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데드맨 인 원더랜드 #3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이 처음부터 감을 잘 잡고 정밀감식반을 불러서 증거를 확실히 확보했었다면 실족사인지 밀려서 죽은 것인지 알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이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은 엉뚱한 사람에게 죄가 씌워졌고 그래서 시현과 류하리가 굳이 과거로 까지 와서 이 사건을 재조사하게 된 것이리라.
“놀라울 정도로 무능하군요. 아니면 그가 범인일 가능성도….”
경찰이 이정도로 무능하다는 것에 시현은 그런 의심을 했다.
“손톱 상태도 보세요.”
류하리가 지적한 대로 손톱이 뒤집어져 있었다.
“네 밀려서 떨어질 때 상대를 붙잡으려고 했군요.”
“실족사라면 바닥을 짚으려고 했겠지만 누군가에게 밀려서 떨어진 거라면 상대 옷이나 피부를 긁다가 손톱이 뒤집어지죠.”
“손톱 밑에 증거가 잔뜩 있겠는데요?”
경찰대학을 수석 졸업한 류하리와 탐정업계에서 알아주는 수완가인 시현, 이들 둘이 시체를 처음 발견했으니 딱히 정밀 조사 기구를 들일 것도 없이 육안만으로도 초반 상황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체가 유능한 이에 의해서 초동 발견되는 것만으로도 수사에는 어마어마한 진전이 있기 마련, 시현과 류하리는 그 점에서 앞서있었다.
아마 1996년 과거, 시현과 류하리가 오기 전의 사건에서는 그렇지 못해서 증거가 많이 유실되었으리라.
'어 뭐지? 이 사람들? 대단하네?'
정성봉은 시현과 류하리가 사체의 겉모습만 보고도 죽었을 때의 상황을 추리해내는 걸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래의 추리소설가가 지금 눈앞에서 탐정과 엘리트 경찰의 추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흥분되지 않을 수 없다.
“그 그야 그렇지만 우발살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왜죠? 이게 계획살인이라면 목을 부러뜨린 다음에 배수로에 넣을 수도 있잖아요?”
정성봉은 그렇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럼 저렇게 많은 피가 나오지 않죠. 이미 죽인 다음에 배수로에 던져 넣은 거라면 머리에서 피가 이렇게 콸콸 나올 리 없어요.”
“다른 동물의 피라면….”
“살인 현장에 다른 동물의 피로 위장한다? 혈액샘플은 당연히 검사하기 때문에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어요.”
류하리도 성심성의껏 정성봉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하는 건, 과연 여기의 경찰이 무능하다고 할 때 어떤 죄 없는 사람을 대신 잡을까 하는 겁니다.”
“…얼굴도 보지 않은 사람을 무능하다고 단정 지으니까 좀 그러네요.”
“아직 IMF터지기 전의 시대니까요. 1996년의 공무원은 그렇게 인기 있는 직장이 아니었어요.”
IMF가 터지고 기업들이 고용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되면서 한국에서는 공무원의 인기가 점점 오르고 경쟁률도 높아져갔다.
즉 IMF이전의 1996년의 경찰공무원은 그렇게 고급자원이라고 할 수 없다.
“그건 선입견이잖아요? 사람을 너무 그렇게 판단하는 건….”
“그렇지만 경찰이 잘했으면 우리가 여기 왔을 리가 없지요.”
“……”
사실은 류하리도 ‘거 경찰 놈 되게 무능하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새 너무 이 사람에게 물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시현과 함께 다니며 자신이 물드는 게 아닌가 그게 두려워졌다.
그때 시현이 정성봉을 불렀다.
“정성봉 학생?”
“예?”
갑자기 불린 정성봉은 당황했다.
이 두 남녀, 스스로 탐정이라고 하고 명함까지 준 사람인데 그들끼리 하는 말이 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여기 경찰은 누굽니까?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여기 경찰이요? 가끔 오는 김 씨 아저씨인데요.”
