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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맨31-85화 (85/269)

제85화

Kingdom of Choi #11

아침이 밝았다.

최설아와 최형준은 계획한 대로 경찰에게 진상을 부리고 민원을 넣었다.

진상을 크게 떨면 떨수록 경찰들이 시현에게 집중할 틈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최설아와 최형준이 민원을 넣네 마네 소란을 피우는 동안, 시현은 재주도 좋게 슬쩍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경찰서 입구의 벤치 앞, 한 남자가 앉아서 시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영사였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짧은 지팡이를 땅에 짚은 채 근처 카페에서 사온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나 할까?”

“죄송합니다만 제가 바쁘군요. 저랑 이야기 하고 싶으시면 돈이라도 가지고 오시지요.”

시현은 영사를 무시하고 걸어 나갔다.

강남경찰서는 그에게 있어서 적지다.

여기에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

밤 시간에는 야근하는 이들에게 별다른 결정권이 없어서 옴짝달싹 못 했겠지만 이제 아침이 되어 결정권을 쥔 자들이 출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문제는 류하리가 먼저 퇴근하면서 시현의 차를 끌고 갔다는 것이다.

‘귀찮게 되었군. 하필이면 이때.’

시현은 지하철로 향했다.

그가 지하철에 도착하니 지하철 플랫폼 벤치에 영사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불륜 조사로 돈을 잔뜩 벌고 있다고 하던데 굳이 나에게까지 돈을 우려내야 직성이 풀리나?”

“마약왕, 석유왕 뺨을 왕복으로 후려갈길 정도로 돈이 많아져도 당신에게는 돈을 받겠습니다만?”

“하지만 전철에서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나에게 총을 쏠 수는 없을 테지?”

전철이 와서 시현이 전철에 탑승하자 어느새 전철 안에는 영사가 있었다.

시현이 눈을 부라렸지만 다음 순간 열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다.

아침시간의 2호선, 강남역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도 또 많은 사람들이 탄다.

“자, 그럼…….”

영사가 시현에게 말을 걸려는 바로 그 순간, 시현은 인파속에서 꿈틀거리며 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

영사의 앞에서 태연히 귀에 이어폰을 삽입하는 시현을 보니 영사도 정이 떨어져서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너무 하지 않나?”

“어차피 당신이 제게 설득당할 것도 아니고 제가 당신에게 설득당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제게 이득이 되는 걸 말하려고 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 들리나 보군?”

“아뇨, 이제 음악 켤 겁니다.”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영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태도가 너무 안 좋구나, 시현. 너 때문에 화가 난 내가 류하리 아가씨를 죽일 수도 있어.”

“…….”

이어폰을 꼈던 시현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그는 이어폰을 빼면서 영사를 노려보았다.

“정말 제 관심이 고팠나 보군요. 뭡니까?”

“타자기의 악마에게 날 소개해 주게.”

“하아.”

시현은 혀를 찼다.

“헛된 생각 하지 마시지요. 하고픈 이야기는 그게 전부입니까?”

“네게도 도움 되는 이야기일 텐데? 일단 이야기만이라도 해 보라고. 그가 관심을 보일 수도 있어. 어쩌면 나로 인해서 네가 해방될 수도 있다고. 왜냐면 나는 네 미래의 모습이나 다름없으니까.”

“퍽이나 희망찬 이야기로군요. 이야기는 그게 전부입니까?”

“일단은…… 어차피 일 문제로는 합의를 볼 수 없겠지.”

“네. 그렇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당신이 틀린 게 있어요.”

“뭔가?”

“만원 전철 안에서 총을 못 쏠 거라고 한 것.”

그 순간 시현이 팔꿈치로 영사의 턱을 올려쳤다.

밀접하고 인구가 많은 상황에서 피할 곳도 없는데 갈긴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영사는 사라졌다.

시현의 팔꿈치가 허공을 갈랐다.

“아. 뭐예요?”

시현이 격하게 움직이자 그와 붙어 있던 이가 놀랐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시현은 사과하고 영사가 사라진 전철 안을 노려보았다.

* * *

“이거 참…… 대단한 놈이로군.”

영사는 그가 아지트로 쓰고 있는 금천구의 폐 철공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영사 형님?”

영사의 부하들, 반건달 양아치들이 흠칫 놀라서 영사를 맞이했다.

“뭐 별거 아니다. 코끝만 살짝 맞았어.”

영사는 코피를 쓱 손으로 훔치고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다들 준비는 되었냐? 어제 많이 다치진 않았고?”

“네.”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밤부터 사냥을 시작하자. 어차피 낮에는 손을 대기 좀 껄끄러우니까 밤에 싸울 거다. 다들 잘 먹고 푹 자 둬라.”

영사는 부하들에게 그리 말하고 자신도 철공소 사무실에 비치된 간이침대에 드러누웠다.

* * *

시현은 류하리와 다시 합류했다. 약속 장소는 탄천 주차장.

류하리는 시현의 차를 그곳에 가져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데다가 화장기도 흐트러져 있고 잠도 잘 못 잔 것 같아 보였다.

“저 왔습니다. 흠. 괜찮습니까?”

“아, 시현 씨. 괜찮았어요? 전 어젯밤에 너무 걱정되어서 잠을 설쳤어요. 세상에. 강남경찰서로 쳐들어가다니. 만약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야박하게 도망가셨지요?”

“아하하하. 경찰인 제가 당신이랑 내통해서 너무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이긴 좀 그래서요. 어차피 자러 들어간 거니 저는 있어봤자…… 방해만 될 것 같잖아요?”

“우리 사이가 그렇게 좋은가요? 경찰들에게 보이면 안 될 정도로?”

