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하베스터 #5
“그런 것 치고는 사기 수법은 꽤 잘되어 있군요.”
시현이 그 점을 지목했다.
“아마 깜빵 들락날락하면서 거기서 배운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렇게까지 수완이 좋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흠. 그래서 말인데….”
“네?”
“제가 여러분들의 채권을 전부 인수하면 어떨까요?”
시현이 피해자들에게 제안했다.
“채권을요?”
“네. 여러분들도 그런 불한당에게서 어떻게 받아낼지 모르는 채권 가지고 속상해 하고 있느니 차라리 좀 할인된 가격으로 제게 팔고 여기서 손을 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아 물론 김대현 그놈이 개인적으로 너무 싫다. 반드시 복수하고 싶다. 그런 분이시라면 그때는 별도로 저와 계약을 해주셔야 겠습니다만.”
“채권은 얼마나….”
“25% 로 계산할 까 합니다.”
그러니까 1억짜리 채권은 2500만원에 사겠다는 건데…. 다들 그 말을 듣고 망설였다.
돈을 25%만 받고 빠질 것인가? 아니면 계속 남아서 받을지 어떨지 모르는 싸움을 해나갈 것인가?
물론 이런 채권은 상대가 파산할 경우 절반도 못 건지는 게 원칙이다.
고의 파산을 일삼는 김대현을 상대로 25%만 건져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너무 조건이 좋아서여서일까? 다들 망설였다.
“정말 25%라고요?”
“네.”
“그럼 금액도 상당할텐데 그런 돈이 있습니까?”
“네. 현금으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시현이 그리 말하고 류하리에게 손짓했다.
‘아, 나도 완전 조수 다 되었군.’
마치 마술쇼의 미녀 조수가 된 기분으로 류하리는 상자를 가져왔다.
종이박스 안에 5만원권 돈다발이 빼곡이 들어있었다.
“헉?”
엄청난 거금을 본 채권자들이 기겁했다.
“어,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저는 결실의 기쁨, 수확의 즐거움을 즐기는 사람이라서요.”
“…….”
“그래서. 하시겠습니까? 채권을 넘겨주시면 제가 알아서 그 김대현이란 친구에게 여러분들의 채권을 거두어 들이겠습니다만?”
“하지요.”
채권자들은 시현의 제안에 응했다.
* * *
채권자들은 돈을 담은 봉투를 품에 안고 시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사무실에는 결국 시현과 류하리만이 남았다.
“수명 계약을 한 사람은 없네요.”
류하리는 채권을 사들이고도 남은 돈다발이 그득한 종이 상자를 살펴보았다.
“그렇군요.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아마 저 사람들은 원형재 씨처럼 그렇게까지 증오와 분노에 먹혀있지 않은 걸 겁니다.”
“저 사람들에겐 현금으로 지급했으면서 왜 원형재 씨에게는 안그랬나요?”
류하리는 그점을 물어보았다.
시현은 원형재에게도 채권을 인수했지만 그 대금을 나중에 주겠다고 하고 원형재를 농장에 보냈다.
‘김대현과 항쟁이 시작되니 위험하다.’
‘안전한 곳에서 피신해 있어라.’
그러면서 시현은 원형재를 농장에 보내어버린 것이다.
“원형재씨와 저들의 차이점이 명확하지 않습니까?”
“분노에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요?”
“네. 다른 사람들은 채권을 25%에 처분하고 그냥 이 일에서 손 떼기로 결심했어요. 그런 사람들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원형재씨는 그러지 못해요. 김대현이 박살나는 꼴을 봐야지만 재활이 가능한 그런 부류의 인간입니다. 그 전에 그 사람에게 채권에 대한 돈을 줘봤자 그냥 놀고 먹으며 소비해버릴게 분명합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겠군요. 하지만 놀라운 걸요? 당신이 사람의 재활까지 신경써줄 줄이야?”
