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화천추리산장 #2
“자, 그럼 한류 탐정은 인트로를 촬영해볼까요? 자, 그윽한 눈빛으로 걸어오세요. 그리고 내레이션 큐!”
“내레이션을 직접 해야 하나요? 지금? 걸으면서 녹음하면 바람소리, 숨소리, 기타 주위소리가 다 들어갈 텐데?”
시현이 궁금해서 그렇게 물어보자 유정미가 대답했다.
“입으로 내레이션 하는 건 방송에서 쓸 때 타이밍을 재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내레이션은 후시 녹음도 따로 할 거니까 음향은 걱정하지 마시고. 고!”
시현은 한숨을 내쉬고 시킨 대로 내레이션을 읽기 시작했다.
“탐정이란, 콘크리트 정글의 표범이다. 언제나 나의 인간성을 자극하는 도시의 사건들, 나는 지금 그 사건들을 떠나 휴식을 위해 이곳, 화천 추리산장을 찾아왔다.”
“좋아요! 아주 잘했어요!”
유정미는 시현을 향해 박수를 쳤다.
그 시현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한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콘셉트, 수치심에 즉사할 것 같은 내레이션 대사가 시현을 죽음의 위기로 몰고 간 것이다.
‘난 총칼을 맞아도 안 죽는데! 지금 진심으로 죽겠다!’
그러나 유정미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외모도 좋은데 연기도 어쩜 이렇게 잘할까! 원테이크로 끝내다니! 좋아요! 아주 좋아!”
“…….”
시현은 자신을 칭찬하는 유정미의 말에 더더욱 고통 받았다.
계약하지 말 걸, 타자기의 악마가 뭐라고 해도 계약하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시현은 계약을 최대한 빠르게 와르르르 처리해버림으로서 타자기의 악마를 곤혹스럽게 하려고 했는데 타자기의 악마가 물어오는 계약을 거부한다면야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참아야지. 이보다 더한 것도 견뎠어. 이보다 더 더럽고 치사하고 추악한 것도 참았는데 이제 와서 무너질 수는 없어.’
그런데 그때 펜션 입구 주차장에 다른 차들이 등장했다.
-끼익…….
“와, 여기야? 오지네.”
“들어오는데 엄청 고생했어야!”
대학생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펜션 입구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꺼내둔 방송장비 뒤에 주차해서 차량 트렁크에서 물건을 꺼낼 진로를 막게 되었다.
“아, 근데 누가 주차장에 박스를 쌓아뒀어.”
“이 새꺄, 왜 차를 여기다 댄 거야. 물건들 옮기기 귀찮잖아. 눈깔은 뒀다 국 끓여 먹었냐?”
“동태 눈깔을 해 가지고.”
남자들은 한 남자를 집중적으로 비난했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의 악의 담긴 비난을 재밌는 구경거리인 마냥 웃어대고 있었다.
딱 보니 이 네 명이 한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저 실실 웃으며 마치 머슴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 으, 잘 안보였어. 몰랐지 뭐야.”
그 모습을 보며 류하리는 100% 확신했다.
‘이거네. 이거야.’
추리고 뭐고 필요 없다.
죽일 이유가 차고 넘치는 사람이 여기 있지 않은가.
타자기의 악마가 사건이 일어날 테니 이곳을 가라고 알려주었다면 그 사건은 분명히 이들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다.
‘마, 말려야겠지? 하지만 내가 과연 말린다고 말려질까?’
류하리가 고민을 할 때였다.
“어, 저기 이거 좀 치워주시겠어요?”
가장 위축된 남자는 촬영설비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아, 죄송해요. 치워드릴게요.”
류하리가 촬영장비에 다가가는 그때 유정미가 말을 했다.
“자, 그럼 우리가 촬영하는 동안 조수 씨는 짐들 좀 숙소에 가져다 놔주세요.”
“네? 치워놓는 게 아니라 저걸 다요? 저도 일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은데요?”
“아하하. 당신은 봐봤자 모를 거예요.”
“…….”
모르긴 뭘 몰라?
