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71화 (71/269)

제71화

오월동주의 동상이몽 #3

“아, 저기 있다. 이야. 오래 기다렸지?”

머리를 짧게 묶은 청년이 가뿐히 몸을 날려 최형림의 맞은편에 앉았다.

“잘 지냈어? 형님?”

“…….”

최형림은 그의 뒤에 따라 들어오는 경호원들, 그리고 그 경호원들의 한 발짝 뒤에서 걸어오는 시현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시현 씨…….”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뵙겠다고 했었지요? 그렇게 되었군요.”

시현은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말했다.

짧게 묶은 머리의 청년이 시현과 최형림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어? 둘이 아는 사이야?”

“최형림 검사께선 제 소중한 고객이시지요. 아니, 고객이셨다고 해야 할까요?”

시현이 그렇게 물어보자 최형림은 떨떠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거 놀라운데. 검사인 형님이 왜 탐정이랑 알고 있을까?”

“…….”

“뭐, 내가 물어볼 일은 아니지? 그것보다 형님. 새 명함을 팠어.”

짧게 묶은 머리의 남자는 그리 말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하이페리온 디자인 하우스, 최형준.’

명함에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디자인 하우스? 너도?”

최형림은 그렇게 반문했다.

“그래. 설아 누님하고 일이 겹친단 말이지.”

그때 최형림이 시현을 돌아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알 것 같습니까?”

“네? 제게 물어보시는 건가요?”

시현은 최형림이 갑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런데 짧게 묶은 머리의 청년, 최형준도 시현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요.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러시다면야.”

시현은 고객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녔다.

그게 거짓은 아닌지 최형준의 요구에 따라 입을 열었다.

“현재 한영건설그룹의 인테리어와 특수 디자인 작업, 각종 부자재 등을 제공하는 디자인 회사는 아람 하우징, 한영건설그룹 오너의 장녀인 최설아 씨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지요. 그리고 아람 하우징의 매출 대부분은 한영건설그룹과 연관된 사업에서 나옵니다. 소위 일감 밀어주기지요. 아,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는지…….”

시현은 최형준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의식하며 헛기침을 했다.

“놀랍네. 역시 대단한걸.”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의뢰가 들어오고 계약이 성사되면 시현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전 조사를 좀 했을 뿐이지요.”

시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재벌가 자식들이 사업한다 하면 밀어주기 아닌 게 어딨냐? 모르는 놈이 바보지.’

최형림이 굳이 시현에게 물어본 것도, 최형준이 굳이 시현에게 놀라는 척하는 것도 재벌자식들 앞에서 대놓고 일감 밀어주기를 비판하는 그 담력에 놀라는 것이리라.

“……말한 대로.”

최형림의 동생, 최형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설아 누님이 밀어주기로 큰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지. 그런데 내가 봤는데 밀어주기로 컸다지만 정말 일을 너무너무 못하더라고. 아무리 아버지 후광으로 받아먹는 일이라 해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못하면 그룹 전체의 브랜드를 훼손시킬 뿐이야.”

“그래서 누님과 싸우려고?”

“아버지가 천년만년 사실 수는 없잖아? 언젠가는 그룹의 경영권을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할 날이 올 텐데, 지금까지는 설아 누님이 혼자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면서 실적을 내고 있었단 말이지. 내가 유학 가있는 동안 말야.”

최형준은 그리 말하며 최형림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누님과 정면충돌을 할 셈이냐?”

“사실 굳이 누님이랑 충돌하지 않고 다른 영역에서 사업하면서 내 수완을 보이고 어필하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그거 너무 오래 걸리겠더라고. 게다가 첩보가 좀 들어왔는데…….”

“첩보?”

“누님이 이거 참 약점이 많더라고.”

“그걸 위해서 내 협력이 필요하다는 건가?”

“형님도 법적으로는 상속권자잖아? 게다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검사고. 형님이 날 도와주면 천군만마지.”

그러니까 결국 경영권 다툼을 위해서 누나를 제치고 싶은데 협력해 달라.

그것이 바로 최형준이 최형림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상하군.’

시현은 그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아함을 느꼈다.

‘하는 이야기를 보니 최형림은 아예 경영권을 물려줄 대상이 아닌 것 같군. 왜지?’

만약 자식들의 능력을 보고 그중 뛰어난 놈에게 경영권을 승계해 준다 하면 두말할 것도 없다.

검사인 최형림이야말로 군계일학, 인재 중의 인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형림은 아예 그룹 승계다툼에서 빠져있는 존재 같다.

‘……그러고 보니 최형림의 모친은 SH회장 딸이잖아? 혈통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거의 무슨 황제의 혈통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뭐 모친이 일찍 자살하기는 했지? 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최형림은 겉보기로는 잘생기고 재벌집 아들에 검사다.

그야말로 엄마친구 아들, 이상적인 엘리트, 축복받은 태생을 타고난 자로 보인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그 이면에는 심각한 뒤틀림이 있었다.

‘그래서 미카엘과 교섭중인 건가.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군. 하지만…….’

최형림을 조사한다는 건 곧 최형림에게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

미카엘과도 친분이 있는 자, 시현의 존재나 초상능력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가 검사라면 시현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상성이라 할 수 있다.

괜히 이런 남자를 조사했다가 벌집을 들쑤시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이미 허세를 잔뜩 떨어뒀으니 어쩔 수 없군.’

