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Kingdom of Choi #3
“검사님이 그렇게 누군가에게 공격적으로 말씀하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최형림은 언제나 남들에게, 심지어 후배가 되는 류하리나 성신아에게도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었다.
그런데 최형준이나 가족들에게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다.
“아, 탐정님 계신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가족에게는 대하는 게 좀 경솔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경박한 언행으로 불쾌감을 드렸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불쾌하다니요.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
듣고 있던 최형준이 시현의 말을 듣고 의아해했다.
“내가 멍청해서 평소 욕을 안 하던 사람이 욕을 퍼부어도 이해하겠다, 뭐, 그런 뜻인가?”
“그럴 리가요. 오해이십니다.”
하지만 시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
최형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야겠는데 워낙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서 화도 나지 않았다.
* * *
“대체 왜 이렇게 되었지? 왜 아버지는 숙부들이 이러는 걸 방치하는 거야?”
“최중선 회장의 애인이 임신했거든.”
최형림이 그렇게 말하자 시현이 아, 하고 감탄했다.
최중선 회장, 그러니까 최형림에겐 법적인 아버지, 최형준에게는 친부가 되는 남자가 애인을 여럿 두고 있고 사생아도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시현이 놀란 것은 최형림이 대놓고 그를 최중선 회장이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유전적으로는 남남이긴 하지만 그래도 키워준 부친인데, 부자지간의 사이가 아니군. 완전 남, 아니, 원수처럼 말하고 있잖아?’
최중선 회장을 언급하는 최형림에게는 일말의 정도 없었다.
“……뭐? 무슨 뜻이야 그게?”
최형준은 최형림의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지 재차 물어보았다.
“이게 참. 설명해드릴까요?”
“설명해 줘.”
그러자 시현이 최형림의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고 말을 시작했다.
“우선 종합건설그룹에서 볼 때 최설아 씨보다 최형준 씨의 전공이나 교육이 더, 그룹의 핵심 업무를 맡기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 건설사에 입사해서 초속승진을 하면서 승계구도를 굳혔다면 분명히 고객님이 후계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 그건 알아.”
본래 한영건설의 후계자로는 최형준이 점찍어져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바뀐 거야? 왜 내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거지?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새 자식이 생겼으니까요.”
“……뭐?”
“태자 책봉이지.”
최형림이 투덜거렸다.
“원래 태자를 폐위시키고 새로 태어난 어린 아이를 태자로 책봉하는 건 중세에는 흔한 일이잖아?”
“아니, 그건 무슨 봉건 시대나 그렇고 현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무슨…….”
“몰랐어? 재벌이라는 게 원래 봉건적이야. 자기 혈통이라고 아무런 검증도 안 된 놈에게 대기업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미개한 짓이지.”
최형림은 재벌가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재벌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했다.
재벌가의 일원이지만 그들에게 경원시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헨리 포드도 아들인 에셀 포드에게 기업을 승계하면서 오히려 경영권은 절대로 놓지 않았어요.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다. 이건 굳이 한국 재벌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
최형준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워했다.
사실 최형준은 유학에서 돌아온 후, 매우 안이한 발상으로 누나, 최설아의 영역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경영권 다툼의 세계는, 재벌 일가의 세계는 훨씬 더 비정하고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사생아인 최형림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고, 심지어 재벌의 일원도 아닌 시현조차 알고 있는 일을 최형준은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다니.
‘난 진짜 나이브했구나.’
최형준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 * *
“그래서 어쩔 거지요? 탐정 씨? 계속 여기 피신해 있을 겁니까?”
최형림이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아, 곧 떠나겠습니다.”
“곧?”
“예. 저희가 여기 온 게 들키고 나면요.”
“들키고 나면……?”
최형림은 시현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올 겁니다. 아, 마침 도착했나 보군요.”
시현이 전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오피스텔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는 최설아가 눈에 다크서클을 매달고 서 있었다.
“……누나.”
최형림과 최형준은 갑자기 등장한 최설아에게 놀랐다.
“오, 맙소사. 뭐야? 여긴. 지옥인가? 아빠의 원치 않는 양자로 들어온 뻐꾸기 새끼에 멍청이 이복동생이라니.”
최설아는 최형림과 최형준을 보고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뭐야? 이 빌어먹을 탐정. 너 지금 우리 형제 전부 뜯어먹으려는 거야? 고객만족이 최우선이라면서 이렇게 겹으로 계약해도 돼?”
“가는 방향이 같으면 합승 정도는 할 수 있지요. 카풀이라고 할까요.”
시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최형준은 최설아를 미행하고 감시해 달라, 최설아가 마약을 한다면 그 증거를 찾아주면 좋겠다고 시현을 고용했었다.
하지만 시현은 최설아에게 오히려 계약을 제안했고 그 후, 최형준에게도 수명을 거는 계약을 제안해 둘 다 응하게 만든 것이다.
“그럼 최설아 씨도 오셨고 이제 상대도 우리가 최형림 씨의 집에 모여서, 세 형제가 의기투합했다고 여기겠군요.”
“그게 목적이었군.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어!”
최설아는 시현의 속셈을 듣고 기막혀했다.
시현이 그녀를 이곳에 불러들인 것은 결국 최씨 일가의 세 형제가 최형림에게 모이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리 되면 그들의 행보를 추적하는 자들은 자연히 세 형제가 위기의 상황에서 연합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정작 기가 막히는 건 최형림이었다.
“이 경우 저는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쪽 아닙니까. 가택침입도 당하고…….”
“검사니까 아실 거 아닙니까. 형제간에는 이런 일로 기소도 안 된다는 거.”
