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05화 (105/269)

제105화

데드맨 인 원더랜드 #1

시현과 류하리는 십자로에 서 있었다.

“…….”

“어.”

황토 흙이 그대로 노출된 비포장 도로, 길가에는 소똥이 쌓여있고 콘크리트 전신주가 서 있는 기이한 십자로였다.

안개도 비구름도 사라지고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왜 여기에 있죠?”

류하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그들은 바로 방금 전까지 반전된 화천 추리 테마 펜션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두꺼운 안개가 가득한 강원도의 산길을 비바람을 뚫고 왔는데 도착해보니 비도 없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는 시골길이다.

“아무래도 같은 게임으로 2차전을 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첫 번째 판에서 이길 생각이 가득했을 텐데 용케도 2차전을 추잡하게 이어나갈 생각을 했군요. 이런 경우 보통 두 번째 게임은 더 시시하기 마련인데?”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천댐 캠핑장, 가을 낚시 축제 1996. 10월.’

전신주에는 이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1996년인 것 같군요.”

“네?”

“흠. 무전기로 물어보죠.”

시현은 별 거부감 없이 무전기를 꺼내서 잡았다.

그러나 무전기에서는 답이 없었다.

“흐음. 모르쇠로 일관할 모양이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도록 하지요.”

시현은 혀를 차며 무전기를 품에 넣었다.

“아, 아니 대체. 이건….”

“일단 주위 사람을 찾아보기로 하죠. 1996년에 류 경위님은….”

“전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그렇겠지요. 저도 그때는 태어나지 않았으니까요. 펜션에 있던 인물 중 1996년에 살아있던 사람은 아마도 펜션 주인인 정성봉 씨와 촬영감독 배준수 씨. 둘 뿐일 겁니다.”

“잠깐만요. 진짜로 여기가 1996년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뭐 이런 거 처음 겪는 것도 아니라서.”

“….예?”

“시현탐정사무소의 고객만족 서비스는 시공을 초월할 정도지요. 어쨌건 이 요상한 것에게 고객님들이 고통 받고 있으니 빠르게 해결을 봐야겠군요. 나 참… 이렇게까지 고객서비스에 열심인데 어디 어필을 못하겠단 말이죠. 정말 고객 감동 그 자체가 아닙니까?”

시현은 그리 말하면서 사탕을 꺼내서 류하리에게 건네주었다.

류하리도 하나 받아들었다.

“확실히 지금 여기가 1996년이라면 고객 감동 정도가 아니긴 하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수명 1년씩이라니 너무 싸게 불렀나.”

“……”

“일단 여긴 비포장도로인 것 같으니 주위를 좀 찾아보도록 하지요. 상대도 내게 2차전을 시킬 것 같은데….”

“그런데 배가 고프네요. 식사도 마실 것도 제대로 갖추질 못해서.”

“음. 그럼 가볼까요?”

시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포장 십자로에서 남쪽 방향으로 저 멀리 포장된 길이 보이고 몇 채의 농가주택과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상당히 멀겠네요.”

“걷죠.”

“끄응.”

류하리는 시현을 따라 걸었다.

펜션에서 이상한 존재에게 감금당하다 시피해서 먹은 것도 없으니 기운이 없다.

그 상황에서 시현은 계속해서 주머니에서 사탕과 젤리 등을 꺼내서 류하리에게 나눠주고 자신도 먹는다.

“이것도 좋긴 한데 물이 마시고 싶네요.”

“혹시 현찰이 있습니까?”

“현찰이요?”

“어디….”

시현도 주머니를 뒤적거렸는데 나온 동전이나 지폐들 중에 1996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5만 원권을 주로 가지고 다니는데 이건 여기서는 쓸 수 없겠지요. 그래도 동전 중에는 1996년 이전 게 몇 개 있을 줄 알았는데.”

“카드…도 당연히 안 되겠지요? 여기가 1996년이라면?”

“네. 뭐 만능 교섭기가 있긴 하지만 이걸 쓰는 건 최후의 최후로 미뤄야겠지요.”

“만능 교섭기?”

“이거 말입니다. 이거.”

시현은 권총을 한 정 꺼내어 보여주었다.

분명히 만능 교섭기이긴 하다.

“하지 마요. 미쳤어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명색이 경찰인데 좀 감추려는 의지라도 보여주세요. 아니 대체, 그런 불법 무기는 어디서 구한 거예요?”

“하하하. 진짜 총이 아니라 장난감입니다. 장난감.”

“…제 눈이 옹이구멍으로 보이세요?”

만져보지 않아도 눈으로 보았을 때의 질감, 무게감이 절대로 장난감이 아니다.

아연캐스팅으로 정밀하게, 실총처럼 만들어진 에어소프트 건일 가능성도 있지만 시현이 그런 걸 들고 다닐 리가 없다.

“뭐 장난감인 게 류 경위님 입장에서도 좋지 않습니까?”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 머리에 구멍이 뚫리는 걸 장난감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시현은 경찰의 입장을 내세우면서도 협조적인 류하리의 태도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가을의 시골길을 그렇게 둘이서 걸어간다.

* * *

목적지는 눈에 잡힐 듯 가까워보이는데 정작 걸으면 끝이 없다.

시골길을 걷다 보니 아무래도 심심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류하리는 시현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것은 당신을 데드맨이라 부르더군요.”

“네. 절 부르는 게 맞습니다.”

“그거, 무슨 의미가 있는 이름인가요?”

