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탐정 25시 #2
“그래. 사실 우리가 여기 사는 건 아닌데 다른 흥신소에 갔더니만 다들 여기가 그렇게 이런 일 처리하는 데 잘한다고 해서…….”
“…….”
류하리는 그 말을 듣고 눈치챘다.
‘아, 이거 짬 처리구나.’
다른 탐정이나 흥신소에서는 시현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불륜 사건을 쉽게 해결해 주는 하청업자. 자신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너무나 손쉽게 해결해 주는 일종의 마스터 키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는 다들 시현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어린놈이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모르지만 쉽게 돈을 잘 번다.
잘나가는 게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진상 손님을 발견하게 되면 시현탐정사무소를 적극 추천하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손님은 바로 그런 진상인 것이다.
“미행하라고 하신 건……?”
미행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몰라야 미행이지 알고 있는데 무슨 미행이냐?
그런 의미에서 던진 질문인데 대답이 가관이다.
“아니, 내 아내의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서 놔주면…… 그동안 이년이 다른 놈이랑 놀아나는 걸 지켜봐야 하잖아? 그런데 그건 싫어! 그래서 그냥 자백만 받아내라고.”
“?”
“저 안했어요. 남자. 여동생 남친. ‘오빠’요.”
여성의 말이 어눌하다. 아마도 외국인인 것 같다.
“아니, 이년이 끝까지 발뺌하네. 너 내가 나이든 놈이라고 우습게 보여? 그 젊은 남자 놈이랑 내 돈으로 놀아나는 걸 모를 줄 알아? 내가 얼마를 주고 널 데려왔는데? 하여튼 그렇게 되었으니 좀 해 주쇼.”
“아니, 저기 고, 고객님? 탐정사무소는 그런 일 하는 게 아니라…….”
“뭔 소리야? 여기가 불륜 문제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추천받고 왔는데. 불륜처리의 왕이라면서?”
“그야 그렇긴 하지만…….”
“고객만족이 이 탐정사무소의 최고의 가치라던데?”
“그것도 그렇지만.”
류하리가 난처해할 때였다.
* * *
-끼이익!
창 밖에서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탐정사무소 안으로 시현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 사무소 소장 시현이라고 합니다. 이거 참, 조수가 실례가 많았군요. 전화로 우선 상담주시고 찾아오시지…….”
“아니, 전화로 상담했는데 당신이 무시했잖아?”
“무시라니요. 저는 다만 주당 500만 원의 조사비를 선금으로 받고 그 후 발생하는 경비는 청구서가 나갈 수 있다고 안내드렸을 뿐입니다.”
“아니, 형틀 목수장도 일당이 30만 원밖에 안 되는데 뭔 한 주에 500만 원을 받아?”
“하하하.”
웃고 있는 시현에게서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오, 화내고 있다. 상담하러 온 고객에게 화내다니 별일이네? 하지만 화낼 만하다.’
이미 시현을 많이 봐 온 류하리는 시현이 불같이 화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 의뢰인은 막무가내였다.
“하여튼 싸게싸게 해 주쇼.”
“하아…… 조건에 따라서는 무료로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오, 무료? 그거 좋지…….”
그런데 그 순간 타자기가 타다다닥 울렸다.
깜짝 놀란 류하리가 타자기 쪽을 보고 종이를 살펴보았다.
“뭐야?”
“아, 구, 구형 팩스 같은 거예요. 가끔 오작동을 일으켜서.”
류하리는 그리 말하고 종이의 글자를 읽어보았다.
‘너무하시는군요. 저런 싸구려 인간은 재미없습니다만? 절박한 인간에게서 예술적으로 수명을 거래하는 게 데드맨 계약의 핵심 아닙니까? 절박하지 않은 상대, 돈으로 해결하기 싫어하는 상대의 수명을 거래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타자기의 악마도 목숨과 수명을 거래하는 계약은 좀 무게감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되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예술적이어야 한다고? 무슨 예술점 평가라도 하나 보네.’
