라왔지.”
작은 상자를 열자 안에는 최형림이 원래 차고 있던 롤렉스 데이저스트 외에도 IWC 빅 파일럿과 태그호이어 까레라 칼리버 16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전당포에 잡혀있던 다른 명품시계들 중 사올 수 있는 것, 보증서와 케이스가 붙어 있는 걸 골라서 사온 모양이다.
“최 검사님 품위유지에 쓰라고 간 김에 골라왔지. 구성 괜찮지?”
미카엘이 해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현금. 두 장 정도 넣어뒀는데 이 정도면 데드맨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겠지?”
미카엘은 종이상자 하나를 더 꺼내어 건네주었다.
“네. 신경써주셔서 거듭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 뭐, 필요하면 종종 부르라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부르란 말야. 너무 도움을 안 청해서 오히려 좀 야속한걸. 나랑 돌아서려고 준비하고 있는 건가 의심하게 된다고. 하하하.”
“…….”
미카엘은 최형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와 손잡고 이런 저런 일들을 벌이는 게 그의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었다.
고가의 시계와 현금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걸 보니 말이다.
하지만 최형림 입장에서는 이런 고액의 지원이 목에 걸린 가시 같다.
미카엘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존재다.
지금이야 최형림이 마음에 든다고 이래저래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실망해서 확 돌아설지 모른다.
“자, 그럼 어쩔까? 간만에 봤는데 차라도 마실까? 아니면 내가 불편해? 이대로 가 주는 게 좋을까?”
“음…….”
최형림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돌리다 문득 커피숍 입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커피숍 입구에 한 남자가 걸어들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데드맨, 시현이었다.
시현은 마치 최형림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와 최형림과 미카엘의 테이블 앞에 섰다.
“실례지만 합석해도 될까요?”
“미행한 겁니까?”
“아니. 데드맨은 미행 따위 할 필요 없어. 이 녀석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은 제 영업 기밀이 되니 그쯤 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 계약자의 능력을 제게 말해 줄 것도 아니면서 너무 공정하지 못한 개입을 하는 것 같은데요?”
“아, 미안하군. 사과하지.”
“그렇다면 사과를 받아들이는 뜻에서 차나 한잔 얻어먹도록 하지요. 괜찮겠죠?”
시현은 그리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흠…… 아인슈페너를 마셔 볼까요.”
최형림은 넉살도 좋은 시현을 보며 당황했다.
‘미카엘에게 차를 얻어먹겠다고? 진심인가? 이 남자?’
최형림으로서는 하필이면 미카엘과 만날 때 시현을 만나게 된 것이라 껄끄럽기가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시현은 메뉴판을 보면서 최형림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약자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는 걸 보니 최 검사님도 미카엘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요.”
“……!!”
최형림은 자신을 추궁하는 시현의 날카로운 어조에 당황했다.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 * *
싸늘하게 얼어붙는 공기를 깬 것은 미카엘의 능청이었다.
“아니. 그냥 클럽에서 만나서 알게 된 사이야. 같이 노는 사이일 뿐이라고. 최 검사님이 이래보여도 얼마나 화끈하게 노시는지 알아?”
미카엘이 능청을 떨었지만 시현은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미카엘의 말을 무시했다.
“이거 참 놀랍군요. 어떻게 절 의심했습니까?”
“별로 의심하진 않았습니다. 의심이라는 건 흔들림이 있을 때 의심이라고 하는 거지요. 이 경우는 확신이라고 해야겠지요.”
“놀랍군요. 탐정의 감이라는 겁니까?”
최형림은 진심으로 시현에게 감탄했다.
확신이 있었다 그 말인가?
‘역시 내가 그에게 접근해서 박주성 부장의 부모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나. 하지만 어디까지 의심하고 있는 거지? 날 단순히 미카엘의 관련자로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사이다패스를 조종해서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장본인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시현의 태도만으로는 과연 최형림을 어느 정도까지 의심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페이지를 넘기며 메뉴 사진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받아갈 건 지금 받아가도 되겠습니까? 잔금을 충분히 치르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
최형림은 미카엘에게 받은 종이상자를 열어서 안에 있는 돈다발들을 시현에게 건네주었다.
“시현탐정사무소를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희 시현탐정사무소는 언제나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차후에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며 돈다발을 자신의 코트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래서 데드맨. 여긴 무슨 일이지? 미행하러 온 것 같지는 않고. 왜 당당하게 우리 앞에 얼굴을 드러냈나? 아마 그것도 노림수가 있어서 하는 거겠지?”
