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86화 (86/269)

제86화

Kingdom of Choi #12

최설아의 신뢰가 깨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쇄도했다.

그러나 시현은 이런 상황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 방금 기자는 성취 관련 특종을 몇 개 터뜨린 기자입니다.”

“어떤 특종인데?”

“그건 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어쨌건 저희도 시간 안에 맞추어 가도록 하지요.”

듣고 있던 류하리로서는 참으로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최형준이 입을 열었다.

“……뭐야, 당신. 저 사람 좋아하는 거야?”

“네?”

류하리의 실없는 미소를 최형준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니, 저 치의 조수로 호흡이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서.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걸로 보이는데…….”

“아하하하. 그, 그럴 리가요.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참 감수성이 풍부하시네요. 남녀를 보면 그냥 둘이 연애하는 걸로 보이나요?”

“그런 건 아닌데…… 우리 형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너무 다른 남자랑 친밀하면 좀 그렇지.”

최형준은 벌써 시동생 노릇을 착실히 할 모양인 것 같았다.

* * *

최중무 사장은 한영바이오텍 제2공장의 기공식에 참석했다.

한영바이오텍, 대기업인 한영그룹의 계열사이긴 하지만 한참 뒤에 기업인수로 뛰어든 회사라 큰 의미는 없다.

기존의 제약회사 중 하나를 인수하면서 그 제약회사의 땅값 오른 옛 공장을 철거하고 대신 신공장을 외곽에 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M&A비용으로 고가의 공장부지와 그럭저럭 흑자인 의료 제약 기업을 얻을 수 있는데, 땅을 새로 사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

벌처 펀드들이 주가가 저평가 된 회사를 뜯어먹을 때 주로 하는 짓인데 토건사업에 잔뼈가 굵은 한영그룹에서는 이러한 행위로 막대한 이익을 쉽게 올릴 수 있었다.

다만 새 공장으로 이전하면서 어떻게든 구색은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룹의 핵심이사인 그가 기공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다.

* * *

공장 기공식장 근처에 마련된 텐트, 잠깐 마련한 텐트지만 VIP를 위해 공기청정기와 에어컨까지 붙어 있는 고급스러운 텐트다.

이 VIP텐트에서 최중무 사장은 태블릿 컴퓨터로 받아든 보고서들을 읽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창 바쁠 때인데…… 일이 꼬이는군.”

그는 조카들이 이상한 탐정과 함께 어제 밤을 무사히 보낸 것에 대해서 짜증과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한영그룹에서 최중무 사장은 산전수전 다 겪은 무시무시한 인물, 호걸 중의 호걸로 평가 받고 있지만 그건 그룹이 성장할 때의 이야기,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고 지켜야 할 것도 많은 그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파다.

그런 그가 살인 교사 같은 범죄를, 그것도 같은 가문의 조카들을 살해하는 짓을 결심한 것은 영사와 그 일당이 보여준 신비한 힘 때문이었다.

이거라면 절대로 경찰들이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못한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건을 진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영사가 암살을 실패하고 만 것은…….

‘역시 그 탐정 놈도 영사와 비슷하게 뭔가 능력이 있구나. 그렇다면 그 반대도 성립되잖아?’

최중무가 경찰에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살인을 지시했던 것처럼, 최설아와 최형준도 역으로 최중무를 살해하려고 할 수 있다.

물론 영사가 픽서로서 뒷세계에서 가지는 지위, 그리고 최중무의 한영시큐리티가 일반 사회에서 가지는 지위, 인력, 자원 등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최설아와 최형준이 손을 잡았다 해도 역부족이다.

다만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법, 궁지에 몰린 최설아와 최형준 쪽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는 그도 모른다.

‘일단 낮의 공식일정을 끝내고 나면 한 번 더 영사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군.’

최중무는 그리 생각하며 기공식 준비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저, 사장님…….”

최중무의 부하들이 당황하며 접근해왔다.

“무슨 일이냐?”

“그게…… 오셨습니다.”

“와? 누가?”

“최설아 아가씨랑 최형준 도련님입니다.”

“뭐?”

최중무는 의아해했다.

그의 눈앞에서 도망쳐도 시원찮은 녀석들이 왜?

아예 당당히 찾아올 줄이야.

‘무슨 생각이지? 아, 그거로군.’

최중무는 최설아를 살해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사와 그의 조직을 통해서이다.

한영시큐리티는 상장회사, 거기의 직원들이 그에게 충성하긴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같은 최씨 일가, 재벌가의 상속자들을 죽일 리는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부하들 중 한 놈이라도 입을 뻥끗하면 최중무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 게 아닌가.

최형준을 조사해서 최설아를 도청, 불법 감시했던 사실을 만들고 그걸 빌미로 최형준과 최설아를 싸움 붙인다.

이 정도가 한영시큐리티의 직원들, 그중 고위층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최설아 암살 시도를 모른다.

‘그러니까 회사 직원들이 많은 곳은 안전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쪽으로 온 것이로구만. 그래서 나에게 뭐, 정에 호소라도 하려고?’

“어떻게 할까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는 들어보지.”

최중무는 대한민국이 전후의 상흔으로 지지리도 가난하던 시절, 아직 그 상흔이 복구되지 않은 때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제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을 짓고 도시를 건설했다.

