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탐정 25시 #4
“그래서 흠. 우선 업무의 범위를 정해 보지요. 뭘 원하십니까?”
“취재죠.”
“언제부터 언제까지? 혹은 어떤 프로젝트를 종료할 때까지인가요?”
“제가 생각날 때마다 오고 싶은데요.”
“그건 곤란합니다. 시현탐정사무소의 요율은…….”
시현이 요금을 설명하려 하자 유정미가 손을 딱 펼쳐서 시현의 말문을 막았다.
“아, 절 고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보다는 음, 그렇지 조수. 마치 셜록홈즈의 왓슨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죄송하지만 이미 왓슨 자리는 찼습니다.”
“엑? 그래요? 말도 안 돼! 당신이 무슨 셜록이라고!?”
“…….”
그럼 너는 무슨 존 왓슨이라고?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상대로 말을 길게 해 봐야 피로만 쌓일 뿐이다.
‘정소라 실장님 집에 쳐들어가고 싶어지는군. 그저 정소라 실장이 정말 은혜를 입히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받은 의뢰치고는 가성비가 너무 안 나오는 것 같다.’
시현이 착잡한 마음에 억눌려 있을 바로 그때!
* * *
전화기가 울렸다.
“예. 시현탐정사무소입니다. 아, 의뢰인이시군요.”
시현은 때마침 찾아온 의뢰 전화를 받았다.
“오…… 그렇군요. 의뢰가 이른 오전부터. 뇌우 속에서 갑작스런 의뢰전화라니 운명이 느껴지네요.”
“…….”
저 여자가 아가리를 다물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시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나마 류하리는 왓슨으로서 매우 훌륭한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의뢰가 들어왔으니 상담을 해야겠군요.”
“어떤 의뢰인가요?”
“불륜조사입니다.”
“아…… 그렇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역시 별로 재미가 없네요. 살인 사건이 최곤데.”
“그건 경찰의 영역이지요. 그리고 최근엔 과학수사가 워낙 뛰어나서 일단 수사가 되면 어지간한 건 다 잡힙니다. 증거가 없어도 범인이 만들어져서 잡히는 판국이니까요.”
“그거 참 재미없는 소리네요.”
유정미는 그리 말하며 외출준비를 하는 시현을 따라왔다.
“……네?”
“취재니까요.”
“후우. 그럼 알겠습니다. 존 왓슨 배역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만 공연을 자주하다보면 더블 캐스팅도 필요하니까. 한 번 맡겨보죠.”
“아, 그래요? 맡겨만 주세요.”
* * *
빗줄기를 뚫고 오전의 서울을 지나는 중, 유정미는 계속 시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사이다패스 사건에 대해서 관심은 있으시죠? 탐정님이 생각하기에 사이다패스는 어떤 자가 범인일 것 같나요?”
“관심이 없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엽기살인인걸요? 게다가 사이다패스가 사람들을 자극해서인지 자기가 사이다패스라면서 따라하는 모방범들도 늘어났고 최근 몇몇 곳에서는 그 살인수법도 따라하는 범죄자가 생겼다고 해요.”
“…….”
시현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분명히 경찰은 흉내범, 특히 영사가 이끄는 녀석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보도하지 않았을 텐데?’
영사가 이끄는 살인마들은 사이다패스와 흡사한 힘으로 단번에 사람을 쳐 죽일 수 있다.
그 끔찍한 상흔은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 그들은 그걸 이용해서 사이다패스와 흡사한 상흔을 시체에 남기면서 여수지역에서 외국인 조직폭력배들을 죽였다.
하지만 경찰은 사이다패스 모방범들이 사이다패스나 그에 관련된 정보를 더 자세히 얻는 것을 꺼려해 사이다패스의 살해방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감추고 있었다.
즉, 살해방법을 모방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그게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그 이전에 경찰에서 정보가 새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찰은 지금 난리가 났다.