허풍을 떨 대로 떨어 뒀으니 어차피 상대는 시현을 경계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보를 수집해서 나쁠 것이 없겠지.

* * *

최형준은 최형림에게 그룹 계승권 싸움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겠다.

그런 제안을 해 왔다.

하지만 최형림 입장에서는 아주 어처구니가 없는 제안이었다.

‘정말…… 멍청한 놈이군. 지금 이걸 교섭이라고 하고 있냐.’

최형준이 주겠다는 것은 최형림의 상속분,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뿐이다.

진짜로 줄지, 아니면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입 싹 씻고 모르는 체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미 검사라는 남부럽지 않은 직업과 직책을 가지고 있는 최형림 입장에서 언제든지 입 싹 씻을 수 있는 일에 굳이 위험한 다리를 건널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갑중의 갑,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 본 적 없는 최형준으로서는 왜 최형림이 자신의 이 ‘너그럽고 관대한 제안’을 거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해했다.

“혹시 누님이나 사촌들이 형님에게 제안을 했어?”

“아니. 그럴 리가. 그냥 나는 검사자리를 굳이 내놓으면서까지 그룹 승계 싸움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검사 자리를 내놓을 필요가 없어. 검사 자리에서 날 도와주면 더 고맙지.”

“그렇다면 더더욱…… 참여하고 싶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최형준은 최형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껌뻑였다.

보다 못한 시현이 옆에서 거들었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리자면 최형림 검사님은 검사직 당장 때려 칠 만큼 화끈한 제안이 들어오지 않으면 같은 배를 안 타겠다. 그렇게 말하고 계신 겁니다.”

“아.”

시현의 설명에 최형준이 깜짝 놀랐다.

‘역시 이 탐정은 말이 통하는군.’

최형림은 시현이 속시원하게 자신의 뜻을 대변해 주는 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데드맨…… 위험한 놈이야.’

시현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시현에 대한 경계심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그 반면에…….’

최형준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님, 형님이 검찰에 남아 있기엔 약점이 많아. 윤 회장이랑 가까이 지낸다면서? 윤 회장 그거 완전 반달이야. 반달. 반건달이라니까.”

보고 있던 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갑을 잡고 태어나서 그런가. 지금 이걸 교섭이라고 치고 있냐?’

남에게 아쉬운 위치에서 딜을 쳐 본 적이 없으니 이런 망발을 하는 것이다.

보다 못한 시현이 주위 사람들을 보았지만 경호원이나 비서들 중 누구도 함부로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선 외부의 굴러온 돌인 시현이 나설 수밖에 없다.

“저기 고객님. 계속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리자면 지금 교섭에서 협박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아니, 협박하겠다는 게 아니라.”

“왜 협박이 좋지 않은 카드인지 말씀드리지요. 우선 첫째, 고객님이 알고 있는 정보가 치명적일 리가 없습니다. 전직 아이돌 가수인 성취가 성상납과 검은돈을 먹인 리스트가 나돈 건 아시죠? 그 성취 리스트에 최 검사님은 없습니다. 최 검사님의 임용시기를 생각해 보면 물리적으로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기도 하고요. 최 검사님의 임용시기를 생각하면 본격적인 비리나 약점이 생길 수가 없지요. 너무 짧거든요.”

“어.”

시현이 그렇게 조목조목 들어서 가르쳐 주자 주위의 비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아마 그동안 자신의 철딱서니 없는 주인이 말을 안 들어서 고생깨나 한 모양이다.

그들이야 계속 최형준을 모셔야 하니까 맘 놓고 말할 수 없었지만 단기직인 시현은 미운털 박히건 말건 할 소리 못 할 소리 가리지 않고 시원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는…… 경쟁자의 존재입니다. 고객님의 정보 입수 루트는 한영그룹 쪽 아닙니까? 그렇다면 같은 정보가 이미 경쟁자 손에 들려있다고도 생각하셔야죠. 역으로 최설아 씨가 먼저 최 검사님을 협박했고 그게 위협적이라 칩시다. 그러면 최 검사님을 지키는데 돕겠다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최 검사님의 협력을 공짜로 손에 넣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지금 그 정도 정보로 협박을 하는 행위는 남 좋은 일 시켜주는 바보짓이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

시현이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눈으로는 거의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너무 한심해서 어이가 없지만 돈 주는 고객님이니 주먹대신 말로 조곤조곤 가르쳐 준다.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형준도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시현의 지적을 듣고 알았다.

“어, 형님. 그런 뜻은 아니었어. 미안해. 진짜야. 난 그저 형님을 존경하는데, 형님이랑 한편이 되고 싶은데 행여나 잘못될까 봐 그만 선을 넘어버렸네. 용서해 줘.”

“…….”

최형림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최형준은 머리 쓰는 부분, 교섭을 하는 부분에서는 최악이었다.

그러나 워낙 부잣집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서 그런가? 마음에 어두운 부분이 없어서 그런지 사과하는 것은 정말 일품이었다.

생각이 짧은 어린 애가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런 생각이 들도록 정말 진솔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녀석이 내 동년배 형제자매와 사촌들 중에서는 가장 인성이 좋지. 한영그룹을 이끌기에는 너무 멍청하지 않은가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문득 이런 최형준이 대체 뭘 믿고 최설아를 제치겠다고 나서는지 그게 궁금해졌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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