건설업은 국가의 대계, 자신이 그 기업의 고삐를 쥐는 것이야말로 애국애족의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의를 위해서 혈육의 정 따위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목숨을 구걸하러 온 모양이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너희들이 상속권을 진작에 포기한다면, 뭐, 그러면 넉넉한 삶은 보장해 줄 수도 있다. 과연 어떨까? 이 조카 놈들은 다들 심약하니 어젯밤 일로 심장이 오그라들어서 내게 모든 걸 바치러 온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한 최중무는 그렇게 되면 기꺼이 조카들을 용서해 주겠노라 다짐하고 조카들을 만나러 텐트 밖으로 나갔다.

* * *

기공식 준비가 한창인 공장부지 앞, 직원들이 삽과 색테이프를 준비하고 폭죽과 군악대 같은 것도 모아 놓았다.

남양주시의원들과 시장도 오게 되어 있는지라 따로 VIP텐트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검은 색 관용차량들이 들어온 걸 보니 VIP들도 제때 찾아온 모양이다.

한영그룹의 사보를 찍는 사내 홍보부가 분주히 촬영준비를 하며 미리 리허설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최설아와 최형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부님!”

“그래. 어젠 제대로 잠도 못 잔 것 같구나. 몰골이 아주 비 맞은 쥐새끼 꼴이로구나.”

최중무는 조카들이 초췌한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어제 습격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 영사에게 실망하고 있었는데 그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조카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패잔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기를 들 셈이냐? 아니면 설마 이 백주대낮에 무슨 짓을 하려고?”

“백기를 든다면 어찌하실 거죠?”

“우선 너희들 입으로 형님과 상의해서,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와 상의해라. 그것만으로도 사실 끝날 일이지. 굳이 끝장을 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

“어…….”

최설아와 최형준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죽이려 공격해오던 숙부가 먼저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다시금 안전한 생활이 보장되는 달콤한 제안.

심약한 사람들은 물기 쉬운 함정이다.

그리고 최씨 남매 역시 심약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발로 땅에 선 적이 없으며 사실 이 거대한 대기업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도 없다.

그런데 그들의 뒤에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시현이 그들의 뒤에서 고개를 젓는다.

“아, 그게…….”

“거절하겠습니다. 설령 지금 숙부님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더라도 언제 변심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 그럼 오늘 밤은 어디서 피할 테냐? 또 윤 회장네 시설이나 경찰서에 달려가려고?”

“아니요. 밤을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최설아는 그리 말하고 최형준에게 눈치를 줬다. 하지만 최형준은 머뭇거렸다.

“아니, 이 등신아.”

“……그, 그게 좀.”

“뭘 할 생각이냐?”

최중무는 조카들의 기이한 행동에 의아해했다.

설마 어디 저격수라도 배치해서 저격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러나 남양주 진접에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어서 저격수가 있을 만한 위치도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저격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하지만 혹시나 싶어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청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류하리를 조수로 대동하고 있는 시현이 최중무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취이이이익!

“큭?!”

갑자기 최중무에게 뭔가가 뿌려졌다.

깜짝 놀란 그가 돌아보니 최설아가 페퍼스프레이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뭐? 지금 무슨…….”

“으아아아!”

그때 이번엔 최형준의 주먹이 최중무의 얼굴에 꽂혔다.

주먹은 그리 세다고 할 수 없지만 스프레이에 맞고 눈물 콧물이 콸콸 쏟아지는 상황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최중무가 쓰러지자 최형준과 최설아는 쓰러진 최중무를 발로 찼다.

“아니, 지금 무슨 짓 하시는 겁니까!”

“뭐야!”

한영시큐리티 직원들이 놀라서 달려오지만 시현도 달려가 말리는 척을 하며 슬쩍 한영시큐리티 직원들을 밀어냈다.

그동안 최설아와 최형준은 자신들의 숙부, 최중무를 열심히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야! 찍어! 저 새끼들 저거 범죄 증거로 찍어!”

사보 기자들을 보고 행사를 준비하던 직원들이 흥분해서 외쳤다.

그러나 사보 기자가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니, 저, 저분들은 회장님 장녀분이랑 막내아들 분인데…….”

“뭐? 아, 아니, 찍지 마! 찍지 마!”

최중무 사장을 두들겨 패고 있는 게 회장의 딸과 아들이라는 걸 알자 직원들은 외려 찍지 말라고 몸서리 쳤다.

하지만 그 상황을 무시하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찍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K신문사의 장기정 기자였다.

* * *

약 1분 뒤, 사태는 수습되었다.

한영시큐리티의 직원들의 만류로 인해서 최설아, 최형준, 그리고 최중무는 따로따로 갈라섰다.

최설아나 최형준이나 어찌나 물주먹이었는지 1분 정도 때렸는데도 최중무는 자기 발로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굴만은 낭패하기 그지없었다.

격동의 군사정권 시절이나 해외 건설 파견 시절,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던 최중무 사장이 핏덩이 같은 조카들에게 몰매를 맞은 것이다.

* * *

“……나 미쳐.”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류하리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니까 이게 솔루션이란 말이에요? 정말? 이 패륜막장극이?”

그야말로 패륜막장극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이 상황을 연출한 장본인, 시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고의 솔루션이지요.”

……너무 해맑고 화사한 미소라서 류하리는 순간 혹했다.

‘와, 잘생겼다. 너무 잘생기고 상큼한 미소라서 순간 CF인 줄. 여기 밑으로 뭐 아파트 광고 나와도 그러려니 하겠다.’

바꿔 말하면 시현은 정말로 지금 이 결과에 100%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데드맨3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