미카엘은 시현이 그냥 모습을 드러냈을 리 없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군. 이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와 미카엘을 흔들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고서라면 그냥 멀리서 우릴 보고 지나쳤겠지. 굳이 와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최형림도 미카엘의 말을 듣고서야 눈치챘다.
아무래도 켕기는 게 너무 많다보니 최형림처럼 똑똑하고 대담한 이 조차 생각이 짧아졌다.
‘하지만 두려운 건 우리를 흔들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 와서 얼굴을 드러내는 이 남자의 대담함이다. 무섭군. 과연…… 데드맨.’
최형림은 시현의 끝없는 심계를 두려워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 * *
‘어우, 깜짝이야.’
정작 시현은 지금 상황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최형림에게 태그를 박아 넣은 건 사실이다.
최형림은 서부지검 수사1부 검사, 시현의 거주지에서 가깝고 선경마을 살인사건에서도 얽혔으니까.
태그를 박아두고 관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최형림이 자신의 상관인 ‘박주성 부장검사’를 제치기 위해 선경마을 살인사건을 정확히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시현은 사실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시현에게 오는 의뢰들 중 상당수는 ‘직장상사를 조져버리고 싶어요.’라는 동기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직장에서의 트러블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마침 근처에 있기에 들어왔는데 설마 미카엘을 만나고 있을 줄이야.
‘뭔가가 있군. 보아하니까 돈도 미카엘에게 받아서 쓰고 있잖아? 한영건설그룹 자제가 왜 돈을 미카엘에게 받아서 쓰는 거지?’
미카엘의 돈은 결국 윤 회장의 돈, 윤 회장이 겉으로는 멀쩡한 기업인이지만 세간에서는 소위 말하는 ‘반달’이다.
합법과 불법, 양방향에서 돈을 버는 자의 돈을 현직 검사가 받아쓰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검사 급료 이상으로 돈이 필요하다면 부모에게 받아쓰는 쪽이 훨씬 깔끔하다.
‘그렇다는 건 부모에게 못 받아먹을 이유가 있다는 거로군. 왜지? 재벌가 자식 중에 자력으로 검사가 될 정도의 인재는 흔치 않을 텐데?’
해외명문기업의 MBA야 기부 입학으로 들어간다는 게 가능할지 몰라도 검사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능력이 전부다.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군. 다행히 지금은 나보다 상대가 더 놀란 상태야.’
그래서 시현은 일부러 태연을 가장하고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과연 그래서일까?
시현이 태연을 가장하고 가만히 있으니 저쪽에서는 또 멋대로 넘겨짚고 있는 것 같았다.
시현이 주문한 커피가 나와서 시현은 그걸 마시면서 최형림과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두 분은 어떤 일로 여기에?”
“잠시 후 여기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최형림이 그렇게 말하자 미카엘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그냥 마침 겸사겸사 뭐 좀 전해 주려고 했을 뿐이야. 특별한 일은 없어. 당신은 어떻지? 데드맨?”
“저야 뭐, 언제나 고객만족을 위해 뛰어다닐 뿐이지요.”
시현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흐음. 그럼 나는 자리를 비켜주지.”
미카엘이 손목시계를 살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나중에 보자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
“네. 안녕히 가시길.”
시현은 미카엘에게 손을 흔들고 테이블에 있던 계산서를 자연히 미카엘에게 건네주었다.
“계산 부탁드립니다.”
“…….”
미카엘은 말없이 계산서를 받아들고 자신의 경호원에게 넘겨주었다.
* * *
미카엘이 차 값을 계산하고 자리를 떠나니 이제 최형림과 시현만이 커피숍에 남았다.
서로서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 인간이 대체 어디까지 날 의심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떠볼 수 있을까? 잘못 말하면 오히려 내 패만 드러내게 될 텐데?’
최형림은 시현이 자신을 어디까지 의심할지 궁금해했다.
시현도 시현대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 애매하다. 음?’
그때 시현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그럼 전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최 검사님. 나중에 또 가까운 시일 내에 뵙도록 하지요.”
“네. 살펴 가시지요.”
최형림은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는 시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사이다패스와 날 연관 짓지는 않는 모양이군. 그래. 미카엘과 연관 있는 정도로 생각하는 게 정상이겠지? 그 정도면 아직 괜찮아. 하지만 주의해야겠군. 저 탐정, 감이 너무 좋은데? 게다가 미카엘이 말한 대로…… 내 위치를 파악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어.’
최형림은 다음부터 더더욱 시현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기로 결심하고 손목시계를 살펴보았다.
그때 커피숍의 입구에 또 새로운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