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탐정 25시 #6
선을 넘는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참, 그리고 이번에 경찰청 홍보과에서 브이로그? 뭐, 그거 찍는다는데 성신아 경위랑 류하리 경위? 그 둘을 밀었어. 내가.”
“네?”
“아, 물론 싫으면 거절해도 되고. 그런데 내가 좀 영상편집이나 촬영에 좀 가락이 있잖아? 그래서 나에게 물어보던데 둘이 참 그림이 좋다고 했지.”
“저, 저야 그렇다 쳐도 류하리 경위는 어떻게 아시고?”
“그야 뭐 경찰대학생 때부터 둘이 아주 인물이 빼어나다고 난리 났었잖아?”
“…….”
경찰대학 때부터 눈여겨봤다는 소리에 성신아는 소름이 돋았다.
‘으, 싫어. 싫지만 상사라서 정말…….’
“어쨌건 성신아 씨. 혹시 이번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쯤에 시간 좀 낼 수 있나? 내가 취미로 사진을 좀 찍는데…….”
“네?”
“아, 이상한 사진 그런 거 아냐. 알잖아. 경찰 홍보용 포스터나 광고 같은 거 내부 콘테스트로 뽑는 거. 거기에 성신아 씨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경찰 정복 입고 찍자구. 그걸로 콘테스트 출품할까 하는데.”
“아, 아뇨. 그게 저…….”
솔직히 너무 들이대는 요구라서 당황했다.
당찬 성격의 성신아도 이런 노골적인 뭘 같이 하자는 제안에 난감해졌다.
너무 거부하면 의식한다고 뭐라고 할 것 같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자니 100%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참 비열한 수법이다. 거절당해도 자신은 아무런 사심이 없었는데 상대가 오히려 예민하다고 우길 수 있는데다가 그게 하필이면 경찰 홍보용 사진 콘테스트 같은 거라니…….
‘난감하다. 뭐라고 하지?’
그런데 그때였다.
최형림 검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아, 네. 전화 받았습니다. 최 검사님. 어쩐 일이시죠?”
[건너편 복도에 있습니다. 지금 곤란한 것 같은데…… 혹시 곤란한 상황이시라면 제가 불렀다고 하고 오세요. 검시관 소견서가 필요한 상황 같군요.]
“아, 네! 검시관 소견서요!? 네네, 지금 가져갑니다.”
성신아는 미소를 지으며 박공헌 경감을 돌아보았다.
“박 경감님. 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응, 그, 그래. 뭐야? 최 검사가 불러?”
“네. 아무래도 사이다패스를 사칭한 사건들이 많아져서 점점 바빠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흐음. 그, 그래. 아, 조심해. 최 검사네 집안에 최근 불화가 좀 있던 것 같더라고. 조카들이 삼촌을 공공장소에서 두들겨 팼다지 뭐야. 최 검사도 언제 폭력적으로 손찌검할지 몰라.”
“아하하하. 설마요.”
성신아는 최형림의 험담을 하는 박공헌 경감에게 미소로 얼버무리고 잽싸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으음. 우연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타이밍이 좋은걸. 최 선배, 이 사람에게…… 마음이 가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역시 참.’
재벌가의 아들이 자신처럼 집안도 별로인 사람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알고 있지만 위기의 순간 정확하게 자신을 구해 주는 최형림의 배려에 성신아는 점점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 * *
류하리는 벽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마포경찰서장, 장하원 총경이 직접 보고서를 읽어보고 있었다.
“으음. 이 녀석 참 미꾸라지 같구만. 잡아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영 감을 못 잡겠네. 스태프 고용은 안하나? 보통 탐정업계면 고용한 사람에게 노동법 위반하다 걸리기 쉬운데.”
“서, 서장님께선 정말 대단하시군요.”
류하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장하원 총경이 현장을 안 뛴 지 꽤 되었을 텐데도 만약 시현이 누군가를 고용하면 탐정들은 십중팔구 노동법 위반하기 쉬우니 노동법 위반 같은 걸로 걸겠다.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이건 참 보통 센스가 아니고선 하기 힘든 발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용한 사람은 없습니다.”
