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화천추리산장 #10
“………”
류하리는 시현이 기어이 이 펜션에 온 사람들에게서 수명을 갈취하는 걸 보며 말문이 막혔다.
“자 그래서 말인데 당신은 계약하지 않겠습니까?”
시현은 놀랍게도 처음에 계약을 파기했던 김춘석에게도 물어보았다.
“흥. 헛소리. 말했잖아! 나는 수명을 써가면서 이놈들 살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당신은 혼자서 악마… 아 이렇게 부르면 되게 싫어하는데 하여튼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서 희생당할 텐데요.”
“뭐?”
“다른 분들은 저와 계약했으니 무사할 거고 당신 혼자 괜히 남 원망하다가 죽는 것보다 못한 꼴을 겪게 된다 이겁니다.”
“……….”
김춘석은 너무나 자신만만한 시현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 녀석 정말 진심으로 이 상황에서 모두 살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건가?
“당장 몇 분 후면 한 명을 투표로 처형해야 하는데 되게 여유가 넘치네?”
“그런 거야 뭐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시현 탐정사무소는 언제나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저희 사무소의 고객이 되시면, 업계 최고 수준의 고객만족 서비스를 누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젠장. 개소리를….”
김춘석은 혀를 찼다.
* *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죠?”
“현재 상황은 생존자 8명. 이중 신부 하나, 진마 하나. 이렇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진마와 신부 모두 보물 카드로 능력이 강화된 상태고….”
시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현재 상황에서 확실히 진마가 아닌 시민인 사람은 저, 그리고 김춘석, 박동호 씨, 그리고 배준수 씨 이 네 사람이겠군요. 저야 뱀파이어였다가 시민이 되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시현은 일부러 류하리가 신부라는 걸 빼놓았지만, 류하리가 신부라는 걸 감안하면 이미 다섯 명이 안전권이다.
‘싸움질하던 사람들 중에도 진마가 있을 것 같은데. 보통 추리소설들을 보면 뭔가 트릭을 써서 안전 권으로 피했다가….’
류하리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현은 대뜸 방송작가 유정미를 가리켰다.
“그런데 당신이 진마일 겁니다.”
“…네? 무슨 근거로?”
“남학생들끼리 이렇게 싸움질하고 있는 동안 방탈출 게임에 집중해서 보물카드를 빼돌릴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니 촬영감독인 배준수 씨나 저 여학생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해보죠. 배준수 씨는 촬영을 하고 있어서 방탈출 게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했을 거고 여학생들은 남자친구와 자기 일행이 싸우고 있는데 말리고 또 돕느라 정신없었겠죠. 물론 트릭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애매한 트릭 따위 지우고 가볍게 생각하면 진마는 당신입니다.”
“아, 아니….”
뻔뻔하던 유정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다들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단정적으로 이렇다고 주장하며 확고부동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시현의 태도가 얄밉긴 하지만 모두들 시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시현에겐 보물카드도 있다.
“진마가 이번 턴에 운 좋게 공격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뱀파이어가 된 사람들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게임이 기울면 진마 쪽에겐 승기가 없죠. 하지만 안심하세요. 전 진마를 처형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네? 왜요?”
“왜냐면 유정미 씨도 소중한 시현탐정사무소의 고객이기 때문이지요. 어때요? 저희 탐정사무소의 고객만족 서비스. 이정도면 이제 고객감동 서비스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
유정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저항해봐야 소용없겠군요. 네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유정미는 사실상 자신이 진마임을 인정했다.
다만 자기 입으로 확실하게 ‘내가 진마다’라고 공개 안한 것은 카드를 공개했다고 사라져버린 대학생 김용한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자신이 스스로 진마임을 자인하고 나서면 이것도 게임을 파괴하는 행위로 보고 제재를 가할 지도 모른다.
‘그런 걸 보면 이 여자는 까불거리는 것과 달리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구나.’
류하리는 유정미가 겉보기와 달리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그래도 시현에게는 바로 지목당해서 농락당하긴 했지만….
“저도 고객인데, 그것도 돈도 뜯겨 수명도 뜯겨… 아주 전 방위로 다 뜯겼는데 어떻게 제게 고객만족을 선사하실 건가요?”
게임을 제대로 진행하려면 다음 턴에 반드시 진마를 처형시켜야 한다.
즉 유정미를 희생시켜서 다른 이들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정미도 시현탐정사무소의 고객, 그녀를 희생시키면 시현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고객만족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물론 게임에서 승리하면 그걸로 무탈하게 끝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실종된 사람들, 사라진 사람들의 경향을 볼 때 그렇게 쉽게 풀어줄 리가 없다.
게임마스터는 이 게임을 해서 살아남으라고 했지, 이기면 사라졌던 사람들까지 다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시현이 말했다.
“굳이 게임을 할 필요가 없지요. 파괴합시다.”
“네?”
“따라오세요.”
시현은 모두를 데리고 나왔다.
“우선 진마가 투표를 안 하면 게임마스터가 대신 진마를 움직일 테니까 방어는 해야겠지요. 류 경위님?”
“네?”
“…파고라에 가서 방어할 사람들을 골라주세요. 알죠? 누굴 방어해야 할지?”
“네. 그런데 그러면….”
류하리가 신부라는 게 들통 나지 않나?
하지만 시현은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류경위님이 신부라는 건 첫 턴에 들통 났습니다.”
“네?”
“…그런 것도 아나요?”
유정미가 혀를 찼다.