류하리는 자신을 무시하는 유정미에게 짜증이 났다. 어째 자신을 정말 잡일만 시키고 철저히 부려먹고 배제할 생각인 것 같았다.
“으윽.”
류하리는 짜증났지만 일단 그 말을 따르며 휴대폰으로 주위를 촬영하는 척하고 대학생들도 찍어두었다.
‘타자기의 악마가 주선한 일이야. 틀림없이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사건이 벌어질 거야. 미리 촬영해 두자.’
류하리는 그리 생각하고 박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두 남자가 다가왔다.
“에? 뭐야? 아가씨가 옮기는 거야?”
“도와드릴까요?”
남자들은 여자인 류하리 혼자서 짐을 옮기는 걸 보자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아, 그, 그래주시면 고맙지요.”
류하리는 그들의 친절을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이들과 이야기 할 계기도 필요했고.
류하리는 힐끔 머슴 일 하던 청년 쪽을 바라보았다.
“아, 나도 도울게.”
“아니, 넌 우리 짐 날라야지.”
“그래. 우리 짐 날라. 이 아가씨는 우리가 도울게.”
“어, 그, 그래.”
남자는 자신의 행동을 지시하는 다른 대학생들에게 제대로 말대꾸도 못하고 주눅든 채로 어버버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자, 그럼…….”
남자들이 함께 짐을 들어주어서 쉽게 짐을 숙소까지 옮길 수 있었다.
* * *
펜션의 방들은 테마에 걸맞게 이름이 지어져 있었다.
류하리와 유정미가 지낼 방갈로는 ‘아이린’.
시현과 배준수 촬영감독이 같이 지낼 방갈로는 ‘아르센’.
대학생 커플1이 지낼 곳은 ‘포와로’.
대학생 커플2가 지낼 곳은 ‘셜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의 머슴처럼 부려 먹히는 대학생이 지낼 곳은 ‘콜롬보’였다.
“콜롬보가 뭐죠?”
“아…… 이건 형사 콜롬보네요.”
“형사 콜롬보요?”
“네. 범인이 먼저 범죄를 저지르고 나면 형사 콜롬보가 차례차례 증거를 잡아가면서 추적해오는 특이한 방식의 추리 수사 드라마였죠.”
“그런데 그거 엄청 옛날 드라마 아니에요?”
“아가씨는 젊어 보이는데 보기보다 연식이 좀 있나 보군요? 크크크.”
“…….”
류하리는 그 말을 듣고 벙쪘다.
‘연식? 연식이 있다고? 이 새끼들이 지금 그걸 초면의 여자에게 할 말이냐? 형사 콜롬보는 경찰대학 도서관에 있어서 알고 있는 거라고! 씨…….’
화가 나긴 하지만 이놈들이 짐을 들어줘서 많이 편해진 것도 사실이라 류하리는 그냥 어른답게 웃으면서 참아 넘겼다.
“여, 연식이라니. 저 대학 졸업하고 막 취직했거든요. 여러분들은 어때요?”
“아니, 뭐 저희야.”
“어차피 집안 사업 물려받을 거라.”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자연스럽게 취직 문제를 물어본 걸로 들렸나 보다.
그러니까 이들은 류하리가 ‘나는 어쨌건 취직했는데 너희들은 어떠냐?’라고 물어보자 ‘우린 취직 안 해도 부모님 사업 물려받는다.’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 짐 나르던 사람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아, 친구예요. 친구.”
“네. 우리가 외국 유학 갔다가 돌아올 때 우리 적응하라고 도와준 친구죠.”
‘전혀 대등한 관계로 보이지 않는데 친구라니. 이것들아. 타자기의 악마가 그냥 보냈을 리는 없으니까 너희들 자칫하면 죽어.’
류하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쨌건 짐을 들어다 주긴 했으니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 전화번호 좀.”
“……아, 아뇨. 그건 좀.”
“에이. 그러지 말고. 여기 어떤 곳인지 알잖아요?”
“아니, 잘 모르는데요? 어떤 곳이죠?”
“어? 모르고 왔어요?”