“절 사로잡고 있는 저주의 이름이지요.”

“저주라고요?”

“그럼 멀쩡한 사람이 이렇게 이상한 것들과 얽히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

류하리는 시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즐기는 것 같던데?’ 라고 말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면 시현이 정말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본의 아니게 이 저주를 받아서 얽히고 있는 거지요. 타인의 수명을 빼앗아서 살아가야 하는 저주.”

“…의외로 순순히 말해주시는 군요.”

“뭐 류경위님이 여기까지 말려들었으니 말이죠.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로 얼버무려봐야 류경위님이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멍청하진 않을 거 아닙니까.”

“고맙네요. 높게 봐주셔서.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사라졌는데 저는 당신과 함께 여기 있는 거죠?”

“아마도 제 조수니까요?”

“조수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류 경위님은 탐정 조수잖아요. 그래서 저도 류 경위님에게는 비용을 청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뭐 급여를 지불하는 건 공무원의 직업윤리에 위배되니까 안주고 있긴 하지만 수명까지 받아가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니겠습니까?”

“의외로군요. 어쨌거나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지금쯤 우리를 여기로 보낸 놈에게 인질로 잡혀있겠지요. 큰일이에요 큰일. 고객님들이 잡혀버렸으니 이거 참,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저로서는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구출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구할 수 있는 건가요?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은데요. 처음 게임에서는 사실상 분명히 당신이 이긴 거지요? 그런데 그걸 뒤엎고 첫 번째 게임에서 희생당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인질로 잡혀가다니. 저는….”

류하리는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정말 그녀가 시현의 조수라서 잡혀가지 않았단 말인가?

“제 조수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아니 그게, 애초에 이런 일에 안 얽히고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 알 수 없는 놈들에게 납치당하는 것 보다는 당신 조수가 되는 게 낫기는 한데.”

“그러게요. 경찰 월급 받고 하기엔 너무 끔찍한 일이지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류하리와 시현은 버스정류장에 당도했다.

* * *

“자 그럼 이제 여기서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 건가요?”

“아마도 이 시간대에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강렬한 사건이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던가 벌어졌을 겁니다. 그걸 해결하는 게 2차전일 겁니다. 그러니 우선 이곳의 사람을 만나서….”

시현은 그리 말하며 버스정류장 앞쪽의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구멍가게 안의 카운터에는 만화책을 보고 있는 고등학생이 한 명 있었다.

까까머리의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은 시현이 들어오자 흠칫 놀라며 보고 있던 만화책을 학습참고서 뒤로 숨겼다가 시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냉장고. 물이랑 음료수가 있네요. 먹을 것도 있고.”

류하리는 그걸 보고 좋아했지만 곧 풀이 죽었다.

캐시리스 시대를 살다 온 입장이라 현찰이 별로 없다.

아니 현찰이 조금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지폐와 동전들은 1996년 이후 발행된 것, 특히 지폐는 그 이후 모습을 리뉴얼했기 때문에 지폐가 있다고 해도 쓸 수가 없다.

“배고프고 목마른데 가게에서 뭘 살 수 없다니. 설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때 시현이 가게를 보고 있던 고등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정성봉 학생?”

“네? 어, 절 아세요?”

“아니 교복에 명찰이 붙어있어서.”

시현은 그리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 고등학생은 바로 펜션 주인이자 추리소설 작가이던 정성봉의 옛 모습인 것이다.

“…….”

“혹시 화장실 좀 쓸 수 있을 까요?”

“화장실이요? 어 뭐… 네.”

정성봉은 반신반의하면서 화장실 키를 건네주었다.

“밖에 나가서 뒤로 돌아가시면 있어요.”

“그렇다는 군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키를 류하리에게 건네주었다.

“네?”

“다녀오세요.”

“아니 제가 언….”

류하리는 그리 말하다가 말없이 키를 받아 쥐었다.

‘젠장. 부끄럽지만… 으음. 뭔가 익숙한 느낌이야.’

류하리는 시현이 자신의 상황, 생리적인 리듬까지 꿰뚫어보는 것에 대해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지금보다 훨씬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사이 같다.

어쩐지 그립고 애틋한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왜 일까?

‘아! 화장실….’

류하리는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 * *

시현과 류하리는 번갈아서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 동안 학생 정성봉은 책을 접어두고 시현과 류하리를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가게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 네. 가게에요.”

정성봉이 전화를 받았다.

“네? 잔치 집에 오라고요? 사이다랑 얼음이요?”

정성봉은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투덜거리며 가게의 냉장고에서 사이다 1.5리터 PET병 세 개와 판매용 얼음을 한 봉 골라서 담았다.

“저 가게 비워야 하니까 나와 주세요. 버스 기다리시는 거면 정류장에서 기다리시면 되니까요.”

“아 그래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류하리에게 가게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류하리가 가게 밖으로 나와서 정성봉을 보니 그는 가게의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해 또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믿어지지가 않는 군요. 정말 정성봉 씨의 어린 시절이라고요? 저게?”

류하리가 당혹스러워했다.

“네. 그런 것 같군요.”

시현은 그리 말하며 코트 주머니에서 500밀리 생수 한 병을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응? 아니 어디서 난 거에요?”

“아까 전에 가게에서 잠깐….”

“미, 미쳤어요?!”

“괜찮습니다. 먼저 드시겠어요?”

“아니, 안돼요. 절대로!”

류하리는 그렇게 말하고 손 사레를 쳤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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