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24화 (124/269)

제124화

참칭의 대가 #4

‘수치스러워 해야 할 건 편의주의로 살아가는 놈이 법봉을 휘둘러 정의를 멋대로 참칭하는 거지... 그래서 지금 이런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잖아? 게다가 사이다패스가 예사롭지 않은 위협이라는 건 어린애라도 알겠다. 고법 부장판사라고 무사할 것 같으면 서부지검 부장검사는 왜 죽었겠나?’

최형림은 판사들이 가지는 엘리트 의식과 그에 반비례하는 안일함을 혐오했지만 눈앞의 천용덕 검사앞에서는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죄송합니다. 사이다패스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앞서서 그만.”

“뭐 심정은 이해하겠네. 하지만 우리는 사건을 예방해야지 함정수사로 범인을 잡으려 해선 안 되네. 만약 그랬다가 피해자라도 생기면 그때는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니 말이네. 어차피 박원일 판사 쪽에는 특수 경호팀이 붙었으니까 염려할 거 없네.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치 말게.”

천용덕 검사는 그리 말하고 최형림에게 가보라고 신호했다.

* * *

“…죄송해요.”

성신아는 자신 때문에 혼쭐이 난 최형림을 보며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형림은 오히려 자신이 혼날 뿐, 그녀의 탓을 전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안한 건 성신아였고 최형림은 오히려 회의적이었는데 말이다.

“아닙니다. 제가 그래도 선배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무래도 경찰인 성신아 경위님의 경우는 저희 수사본부에서 제안하기가 좀 까다로운 위치니 말입니다.”

법무부에 위치한 이곳 사이다패스 수사본부에 대해서 경찰은 국가수사본부 형사국 소속의 형사과장이 직접 차출되어 있다.

하지만 국가수사본부의 형사과장은 법무부에 오지 않고 경찰청으로 출근하고 있으며 경찰들은 합동수사본부 외에 독자적으로 사이다 패스를 쫓고 있다.

성신아는 검찰이 주도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정보를 떠다 경찰에게 넘겨주는 일종의 경찰이 심어둔 스파이 같은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다.

“…….”

쉽게 말하면 검찰, 경찰, 법무부, 법원 할 것 없이 전부가 다 따로 놀고 있다.

그 속에서 성신아는 미묘한 위치가 되어 있어서 최형림은 그런 성신아를 보호해주기 위해 일부러 자기 몸을 던진 것이었다.

‘으아… 바, 반하겠다. 아니 이미 반했다. 큭 젠장. 재벌가 남자인데 이렇게 스윗하다니.’

가난한 집안, 불우한 과거를 가진 성신아는 부잣집 자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형림을 처음 보았을 때 재벌가의 자제라는 점에서 동경을 하면서도 그래도 내심 돈 많은 놈은 비인간적이고 안하무인이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최형림이 오히려 자신을 배려해서 스스로에게 먹칠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 * *

공덕동에 위치한 오피스텔, 서부지검에 가까운 이곳은 최형림의 집이었다.

최형림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성신아 경위는 확실히 내 사람이 되었군.’

경찰은 검찰이 주도하는 합동수사본부와 별개로 따로 사이다패스를 잡기 위해 내부에서 팀을 꾸렸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실무자인 경찰들은 자신들 안에서 보고와 지휘가 종결되는 체계를 원할 것이고 그게 또 빠른 의사결정에 도움이 된다.

야전사령관들이 작전재량권을 가지고 현장에서 즉시 판단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치안의 현장, 그 최전선에 있는 경찰이 검찰이나 법원과 달리 팀을 꾸려 사이다패스에 대항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검찰 측에서는 그게 체면 문제로 불거진다는 것이다.

경찰들이 저렇게 독자적으로 팀을 꾸려서 만약 사이다패스가 잡히기라도 하면 합동수사본부를 이끌고 있는 검찰은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경찰들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검찰은 경찰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합동수사본부가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수사지휘권을 가지는 검사는 경찰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지만 경찰에게는 바로 그 검찰에게서 수사권 독립을 이루고 싶다는 염원이 있다.

그러니 검찰로서는 경찰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히 성신아를 포함해서 합동수사본부에 들어온 경찰들을 노골적으로 찬밥 취급한다.

하지만 이때 최형림이 경찰들을 편들어두면 어떨까?

경찰들은 쉽게 포섭될 것이다.

실제로 성신아는 너무나 쉽게 넘어오지 않았는가?

다만 그 경우 최형림의 앞날에 좀 지장이 생긴다.

그렇지 않아도 형사부 검사들은 일은 엄청 많은데 승진은 야박한 자리다.