“네. 방송 스태프로 따라온 거라서.”
“아하. 여기는 말이죠. 추리 테마 펜션으로 숙박기간 동안 역할극을 해요.”
“역할극?”
“뭐 일종의 마피아 게임이죠. 여기 주인아저씨가 쓴 소설을 테마로 변형한 건데…….”
“그러니까 그 게임에서 이기려면 우리 서로서로 연락망을 갖춰두는 게 낫지 않나 하고.”
“네?”
류하리는 당황했다.
“마피아 게임 같은 거라면서요? 게임은 게임으로 즐겨야지 굳이 팀을 짜서 편법으로 이길 것까지야?”
“…….”
류하리가 그렇게 말하자 말을 걸어온 대학생들이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인인 류하리의 번호를 따려고 수작을 부린 것인데 류하리가 너무 철벽을 치자 말문이 막힌 것이다.
“으음. 뭐 어쩔 수 없지. 아.”
그때 펜션 중앙의 파고라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게 보였다.
* * *
모든 숙소에서 딱 중간거리에 위치한 파고라, 그 한가운데에는 바비큐 그릴과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식탁 옆에는 멜론만 한 크기의 종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이 펜션의 주인이자 추리소설 작가인 정성봉이 자리를 잡았다.
“아, 여러분. 오늘 저희 화천추리산장에 와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 산장의 주인이자 추리소설작가인 정성봉입니다. 여러분들은 바쁜 일상을 벗어나 휴식을 즐기시면서 잠깐의 여흥으로 활력을 얻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 간단한 게임을 하도록 하지요. 다들 마피아 게임은 알고 계시지요?”
“네.”
“뭐 그 정도야.”
하지만 그때 유정미가 배준수에게 손짓했다.
“분량 뽑아야 하니까 질문해 주세요. 그리고 케이블 TV 시청자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여기서 질문 한 번 해 주면 좋겠지요.”
그러자 배준수가 카메라를 유정미에게 넘기고 질문을 던졌다.
“마피아 게임이 뭡니까?”
“아,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각자 역할을 맡아 수행해 주셔야 합니다. 각자 역할을 맡아서 누구는 범인이 되고 누구는 방어하면서 범인이 여러분 안의 누구인지 찾는 게임입니다. 이걸 제 소설 ‘뱀파이어 나이트’에 맞춰서 어레인지한 버전이 여러분들이 오늘 플레이해야 할 게임입니다.”
“아, 그렇군요.”
소설가인 박성봉이 자신의 소설, ‘뱀파이어 나이트’를 언급했다.
마피아 게임은 콘셉트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자신의 소설 콘셉트를 붙인 것이겠지.
“여기, 여러분의 역할 카드가 있습니다.”
정성봉은 역할카드를 보여주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카드, 진마입니다.”
“진마요?”
“네. 뱀파이어 로드지요. 특수 능력은 1액션 당 한 명씩, 사람을 습격해서 상대가 시민이면 뱀파이어로, 헌터나 신부면 죽일 수 있습니다. 단, 첫 번째 라운드에서는 헌터나 신부를 공격해도 죽일 수 없으니 그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운 좋게 첫 방에 헌터나 신부를 잡아서 게임이 끝나버리는 걸 원하진 않거든요.”
정성봉은 공들여 만들어진 진마 카드를 보여주고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다음은 헌터 카드입니다. 헌터는 1액션 당 한 명씩, 사람을 골라서 그가 뱀파이어인지 아니면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뱀파이어인지 사람인지 말인가요?”
“네. 신부인지 시민인지는 모릅니다.”
정성봉은 그리 말하며 카드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리고 세 번째 특수 신분 카드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1액션 당 한 명씩 사람을 골라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골라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진마의 습격이 오면 습격이 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성봉은 일러스트가 그려진 세 번째 카드를 모두에게 보여준 뒤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카드였다.
“그리고 이게 시민/뱀파이어 카드입니다.”
그것은 양면카드로 앞에는 일반인의 그림이, 뒤에는 피에 굶주린 괴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콰르르릉!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쏴아아아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