정성봉은 이 마을에 거의 유일한 구멍가게 집 자식이라 그런지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네? 아니 그 경찰이니까 당연히 믿을 만한 사람이지요.”
“정말요?”
“으음. 그게 뭐 가게 외상값은 좀 많이 있어요. 하지만 뭐 다들 외상은 어느 정도씩 있고 그렇죠.”
시골 가게에서 동네 사람들 상대로 장사하면 외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경찰이 외상이라니. 류하리는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경찰이 외상이라고요? 아니 뭐 그런 경찰이 다 있….”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니 방금 전에 그녀가 먹었던 빵과 물이 생각났다.
시현이 슬쩍한 거긴 하지만 경찰 주제에 장물을 먹다니….
그런 그녀가 남의 직업윤리에 대해서 뭐라고 할 처지가 될까?
하물며 상대는 외상이고 이쪽은 도둑질인데?
남 말할 처지가 못 되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찰이 잘 못했다면 어떻게 일이 진행될까요?”
“우선 남편부터 의심하고 조사하겠지요. 일단 저 같아도 우선적으로 남편을 조사할 거예요.”
그런 다음에 마을 사람들을 전부 다 탐문해보고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디에 있었는지 조사할 것이다.
마침 칠순 잔치가 있었으니까 마을사람들의 상당수는 알리바이가 명확하다.
“음 상당히 특이한 상황이긴 하네요. 일반적인 수사나 추리와 달리 우리는, 정규수사팀이 오답을 찍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요? 그럼 오답을 피하는 것만으로 정답을 맞힐 수 있는 거잖아요?”
오답을 제외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유익한 이점이다.
하지만 류하리가 그 점을 지적하자 시현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 일이 그렇게 쉽진 않습니다. 제가 경찰이 아니고 여기서는 수사권한이 없기 때문에 수사기관이 일단 뻘 짓하게 내버려 두면 뒤집을 방법이 없어집니다.”
“아.”
“우린 수사기관이 오답을 고를 때까지 손 놓고 구경해선 안 됩니다. 그 전에 선제적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하지요.”
“아….”
수사기관이 오답을 선택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오답이 나오는 걸 보고 정답을 골라야지.’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접근하면 설령 정답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늦는다.
죄 없는 사람이 잡혀가는 걸 두 눈 뜨고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일단 경찰에 신고해야지요?”
“네 다만 이 건물은 잠겨있으니까 함부로 열었다가 증거가 훼손될 수 있으니 이 집에 들어가서 전화로 경찰을 부르는 건 하지 말기로 하지요. 정성봉 학생?”
“네.”
“가까운 다른 곳은?”
“칠순 잔치 벌어지는 곳이 가깝겠죠. 다들 문은 걸어 잠갔을 거고요.”
“흠.”
“시골 마을이라고 문 열어두고 다니진 않아요. 도시 오가는 관광객들이 가끔 서리를 해가기도 하고….”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신고하러 칠순 잔치 쪽으로 가보죠.”
“끄응. 또 걸어야 하는 군요.”
류하리는 투덜거리며 시현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 * *
칠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마을회관에는 이미 술이 몇 순배 돌았는지 다들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아니 이놈 성봉이 너 뭐한 거야?! 얼음 다 녹았겠다 이놈아! 응?!”
정성봉의 부친으로 보이는 남자가 시현과 류하리를 발견하고 놀랐다.
“전화를 좀 쓸 수 있을까요?”
“전화?”
“예.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체?”
그때 정성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 큰일났어요! 월성 무당 아줌마가 죽었어요!”
“!?!”
“뭐?!”
술을 먹고 누워있던 남자 한 명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무슨 소리야 그건?! 우리 마누라가 죽었다고?! 어디야?!”
아마도 그가 월성 무당이라는 여자의 남편이라는 이 씨 아저씨로 보인다.