“그게 다 시현 탐정사무소의 고객만족 서비스 아니겠습니까? 이정도 쯤 되면 고객이 감동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 * *
정장 차림의 시현이 나타났다.
“그 채권추심 모드가 아니네요?”
“네 채권 추심해서 받아봤자 지금 이대로는 파멸을 시켰다고 할 수는 없지요.”
“파멸이요?”
“네. 이녀석이 채널 구독자 수가 대충 80만이니까 지금 채권들 다 받아내봤자 이녀석이 스트리밍에서 벌어들인 것으로 충분히 갚을 수 있습니다. 아주 약간의 경제적 타격이 갈 뿐 아닙니까?”
실제로 김대현의 방송에서 보면 멕라렌이나 페라리 같은 고급 스포츠카를 리뷰하는 영상등이 올라와 있었다.
멕라렌이나 페라리만 해도 오늘 시현이 사들인 채권들 전부 갚고도 남을 돈이다.
“음 그건 그렇네요. 아니 그런데 왜 안 갚는 거죠?”
류하리는 순간 바보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워낙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서 굳이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안갚는 사람의 심리를 도무지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류하리 입장에서의 논리 전개는 다음과 같다.
‘스트리머로 살아가려면 평판이 중요하다.’
‘스트리머로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채권을 갚기에 충분하다.’
‘그럼 갚아서 평판을 유지하는 게 좋지 않은가? 그래야 지속적으로 스트리머로 살아갈 수 있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류하리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그야 당연히… 인간쓰레기니까 안갚는 거지요.”
“신랄하군요.”
“어쨌건 험험. 이런 쓰레기에겐 채권 추심 이상의 쓴맛을 보게 해줘야 고객님의 만족을 달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아 참 이거 고객만족은 참 험란한 길이에요.”
“굉장히 즐기는 것 같은데요?”
“제가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아마도… 결실의 기쁨, 수확의 즐거움 때문이겠지요.”
“……….”
류하리는 시현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정말 이남자 말을 들으면 혼백이 나갈 것 같은데 말은 매끄럽고 목소리가 세련되어서 듣기 싫지는 않았다.
‘사이비 종교 차리면 잘하겠네.’
* * *
신림의 밤, 노래방 기구와 현란한 조명이 어우러진 유흥주점에서 한 거구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서경록, 이 일대에 유흥업소 여러 개를 경영하고 있는 지역사업가였다.
물론 유흥업소 여러개를, 신림동 같은 곳에서 동시에 운영하려면 그 나름대로 험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실제로 이 거구의 남자의 목에는 티셔츠로도 감춰지지 않는 문신이 땅콩을 씹을 때마다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경마 경기를 보면서 마른 안주를 질겅질겅 씹고 있다가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끼고 돌아보았다.
“응? 뭐야? 어….”
서경록은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젊은 남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형님. 이 녀석이 형님을 보자고….”
웨이터는 난처해하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들의 보스를 막무가내로 찾아온 녀석을 그들로서는 막지 못하고 안으로 들이고 말았다.
불벼락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만 어찌 된 게 그들로서는 이 기묘한 양복차림의 남자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경록은 대뜸 웨이터의 뒤통수를 딱 쳤다.
“윽?!”
“야 이놈아 저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아, 얼른 모셔.”
“네?”
“모시라고. 자식아. 귀에 방망이 쑤셔 박았냐?”
서경록은 그리 말하고 들어온 젊은 남자에게 인사했다.
“아이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시면 말씀좀 주시고 오시지.”
“하하. 선생님이라니요. 별말씀을… 그런데 전화번호 바꾸셨나보더라고요? 전화해도 안받던데?”
“아 하하 그게. 그게 말이죠. 아시잖습니까. 선생님이랑 최근 윤회장님이랑 있었던 거. 제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긴 하지만 그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윤회장님에게 찍히면 그것도 곤란해서.”
아마도 헥사곤의 윤회장과 시현의 사이가 예사롭지 않게 되자 시현을 차단한 모양이었다.