“혼자서 이 많은 일을 한다고? 말도 안 돼. 경험이 풍부하면 모를까 나이도 어리잖아?”
“그, 그러게요?”
“으음. 이거 참. 윗분들의 심기를 생각하면 조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데 류 경위 같은 인재를 여기 묶어둘 순 없고. 어때, 류 경위? 다른 사람들하고 담당을 바꿔줄까?”
“아, 아니요. 그래선 안 됩니다.”
류하리는 시현의 담당에서 자신을 빼주겠다는 서장의 말에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파고들지 못할 거예요. 보통 예리한 놈이 아니거든요.”
“하긴 그렇겠지. 으음. 알겠네. 계속하게.”
장하원 총경은 별다른 성과 없이 근처만 맴도는 류하리의 보고서를 보며 일에 회의를 느끼는 듯했지만…… 더 높으신 분들이 시킨 일을 아예 방치할 수도 없었다.
결국 류하리는 다시 시현의 담당이 될 수 있었다.
‘휴우…… 다행이다. 음? 왜 내가 이걸 다행이라고 여기지?’
류하리는 자신이 시현의 담당이라는 것에 안도하다 깜짝 놀랐다.
‘어?’
생각해 보면 시현은 분명히 범죄를 저지른다. 명백히 과한 행동을 하며 심지어는 타자기의 악마라는 기이한 존재와 힘을 합쳐 사람들의 수명을 빨아먹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류하리는 그를 감싸주는 건 물론, 계속해서 그를 보고 싶어 한다.
‘아니, 보고 싶다고 하니까 이건 좀…… 음.’
류하리는 자신의 감정,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놀라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 젠장.”
고모의 전화였다.
* * *
[하리야! 하리야! 큰일이야!]
“네?”
[아니, 내가 좀 알아봤거든. 네 남자친구 있잖니. 그 검사.]
“……아, 네. 왜요?”
[그 검사가 말야, 글쎄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래. 친척들 사이에서 엄청 사이가 안 좋다던데?]
“네?”
[정말 집안에서 미워하는 자식이래. 거의 사도세자라더라.]
“사도세자요? 왜요?”
류하리는 반문해 보았다.
재벌가 자식들 중에 검사가 될 만큼 공부 잘하는 자식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자식이 검사가 되면 거의 업고 다니지 않을까?
그래서 류하리는 고모가 어디서 이상한 헛소리를 듣고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와 최형림은 진짜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까.
‘그리고 설령 사귀는 사이라 해도 말야, 남자가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조심하라느니 뭐 하는 거 보면 재산만 보고 결혼하려는 것처럼 보이잖아? 아니, 뭐 결혼도 현실이니까 굳이 당사자 둘의 사랑으로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이런 건 나도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상대 집안이나 재산을 넘보면서 사는 것도 구질구질하고 더러운데?’
사귀는 사이라고 대충 운만 띄웠을 뿐인데 벌써 그런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고모의 행동이 너무 심하게 여겨진다.
게다가 어디서 들었는지 알지도 못할 풍문을 가지고 사도세자니 뭐니 벌써부터 단정 짓는 건 좀 너무하지 않는가?
[왜인지는 잘 몰라. 하지만 왜 그 형제들이 패륜을 저질렀잖니.]
“아, 네…….”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하여튼 그러니까 하리 너, 조심해라. 성급하게 결혼하지 말고! 요새 애들이니까 뭐 자지 말라고는 안 하겠는데 피임은 꼭 해야 한다. 알겠지?]
“…….”
류하리는 선을 넘는 고모의 발언에 소름이 다 돋았다.
개인의 사생활을 엄마도 아니라 고모님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다니.
하지만 류하리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고모님이 집안행사 대부분을 관리한 것도 사실이다.
류하리가 학교에 입학하거나 어디 행사에 나가거나 할 때 고모님이 항상 함께 나왔으니까.