류하리는 타자기의 존재가 예술적인 부분을 중시한다는 걸 보고 가슴에 새겨뒀다.
타자기의 악마는 이 남자의 수명을 거래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미 무료로 해 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의뢰인은 이미 무료로 확정지었는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조건이 뭔데? 어디 홍보하라고? 아, 그건 염려 마. 그렇지 않아도 내 주변에 마누라 바람난 것 같은 놈들이 드글드글하니까.”
“…….”
류하리는 그 말을 듣고 내심 혀를 찼다.
‘그게 전부 다 당신 같은 인간이면 다 공짜로 해 달라고 아무 생각 없이 수명을 바칠 것 같은데 그 수명 모아서 영생불사 하겠다. 이 우주의 끝까지 살겠는걸?’
류하리는 시현이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지 궁금했다.
일단 무료로 해 줄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낸 이상 이 남자는 돈을 낼 생각이 없다.
무료라는 말이 나온 시점에서 그의 안에서 시현의 노동 가치는 한없이 0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타자기의 악마가 거부했으니 공짜일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무리 아닌가?
류하리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제 조건을 따라주시면 무료로 당신의 아내가 더 이상 불륜을 저지르지 못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시현은 그렇게 말했다.
* * *
“어?”
류하리는 당황했다.
‘타자기의 악마가 거부했는데? 왜 이런 조건을 유지하지? 아, 그렇지. 지금 이건 나만 봤구나. 시현은 못 봤구나.’
류하리는 시현이 타자기의 악마의 의사를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다고 여기고 즉시 작전지시를 내리는 축구감독처럼 양손으로 머리 위에 커다란 X자를 그리며 시현을 말렸다.
하지만 시현은 류하리의 필사적인 X사인을 무시하고 그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제 조건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뭐 어떤 조건인데?”
“제가 당신을 위해 일할 동안, 당신도 절 위한 일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뭐? 무슨 일인데? 너무 번거로운 건 싫어.”
‘……이 작자가? 자기는 남에게 일을 시키면서 자신은 남의 일을 하기 싫다고? 돈도 안 내면서?’
류하리는 적반하장도 분수를 넘은 이 남자에게 기가 막혀버렸다.
“나는 손님으로 온 거라고. 내게 일을 시키겠다니 예상치 못한 거구만.”
‘돈을 안 내면 손님이 아니지, 이 작자야!’
류하리는 내심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시현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네. 그냥 아내의 불륜을 막고 싶어서 왔는데 갑자기 일을 시키겠다, 라고 하면 곤란하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부탁드릴 건 별게 아닙니다. 그저 하루 30분씩만 시간을 내주시면 됩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보자.”
시현은 책상서랍을 뒤져서 중고 스마트폰 하나를 꺼냈다.
“이걸로 제가 지정한 사람을 제가 지정한 시간대에 촬영해 주시면 됩니다. 미행 감시인 거죠.”
“오호. 그런 건가?”
“예. 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라면야. 하루 30분이지?”
“네. 아, 마침 곧 시작이군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표적과 그 표적의 기본 동선에 대해서 설명했다.
‘응?’
류하리는 깜짝 놀랐다.
시현이 잡은 표적은 최형림이었다.
서부지검에서 퇴근하는 루트를 확인해서 촬영해 달라. 시현은 그런 요구를 한 것이었다.
“이런, 바로 출발해야겠구만. 그럼 이 여편네는…….”
“아, 일단 저희 사무실에 맡겨주시길. 미행이니까 혼자 하셔야지요.”
“그, 그래?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혼자 남겨두고 간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안심하시길. 저희가 관리하겠습니다. 우선 다녀오시지요. 간단한 일이지만 여자를 끌고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서부지검 앞에서 시작하는데 그곳에서 여자를 끌고 다니면 주의를 끌지 않겠습니까?”
시현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안심시켰다.
'와. 약 판다. 약을 팔고 있어.'