나이는 50대 후반, 팔다리는 비쩍 마르고 배는 나온 볼품없는 모습이다.
‘원 세상에. 부모 자식 사이래도 믿겠다.’
류하리는 그 노인을 보며 놀라워했다.
월성 무당이라는 여자가 30대 초반쯤으로 보였으니까 나이차가 부모 자식만큼이나 난다.
“이럴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부터 하시지요.”
“잠깐! 그런데 당신들은 뭐야?”
“아 저희 말입니까? 저희는….”
시현은 명함을 꺼냈다.
“이런 사람입니다.”
“? 뭐야? 탐정?”
“탐정? 그런 게 있어?”
1996년엔 아직 탐정업이 불법이던 시절이다. 하지만 흥신소들 상당수는 흥신소라는 이름이 가지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탐정이라는 용어를 쓰곤 했었다.
“네 탐정입니다.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시현 탐정사무소. 불륜조사의 스페셜리스트, 고객이 만족하지 않더라도 만족시켜드립니다.”
“…아.”
“흥신소구만.”
“………”
“그래서 그 탐정이 여긴 어쩐 일로?”
“그게, 말 못할 의뢰인의 조사요청을 받고 왔습니다만. 의뢰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비밀입니다.”
시현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비밀이라니….”
“굉장히 높으신 분의 요청이라 말하면 여러분들도 곤란할 겁니다. 그래도 말할까요?”
“…아니 그건 아니고.”
시현이 은근슬쩍 협박을 하자 마을 사람들이 당황했다.
물론 앞뒤 사정을 알고 있는 류하리 입장에서는 그저 실소만 나올 뿐이다.
‘와 그저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구나. 어쩜 저렇게 거짓말을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그럴싸하게 하지?’
류하리는 뻔뻔스럽게도 노인들 상대로 사교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시현을 보며 기가 막혔다.
그사이에 정성봉은 어디서 시체를 발견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했고 마을 이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표로 전화를 걸어서 경찰을 불렀다.
시현은 마을 회관 안에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고 물어보았다.
“여기에 없는 마을 사람이 있습니까?”
“마을 회관 말고?”
“농협 직원 상식이 있잖아?”
“우체국 직원인 봉팔이도 있고.”
농사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왔다.
즉 거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다.
살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물리적으로 얼마 없다.
“이럴게 아니라 시체를 보러 가봐야 하지 않겠나?”
“그, 그래. 살인 현장으로 가보자고!”
“잠깐만요!”
류하리가 말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정성봉을 앞세워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류하리는 그들을 말리려 했지만 시현이 제지했다.
“잠깐만요. 노인들이 함부로 시체라도 건드리면 초기 환경이 훼손돼요!”
경찰대학에서 종종 가르치는 사례 중엔 이런 게 있다.
시체가 너무 끔찍하고 불쌍해 보인다고 마을 사람들이 동정심에 그만 시체를 꺼내서 상복으로 갈아입히고 염까지 한 사건이 있었다.
덕분에 살인 현장은 쑥대밭이 되고 지문도 막 뒤섞이고 옷의 섬유조각도 검출 못하게 되고….
그런 일이 당시 농촌에서는 비일비재로 일어나곤 했었다.
“뭐 그래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습니까.”
시현은 그리 말하고 칠순 잔칫상의 떡과 고기 등을 일회용 접시에 담았다.
“우리도 천천히 쫓아가지요. 자 이거 들어요.”
“…네?”
“아까 전 빵 반 토막으론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식사를 안 한 지 꽤 되었다.
아까 전에 먹은 빵과 물 덕분에 숨을 돌리긴 했지만 부족한 것도 사실… 그러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비어버린 남의 잔칫상을 넘보다니?
“그야 그렇지만….”
‘와 시간을 거슬러 오른 이 상황에서도 참 태연하구나.’
류하리는 시현의 담담함에 감탄하면서 접시를 받았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