즉, 고모님이 진상을 떨건 뭘 하건 엄마나 다름없는 존재라 은혜를 입은 게 있긴 하니 마냥 쳐내기도 애매한 관계다.
[소문이나 분위기니까 정확하진 않으니까 너도 좀 상대를 떠봐. 그럼 끊는다. 교회가야 해서. 오호호호호.]
고모님은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멋대로 끊어버렸다.
“으아. 진짜.”
류하리는 휴대폰이 그만한 크기의 바퀴벌레로 변한 양, 자신의 몸에서 떨어뜨려놓고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아. 내가 못살아. 으음.”
류하리는 전화를 다시 품에 넣고 박진감 팀장에게 달리 시킬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자연스럽게 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사무실에 계시나요?”
[아, 류 경위님. 잠시 1박2일 정도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어떤 일인가요?”
[말하기가 좀 그런데.]
“지금 사무실에 있나요?”
[네. 준비 중입니다.]
“그럼 가 볼게요.”
[네? 오신다고요?]
시현은 류하리가 온다는 말에 당황했다.
“네, 갑니다.”
류하리가 있는 정보 3팀은 비정규 업무들을 담당하는 팀이다.
그래서 위치가 매우 불편하다. 정보 팀들 사이에 꼽사리껴서 캐비닛들로 간신히 칸막이 하고 자리를 만들었는데 일반 기업에서 보면 권고사직을 위해 괴롭히는 자리로 보면 딱 맞을 것이다.
그 자리가 싫어서 류하리는 페이퍼 워크를 해야 할 때는 차라리 야근을 한다. 다른 정보팀 팀원들이 좀 빠져서 자리가 났을 때 후딱 페이퍼워크를 하고 평상시에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나돌아다니기에 시현의 감시는 최고의 명분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시현탐정사무소에 다가가니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까르르 웃는 여자 목소리가 시현탐정사무소에서 들려온다.
류하리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까지 시현탐정사무소에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의뢰인.
그리고 그들은 웃을 일이 별로 없다.
불만족스러운 일이 있으니까, 법이나 이치에 호소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찾아온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뭐지? 묘하게 거슬리는데?’
류하리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약간 포동포동하지만 육감적인 체형에 안경을 쓴 젊은 여성이었다.
“아하하하. 아. 정말 재밌는 이야기였어요. 아하하. 그런데 음. 어? 이 여성분은 누구죠?”
“제 조수입니다.”
“조수요? 아, 이 여자가 당신의 왓슨이라 이거군요? 흐음. 탐정인가요? 아, 아니지. 실례되는 질문을 했네요. 왓슨은 탐정이 아니지.”
“탐정이 아니긴 하지만…….”
류하리는 대뜸 자신의 사적 영역을 뚫고 들어오는 이 여자에게 놀랐다.
뭐랄까. 초면인데 너무 대놓고 들이대면서 자신감이 넘친다.
표정도 밝고 근심걱정과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게 통상적인 의뢰인 같지는 않은데?
“흐음. 미인이네요. 이야. 그림은 괜찮겠는데…… 그렇지만 저보다 예쁘진 않네요.”
“……누구죠?”
류하리는 자신을 뜯어보는 여자를 가리키며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의뢰인입니다. 방송작가 유정미 씨인데…… 절 추리 테마 펜션으로 데려가면서 취재 겸 독립프로를 만들고 싶다고 하는군요.”
“독립프로요?”
“네. 저예산으로 저와 스태프 몇 명이 직접 찍고 편집하는 거지요. 비용은 적게 들이고, 뭐 그만큼 힘들긴 하지만 잘 해서 어디 케이블 방송에라도 팔고 시리즈로 제작할 수 있으면 꽤 짭짤한 수입이 될 거예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살펴보았다.
“잠시 저와 이야기 좀 할까요?”
류하리가 시현에게 손짓했다.
둘은 냉장고 근처로 가서 유정미를 배제하고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