“당신은 제 형제가 아닙니다만…….”
최형림은 자신을 끌어들여놓고 뻔뻔한 소리를 하는 시현에게 그렇게 쏘아붙였다.
“안심하십시오. 이제 일어날 테니까. 그럼 실례했습니다.”
“어, 정말 괜찮은 거야? 아직 그놈들 더 있으면 어쩌려고?”
최형준은 자신의 경호원이던 놈들이 사실 숙부가 보낸 감시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위축되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다.
“괜찮습니다.”
시현은 알지 못할 근거로 확신하며 최형림의 집 현관을 나섰다.
* * *
한영건설그룹의 이사이자 한영시큐리티, 그리고 한영리조트의 오너인 최중무 사장은 한영그룹 내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살림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한영그룹이 SH그룹의 방계 계열사에 불과하던 시절, 건설업이란 그야말로 짐승들의 세계였다.
거친 육체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가난한 철거민들을 내쫓고, 업계에 끼어드는 건달들, 군사정권의 군인들, 부패한 공무원들을 상대하고 관리해야 했으며 때로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저 외국에 나가서 피와 땀을 팔아야 했었다.
유달리 담력이 세고 야성적인 감각이 발달했던 최중무 사장은 바로 그 마초적인 건설업 초창기를 견인한 한영건설그룹의 중진이었다.
그는 공무원들과 정재계에 뇌물을 먹이고 그들과의 관계를 관리하며 비자금을 형성하고 때로는 무력으로 재개발 노조를 내쫓기도 하면서 법의 카테고리 밖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그 당시 최중무 사장은 한영그룹의 살림꾼이었다.
하지만 한영그룹이 대기업이 되고 대한민국의 위상도 그만큼 높아지면서 한영건설그룹은 더 이상 예전처럼 피땀을 흘려가며 건달들과 부대낄 필요가 없어졌다.
즉, 최중무 사장의 역할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최중무 사장은 한영건설그룹의 중진에서 물러나 시큐리티나 리조트 사업 등을 맡게 되었는데 이것에 대해서 그는 불만이 많았다.
최중무 사장은 자신이야말로 그룹 전체를 위해 가장 많은 희생을 한 인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내 손을 더럽혔다. 그렇게 해서 그룹을 지키지 않았다면 벌써 예전에 그룹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니 응당 그룹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상속법은 자식에게 주어지는 것, 자식이 전부 죽기 전에는 형제에게 상속권이 없다.
즉, 한영그룹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전부. 나머지는 죄다 최설아나 최형림, 최형준에게 맡겨질 것이다.
주식만이 아니다.
만약 경영능력, 외부적으로 보이는 실적으로 보자면 최중무 사장보다 최중경, 최옥미, 다른 두 형제의 성취가 더 크다.
최중무 사장이 더러운 일을 담당하느라 대외적으로 주주들에게 어필할 만한 실적은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중무 사장이 순순히 조카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자신은 이제 뒷방 늙은이로 물러설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최중무 사장은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 * *
“시현탐정사무소라고?”
“네. 그놈이 도련님을 그, 최형림 검사의 자택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뭐하는 놈이지?”
최중무 회장은 시현의 행동에 놀랐다.
“어이, 영사!”
그러자 왼쪽 머리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양복차림의 남자가 돌아보았다.
그는 중절모를 벗으며 물어보았다.
“예. 부르셨습니까?”
“시현이라고 알고 있나?”
“아, 시현…… 시현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후후후.”
영사라 불린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골치 아픈 놈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이 일을 담당했다면 애초에 끼어들게 하지 않았을 텐데 일단 끼어들고 말았으니 상당히 까다롭군요.”
“골치가 아픈 놈이라고? 영사 네놈이 그렇게 말하는 상대는 처음 보는군. 뭐하는 놈이지? 자료에는 불륜 전문 탐정이라고만 나와 있던데.”
“아, 그게, 그 녀석 본래 불륜 전문 탐정입니다만 가끔 이상한 일들을 벌이거든요. 유명한 일로는 그 녀석이 손대서 강남경찰서장 모가지가 날아간 일이 있습니다.”
“뭐? 그거?”
“아십니까?”
“나도 들어서 잘 알지. 윤 회장에게 돈 받아먹은 걸 공식석상에서 까발린 유명한 사건이잖아?”
“예.”
“흠. 그런데 고작 탐정 한 놈이 강남경찰서장에 헥사곤 윤 회장을 건드리고 아직도 살아 있단 말야? 보통 지금쯤이면 코로 콘크리트를 들이 마시고 어디 축사 밑에 파묻혀야 하는 거 아닌가? 뒤에 뭐 엄청난 배경이라도 있나?”
“아니요. 그저 순전히 본인의 실력으로 살아남는 놈입니다.”
“그게 가능한가?”
“그놈을 조지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이 엄청나기 때문이지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놈의 존재를 참고 넘어가는 게 이득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건드려버렸다.
“하. 어이없는 놈이로군. 야. 왜 이런 놈을 형준이에게 붙여준 거야?”
원래 그들이 따로 흥신소나 탐정을 최형준에게 붙여준 것은 도청이나 감청,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를 덮어씌울 희생양으로 고른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이 고른 탐정이 강남경찰서장도 들이받은 놈일 줄이야.
영사 대신 다른 이가 대답했다.
“그게 추천이 많아서요.”
“추천이 많다고 그런 놈을 뽑았어? 멍청아. 이번 놈은 우리 일 짬처리 시킬 놈 뽑는 거라고 했잖아.”
“그런 의미에서도 추천이 많았습니다.”
“…….”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