“왜냐면 제가 첫 턴에 행동할 때 신부에게 뭘 해 달라 하는 요구사항 없이 날 공격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 입장에선 저와 함께 다니는 류 경위님을 의심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오히려 류 경위님을 신부로 판정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겁니다.”
첫 턴에서 시현은 자신을 공격해달라고 진마에게 요청했었고 유정미는 그걸 함정이라 보고 그 요청을 씹었다.
그리고 공격한 게 류하리.
즉 첫 턴에 신부를 알아보고 자기를 방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공격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진마 카드를 뽑은 이가 곧 이 사태를 불러온 장본인일 것이다. 그래서 류하리를 배제해서 경찰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통제하는 상황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그것 자체가 시현의 미스디렉션이었다.
시현은 일부러 류하리가 신부인 티를 팍팍 내고 있었던 것이다.
“뭐 흔한 함정이었지요. 참고로 저는 첫 턴부터 유정미 씨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네? 왜요?”
“여기에 오자고 한 사람이 당신이니까요.”
“아.”
시현은 첫 턴에서 뱀파이어인 자신을 공격하라고 진마를 유도했고 정작 방어는 신부인 류하리를 지키게 했으며 류하리가 신부라는 걸 일부러 조금 티냈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황당한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캐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저 대학생들 쪽을 의심하지 않나요? 누가 봐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고 실제로 미지의 존재와 계약해서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사람이 저쪽에 있는데?”
“그런 사람을 마피아 게임에 투입한다고요? 머리에 나 수상합니다 라고 쓰여 있는 사람을요? 실제로 제가 개입해서 흔들지 않았으면 저 김춘석 씨는 바로 처형으로 배제되었을 겁니다.”
“아….”
첫 라운드엔 처형이 없었고 둘째 라운드에서부터 처형이 있으니까 둘째 라운드에 김춘석이 처형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김춘석은 자기 일행에서도, 이쪽에서도 지지도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그래서 저는 김춘석만은 진마가 아닐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죠. 헌터야 뭐… 제가 헌터 인척 하면 튀어나오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즉 당신은 첫 턴에 이미 헌터, 신부, 뱀파이어를 알고 있었군요. 진마는 저를 의심하고.”
“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밖은 여전히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울부짖고 있었다.
시현이 걸어갈 때마다 그 기세는 더더욱 심해지고….
-꽈르르릉!
또다시 관리동에 벼락이 떨어지며 주위 공기를 진동시켰다.
“으악!”
“꺄악!”
사람들이 놀라서 당황했지만 시현은 침착하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깝지만 어쩔 수 없군요.”
시현은 자신의 차의 문짝을 열고 그 채로 농수로로 밀고 갔다.
“어?”
“뭐야.”
모두들 시현이 차를 미는 걸 보며 당혹스러워했다.
저 거대한 차를, 기어를 풀었다고는 해도 너무나 쉽게 민다.
물론 류하리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시현이 보통 인간을 상회하는 신체능력을 보인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명을 보는 능력은 막혔어도 신체능력까지는 막지 못한 것 같아.’
“서, 설마?”
모두가 기겁할 때 시현은 간단히 차량을 농수로로 처박아 버렸다.
쏟아지는 격류가 차를 강타하지만 문이 열려있어서 차량의 실내를 타고 격류가 빠져나간다.
물론 그래도 차는 떠내려가지만 그렇게 떠내려가다가 다리의 잔해에 걸려 멈춰 섰다.
-텅.
-콰아앙!
유실지뢰가 차량에 닿아 터졌지만 물속에서 폭발하는 지뢰로 차량을 찢어발기는 건 불가능하다.
차에 자잘한 구멍이 좀 뚫릴 뿐, 차량은 멀쩡했다.
“자 그럼….”
시현은 대학생들이 타고 온 차량, 그리고 펜션 주인의 차량도 아낌없이 농수로로 밀어 넣고 관리동에서 사다리와 밧줄을 가져와 임시 다리를 만들었다.
처음에 던져 넣은 시현의 차량이 저 앞에서 불발탄, 유실 지뢰를 막아주는 동안 시현은 차량과 사다리, 밧줄을 이용해서 하류 쪽에 간이 다리를 만들었다.
“………….”
모두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니 자, 잠깐만. 대단하긴 한데….”
시현에게 농락당한 대학생들이 분개했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됐잖아? 왜 게임을 한 거야? 애초에?”
“아 여러분. 제가 다년간 이런 놈들을 상대해본 결과, 게임을 하지도 않고 이런 짓을 하면 반드시 훼방을 놓습니다.”
“뭐?”
“갑자기 토네이도가 불거나 이 다리 위로 벼락을 떨어뜨리거나 해서 반드시 훼방을 놓는 다 이겁니다. 게임을 하지도 않고 차려둔 밥상에서 도망치려고 하면 강경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게임에서 압살을 당하면 어떻게 될까요?”
“뭐가?”
“우리는 이미 게임에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겼는데 불필요한 처형으로 괜히 사람 하나 잃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게임 할 건 다했고 이겼으니 이 자리를 피해 줄여서 물러나겠다고 하면 여기서 벼락을 떨구거나 해봤자 추한 발악이 되는 거지요.”
“…그런 걸 상대가 따진단 말야?”
다들 이해가 안됐다.
이런 흉악한 짓을 벌인 존재가 그런 것에 구애받는단 말인가?
“절 믿으세요. 전 이놈들 상대하는 데 전문가입니다. 오직 저만이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요.”
시현은 위태로운 다리에 서서 보란 듯이 장대 하나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