그런데 그 관련 정보를…… 이 유정미라는 철딱서니 없고 입도 가벼워서 물에 빠지면 입부터 뜰 것 같은 여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살인 수법까지 모방한 모방범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경찰도 언론도 비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있다니?’
“어머. 갑자기 말수가 적어졌네요. 추리중인가요?”
“단순한 추리소설 매니아는 아닌 것 같군요?”
“아, 절 칭찬하시다니 의외네요.”
“칭찬이라기보다는…….”
이 여자가 추리해서 알아낸 거면 칭찬이 되겠지만 그것보다는 인맥이나 정보망의 대단함에 감탄한 것이다.
칭찬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이렇게 상담자를 직접 만나러 가시나요?”
“상대가 요구하고 또 마침 제가 외출하고 싶어지면요. 물론 이 경우 의뢰를 수임하건 수임하지 않건 출장료를 받습니다.”
“그래요?”
“네. 보통은 출장료를 주더라도 거절하곤 합니다만…….”
유정미가 따라다닌다면 사무실에 오래 있고 싶지 않다.
타자기의 악마도 눈치가 있으니까 이런 여자가 있을 때 타자기를 두들겨 일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건 타자기가 있는 곳에 온 세상만사에 관심이 철철 넘치는 이런 여자가 있는 것도 좋지 않다.
* * *
“남편이 실종되었어요.”
뇌우를 뚫고 도착한 곳은 성동구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단독주택이었다.
의뢰인은 이제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남편의 이름은 김석구. 국성대 미대 조소과 명예 교수이고 유명한 조각가이기도 하지요. 그가 최근 전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실종신고를 내려 했지만 그는 몇 차례나 홀연히 사라졌다 나타난 경험이 있어서 경찰에서는 별일 아닐 거라고 하고 있지요.”
“음.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예.”
“제 출장비는 꽤 비싼데 굳이 전화로 상담하거나 제 사무실에 찾아오지 않으시고 부르신 이유를 묻고 싶군요.”
“우선 그만큼의 보상은 충분히 드릴 수 있고, 그리고 제가 광장공포증과 대인공포증이 있어서요.”
“광장공포증 말입니까?”
“예. 넓은 데에 나가거나 타인들의 시선을 느끼면 불안해져서.”
“알겠습니다. 실례지만 남편분의 사진을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남편분이 평소 가던 곳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시현은 그녀에게서 사진을 받았다.
김석구 교수는 놀랍게도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노인이었다.
* * *
“……와우.”
시현이 상담을 끝마치고 주차장으로 나오자 유정미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래도 상담이 끝날 때까지 숨죽이고 계실 줄은 아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시현은 유정미가 제법 침착하게 고객 앞에서 조용히 있었던 걸 칭찬해 주었다.
사실 그녀가 하는 짓을 보면 고객 앞에서 헛소리 할까 봐 두근두근 했었다.
“그 정도 개념은 있답니다. 하지만 정말 재밌어 보이는 일이군요.”
“재밌어 보인다고요?”
“네. 족히 환갑은 넘어 보이는, 아니, 환갑은 저번 세기에 넘은 것 같은 노인네와 묘령의 젊은 아내라니. 사건의 예감이 드네요. 영감을 마구 자극하는데요?”
“실은 저도 그게 염려되어서 그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굳이 비싼 출장료를 마다하고 이쪽으로 직접 불렀는지 말이지요.”
“당신이 그걸 물어봤을 때는 그녀의 남편이 누군지 몰랐잖아요? 그런데도 의심이 생기던가요?”
“우선 집이 꽤 비싸지요. 성동구에서 이런 주택에 안주인치곤 너무 젊고 보통 탐정에게 출장비를 아끼지 않고 불러들이는 사람들은 파라노이아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파라노이아요?”
“네. 피해망상 말이죠. 우주인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거나, 도청장치가 있다거나, 누군가가 자신을 주위에서 습격한다, 그런 피해망상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광장공포증이나 대인공포증이라고 하면 훌륭한 변명이 되는군요.”