“차단했다고요?”
“그건 아니고 때마침 전화기를 바꿀 일이 있어서 바꿨습니다. 번호를 바꿨는데 그만 알려드리지 못한 거지요.”
“…….”
서경록의 나이 50대 초반, 일찍 자식을 봤으면 시현과 비슷한 자식을 두고 있을 나이인데도 시현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깍듯하다.
류하리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아이고, 경찰인 나를 조직폭력배가 운영하는 곳에 데려오다니.’
물론 서경록은 조직폭력배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그저 이 지역에서 지역 밀착형 사업을 하고 있는 건실한 사업가일 뿐이다.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선생님?”
“아 별건 아니고요. 혹시 김대현이라고 아십니까?”
“아 그 반달 양아치 새끼?”
그렇게 말하던 서경록이 깜짝 놀라서 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 알죠. 하하하. 그 녀석 요새 여기서 보라매공원까지 길에서 부다다당 하고 엔진음 나면 그 새낍니다 그거. 매일 밤마다 시끄러워 죽겠어요. 언젠가 손 좀 봐줄까 하고 벼르고 있긴한데 그놈이 왜요? 설마 선생님 심기도 건드렸습니까?”
“그 친구를 좀 손볼까 하는 데요.”
“아이고 선생님께서 직접요? 흐흐. 거 말씀만 하시면 제가 그렇잖아도 벼르고 있었는데 말이죠.”
“후후. 그러지 마시죠. 저는 제가 직접 하길 원하니까요. 게다가 너무 저랑 친밀하게 지내시면 윤회장님 보기 껄끄럽지 않나요?”
“아하. 네. 아니 뭐. 전 딱히 선생님 때문에 윤회장님 배신하는 것도 아니고 아시잖습니까. 그냥 제 개인적인 존경심인거.”
“…….”
옆에서 보고 있던 류하리는 실신할 지경이었다.
대체 시현과 이 남자는 무슨 관계인가?
“그럼 조사를 좀 해뒀겠군요. 조사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경록은 신이 나서 자료를 가져왔다.
김대현과 그 친구들 인척 관계, 어디 살고 있는지 주소, 그들의 사업장,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 평소 주차해두는 위치, 평소 주로 주행하는 거리 등등 온갖 세밀한 정보가 잔뜩 쏟아져 들어왔다.
류하리는 그걸 보고 전율했다.
‘와, 조사 세밀한거 봐라. 이정도면 무섭네.’
시현이 왜 여기 오자고 했나 처음엔 이해가 안되었는데 이걸 보니 여기 온 이유가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럼 제가 그 친구 만날테니까 당신이 소개해줬다고 말만 해주세요. 아 그렇지. 지금 제 이름은 이겁니다.”
시현은 테이블에 명함을 한 장 날렸다.
명함이 팍 하고 테이블에 칼날처럼 꽂혔다.
시현이 평소 쓰는 스테인리스 카드가 아니라 정말 종이 명함인데도 칼날처럼 꽂힌 것이다.
“하하. 여전하시군요.”
서경록은 그런 시현의 명함을 뽑아서 살펴보았다.
“마엔싱? 마샹 홀딩스?”
“네. 틀리지 않게 잘 외워주십시오. 아마 곧 김대현에게서 확인차 연락이 올테니까요.”
시현은 김대현이 어떻게 물어볼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해줘야 하는지 서경록에게 자세하게 지시했다.
서경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현이 준비해준 대답들을 암기하고 수첩에 적어서 가슴팍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하하. 고까운 반달새끼 밤새 폭주하면서 시끄럽게 굴어서 짜증났었는데 곧 사라지겠군요. 아 혹시 한 잔 하시겠습니까?”
서경록은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아뇨 바로 가봐야 해서. 차도 끌고 왔고.”
“요새 논알콜 맥주도 괜찮게 나오는데.”
“사양하지요. 그럼.”
시현은 류하리와 함께 유흥주점을 빠져나왔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