시현을 오래 보아온 류하리는 시현이 웃고 있지만 그 내심은 오히려 음흉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시현을 알지 못하는 남자는 그러려니 하고 시현에게 설득되었다.
“그, 그래. 알겠어.”
남자가 그리 말하고 시현이 준 스마트폰을 들고 엉기적엉기적 밖으로 나갔다.
“후우…….”
시현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여성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까?”
“아……. 우.”
“……실례하겠습니다.”
시현은 그녀의 팔소매를 걷어보았다.
팔뚝에 멍이 들어 있었다.
“조수.”
“아, 저, 저요?”
“예. 저쪽 파티션 뒤로 가서 이 여성분 몸에 멍이랑 폭행 흔적들, 상처들 좀 촬영해 주세요.”
“네!”
류하리는 시현이 시키는 대로 여성의 상처들을 살펴보았다.
과연, 옷에 가려지는 부위들 여기저기에 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굴에 이미 멍이 들어 있지만 다른 곳은 옷에 가려지는 부위로 때린 걸 보면 한동안은 안 들키게 때리려다가 분을 참지 못해서, 혹은 조절을 못 해서 얼굴도 때려서 멍들게 한 것 같다.
그 끔찍한 폭력의 흔적에 류하리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촬영하고 기록을 남겨 두었다.
* * *
시현은 전화로 외국인 인권단체, 다문화 지원센터, 그리고 여성의 모국 대사관 등에 연락했다.
각 단체에서 사람들이 와서 여성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녀를 인수해 갔다.
“아, 안 돼요. 남편. 화낸다. 무서워요.”
여성은 아직도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두려워했다.
특히 시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위험해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시현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여성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그들이 떠나는 걸 확인했다.
류하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연실색했다.
“이걸 노렸군요. 그럼 선배를 미행시킨 건…….”
“그거야 당연히 이 자리를 피하게 하기 위해서지요. 30분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서부지검까지는 어쨌건 꽤 걸리잖아요? 그동안 여성분과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검사대상이 선배님인 건요?”
“최형림 검사님을 미행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일단 가까우니까요. 지금 당장 출발하기에 가까운 거리여야 그가 부담 없이 출발했을 겁니다. 지방 같으면 안 갈 가능성이 농후하니까요.”
“하지만 정말 저 여성분이 바람을 피웠을 수도 있잖아요? 국적을 얻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고 이혼 후 재혼하는 경우도 많은데 만약 그런 경우면 어쩌려고요?”
“그런 경우는 제가 걱정할 단계가 아니로군요.”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고요?”
“만약 상대가 고객이라면 물론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려 고객의 만족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하지만 저 자는 선을 넘었어요. 돈도 수명도 내지 않고 절 공짜로 부려먹으려 하는 건 그동안 제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고객들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동안 저희 사무소를 정당한 가격으로 이용해 주신 고객 분들을 생각해서도 지나칠 수 없는 처사지요.”
“그러니까 불륜이든 아니든 저 남자는 고객이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다?”
“네. 솔직히 지금도 여기에 쓰는 심력과 시간이 아깝군요. 하지만 사무실을 열어두면 고객이 되지 못할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일종의 비용 같은 거지요.”
“그런데 그 남자가 돌아오면 어쩌려고요?”
“그건 이제부터 경찰의 일이로군요. 하지만 제가 경찰에 밉보여서 경찰들이 절 도와주지 않을 것 같으니…… 저는 빠져있겠습니다. 류 경위님이 마포경찰서에 연락해 주셔서 남자를 잡아갈 준비를 해 주세요.”
“아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류하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현이 경찰들에게 밉보인 것도 사실, 그런 시현의 사무실에서 진상이 소란을 피운다고 경찰이 와서 정리해 줄 것 같지는 않다.
“저도 이용당하는 기분인데요?”
“원래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누구나 서로서로 돕고 이용하고 살아가는 거지요.”
“말이나 못하면.”
“말을 못하면 탐정을 못 합니다. 자, 그럼 슬슬 돌아올 때로군요.”
시현이 경찰을 불러 달라고 할 때였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