“일단 파라노이아는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뭔지 아십니까?”
“모르죠.”
“추리 소설 등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 저는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 추리과정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쭉쭉 읽다가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을 좋아하죠.”
“…….”
“그런데 추리를 하시는군요. 와 진짜 탐정 같은데요?”
“추리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것뿐이지요. 우선 제가 신경 쓰인다고 하는 건 이 교수의 나이가 지긋한데 경찰이 실종신고를 받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아.”
“나이든 사람의 실종신고를 경찰이 무시할 리가 없지요. 그것도 대학 교수라면 유명인사입니다.”
“그런즉슨?”
“먼저 말씀해 보시죠.”
“아니, 저는 추리 안 해요. 히히. 그냥 운을 떼 봤어요.”
“…….”
“브레인스토밍 같아서 생각 정리하는 데 도움 되지 않나요?”
“네, 퍽이나 도움이 되는군요.”
“그렇죠? 음, 하지만 이거 엄청 재밌네요. 당신 정말 정통파 탐정이군요. 정소라 실장님 말이 맞네요.”
“…….”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왜 경찰은 실종신고를 안 받나요? 혹시 이미 죽은 사람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검색해 보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나오네요.”
“그럼?”
생각도 안 하면서 유정미는 앵무새처럼 시현의 답을 요구했다.
“경찰에게 신고를 안 한 겁니다. 흐음. 저 아내분은 보아하니 원래 국성대 졸업생이군요. 그리고 작품의 모델이기도 했고.”
나이 어린 학생과 결혼한 예술가 교수.
그런 은밀하고 사적인 이야기까지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다.
교수 이름으로 검색한 것만으로 그의 작품, 그가 지금의 아내를 모델로 만든 누드조각상들이 함께 떠올랐다.
“아, 모델이고 제자인가요? 오, 에로틱한 관계네요.”
“…….”
“저도 방송작가라서 모든 걸 좀 작품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술가 기질이지요. 이해해 주세요.”
“네, 이해합니다. 이번 사건은 확실히 재밌어질 가능성이 있군요. 그렇지만 별일 아닐 겁니다.”
“별일 아닐 거라고요?”
“네. 탐정 일이 대부분 그렇지요. 도입부가 근사하다고 해서 뭔가 그럴싸한 일을 기대하지 마세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차를 몰았다.
“우선 작업실부터 갑시다.”
“작업실 말인가요?”
“…….”
“왜요?”
‘왜는. 생각은 딴 데 가 있으면서 계속 내 말에 앵무새처럼 추임새를 넣으니까 그렇지. 뭐, 이 여자는 틀림없이 여러 사람들에게 실례되는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겠지.’
시현은 그리 생각하면서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 * *
김석구 교수의 작업실은 성북구에 위치해 있었다.
산기슭 옛 다세대 주택을 개조해 만든 아틀리에, 그곳에 도착한 시현은 우선 주위를 둘러보고 전기배선에 다가가 전기량 미터기가 돌아가는지 확인해 보았다.
“사람이 있군요.”
“네? 있다고요?”
유정미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확인해 보죠.”
시현은 차에서 집음기를 꺼냈다.
의뢰인에게서 작업실의 디지털 키를 이미 받았지만 그걸로 열고 들어가는 건 아마도 의뢰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일일 것이다.
‘시현탐정사무소가 고객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긴 하지만 고객이 파둔 함정을 알고 밟아줄 이유는 없지.’
시현은 집 근처 길가에 차를 세우고 차의 문을 열고 차량의 높이를 이용해 집음기를 작업실 창문에 겨눴다.
바람소리나 다른 소리들이 들려오지만 필터를 조정하자 사람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야! 짐승처럼! 격렬하게! 으으응! 그렇지!]
“…….”
시현은 한숨을 내쉬고 녹음을 시작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