“아.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지요. 어쨌건 멀쩡한 걸 보니 괜찮았나 보네요?”

“네. 들키기 전에 잘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고객님들은 아직 강남경찰서에 있는 것 같으니 거기 주차장으로 가서 그들을 픽업하도록 하죠.”

류하리와 합류해 차를 회수한 시현은 다시 최설아, 최형준 남매와 만났다.

최설아와 최형준은 밤잠을 설쳤는지 비틀거리며 시현의 차에 올라탔다.

“아, 젠장.”

“이 나이에 경찰서에서 신세를 지게 될 줄이야.”

“그나저나 어젯밤은 경찰서에서 피신했다 치고 오늘 밤은 어쩔 거야? 또 경찰서에 숨어 지내야 하나?”

최설아가 물어보자 시현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경호원들은 어떻습니까?”

“아침에 연락해 봤는데 경호팀장이 너무 크게 다쳤어. 그래도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하더라. 아, 진짜…… 내가 불러들여서 나 지키라고 고용한 사람들이 정도 들었는데 너무 심하게 다쳐서 미안하네. 다른 경호원들도 그만두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그만두라고 했어. 아무래도 나를 위해서 죽을 위험에 처하라고 할 면목이 없으니까.”

“역시 염치를 잘 아시는군요.”

“뭐 비웃어도 할 말은 없어.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으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누나, 왜 그래. 죽을 날이 다가와서 그런가?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대.”

듣고 있던 최형준이 놀라워했지만 시현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죽을 날은 한참 남았습니다. 제게 3년씩 떼어주고도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오늘 밤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낮에 승부를 보지요.”

“낮에? 어떻게?”

“그건 바로…….”

시현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 * *

“아, 진짜…….”

듣고 있던 류하리가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정말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게 솔루션?”

“네.”

시현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진짜 미치겠네.”

경찰인 류하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솔루션이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아니, 잠깐만.”

최설아는 발끈했다.

“그럼 이건 처음부터 그냥 할 수 있었던 거잖아?”

“네. 그렇지요.”

“그럼 진작 했어야지! 괜히 경호원들만 다치고 우리도 습격당하고!”

“그 전에 물어보지요. 어제 습격을 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제 말을 들었을까요?”

“뭐?”

“당신은 바로 어제 전까지는 습격이나 암살시도에 대해서 반신반의했어요. 솔직히 저와 계약한 것도 성공보수라는 점, 그리고 동생인 최형준 씨에게 숙부의 입김이 닿고 있으니 분명히 뭔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점. 그 두 가지 때문에 계약한 게 아닌가요?”

“그야…….”

“결과적으로 말해서 저는 당신들이 확실히 제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오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저희 쪽이 유리한 상황에서 미끼를 충분히 깔고 상황을 통제하면서 적의 습격을 유인하려고 했는데 어떤 분이 단 이틀 만에 참지 못하고 안전지대에서 나가는 바람에…….”

“그래도 어떻게 잘 설득했으면 이런 일은 안 당했을 수도 있잖아. 알면서 내버려뒀다는 게…….”

“설득을 위해서 필요한 절차였습니다. 안심하세요. 다년간의 연구결과 이것이 최고의 고객만족도를 위한 지름길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그럼 기자를 불러 볼까요?”

시현은 평소 알고 지내던 K신문의 장기정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

[아함. 어지간하면 전화 걸지 말라니까. 하지만 저번에는 고마웠어. 덕분에 특종 좀 낼 수 있어서 데스크에 면목 좀 세웠지.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남양주 진접에 한영바이오텍 제 2 공장이 오늘 기공식을 하는데 그 기공식 좀 취재할 생각 있습니까?”

[뭐야. 네놈 주식도 하냐? 왜 그런 데 관심을 가져?]

“주식?”

[아니, 보통 삽 뜨는 기공식은 거기 시장이나 높으신 분들에 관심 있는 경우 아니면 그다지…… 우리처럼 전국구 중앙 신문 기자는 떡값 없이 그런데 안 간다고. 뭐 수십조 때려 부은 반도체 생산공장이나 사람들 엄청나게 고용하는 자동차 공장 같은 거 아니면 말야. 아니면 거기 지자체장이 자기 업적 자랑하고 싶어서 난리인 사람?]

“아, 그래서 장 기자님은 배가 부르셔서 지방 공장 기공식 따위는 관심이 없으시다?”

[뭐야? 주가 장난치려고 그러는 거 아냐?]

“대단하신 자신감이시군요. 자기가 취재하면 거기 주가가 오를 거라고 생각하다니?”

[실제로 오르니까 하는 소리지. 아니, 안 오르면 상관없는데 그래서 작전세력이 들러붙어서 내 기사를 주구장창 퍼 나른다? 잘못하면 금감원에 끌려 가.]

“안심하세요. 주가가 오를 만한 일은 아니니까. 다만 오늘 가면 아주 재밌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음, 낚이는 것 같지만 뭐, 성취 때 워낙 크게 받아먹었으니 속는 셈 치고 가보지. 시간이 별로 없네? 엄청 밟아야겠어? 그럼 지금 출발하니까 전화 끊는다?]

장기정은 그리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성취 때 받아먹어?”

전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최설아가 의아해했다.

“아…….”

류하리는 보고 있다가 흠칫 놀랐다.

최설아는 성취와 사귀던 사람, 비록 그 끝은 좋게 끝나지 않았지만 성취의 죽음이 파파라치들에 의해서 철저히 해부당한 것이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성취의 사망 장면을 찍은 걸로 특종을 터뜨린 장기정 기자, 그리고 그에게 특종을 물어다 준 게 시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녀의 감정이 어떻게 될지 종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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