공안통, 특수통 등 주로 권력자들에게 위협적인 자리여야 승진이 빠르다는 건 세상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최형림은 자신의 앞길에 먹구름이 끼는 걸 마다하지 않고 몸소 형사부에서 구르고 구르기 때문에….

검찰의 실무 팀들, 검찰 수사보좌관들에게 최형림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저 사람은 충분히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몸소 필드를 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재벌가의 자제이지만 정말 참 검사다.’

‘검사들의 귀감. 생긴 것도 잘생겼고 집도 부자인데 인성도 너무 좋다.’

밑의 사람들의 평판은 그렇다.

최형림이 밑의 사람들의 평판을 더 신경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뭐 어차피 내 위로 검사들을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없앨 거니까.’

죽어서 없어질 놈들의 평판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최형림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표정의 남자가 거울에 비춰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이다패스도 요새는 나를 경계하고 있군. 너무 삭막해 보이는 것도 문제가 있나?’

최형림은 엘리베이터를 나와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문에 들어가기 전 그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안에 인기척이 있다.

“으음….”

사이다패스일까?

아니면 또 그 이상한 탐정이 최형림의 동생들을 데리고 피신 와 있을까?

사이다패스일 확률이 높다.

‘디지털 도어락인데 소용이 없나 보군. 역시….’

최형림은 사이다패스의 재주(?)를 눈치 채고 문을 열었다.

* * *

과연 집안에는 사이다패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멋대로 집안의 식료품들을 건드리고 최형림의 액세서리들을 살펴보고 있다가 최형림을 보고 인사했다.

“음 어서와. 그런데 그간 못 보던 시계들이 늘었네? 벌이가 좋으신가봐? 이거 진품이야? 설마 검사 체면에 불법 복제품을 끼고 다니진 않겠지?”

“스폰서에게 받은 겁니다.”

“스폰서? 의외로군. 뭐 대기업 재벌이 앞으로 자신들이 잡혀갈 때를 대비해서 사이좋게 지내자고 막 이거저거 챙겨주나?”

“좀 특별한 스폰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오늘도 무단으로 내 집에 들어온 건가요? 가급적 그런 짓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설마 내가 문 두들기고 당신에게 허락받고 들어오길 바란 거야? 그런 쪽이 더 안좋을텐데? CCTV등에 찍히고 그러면 꼼짝없이 증거가 남잖아?”

“CCTV에 찍히지 않고 들어왔단 말이로군요?”

“뭐 그 정도는 기본이지. 그 정도 능력 없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고 살겠어?”

사이다패스는 그리 말하고 최형림의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꺼내서 뚜껑을 따고 마시다 표정을 찡그렸다.

“윽. 이거 무슨 맛이 이래?”

“이미 입질까지 한 캔을 도로 냉장고에 넣지 마시지요.”

최형림은 맛만 본 음료를 다시 냉장고에 넣는 사이다패스를 제지하고 캔을 받아보았다.

분명히 캔의 입구는 따져있고 반쯤 비어있다.

“그런 걸 마시다니 무슨 취향이야?”

“좋아합니다. 청량함이 잠을 쫓고 정신도 들게 하거든요.”

최형림은 그리 말하고 눈을 감고 캔의 입구를 만져보았다.

“내 침이 묻은 데를 만져보는 거야? 기분 나쁜데?”

사이다패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최형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캔의 입구는 막혀있었다.

열려있지 않다.

최형림은 사이다패스가 반쯤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밀봉되어있는 캔을 다시 냉장고 안에 넣었다.

“아까 전엔 넣지 말라더니만? 그래서. 왜 내가 들어오는 걸 싫어해? 여기 뭐 여자 꼬셔서 데리고 오려고?”

“그런 건 아니고 전번에 형제가… 탐정을 대동하고 온 적이 있어서.”

시현이 최형림의 형제자매들을 데리고 피신해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숙부의 위협을 피해서 온 것이니 숙부에의 위협이 해제된 지금은 그렇게 무단으로 찾아올 일이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다.

만약 누가 찾아왔는데 사이다패스와 최형림이 함께 있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프다.

최형림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앉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사람들이 꽤 흥분하던데. 이 사건은 어떻게 생각해?”

“김석영 오심사건 말인가요?”

사이다패스가 자세한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최형림은 그녀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당신이 원하는 대로 검사는 아니라 판사지만… 해도 나쁘지 않겠지?”

“…….”

“아 실망하는 표정 짓는군? 그렇게나 위에 검사들을 죽이고 승진하고 싶어?”

“아니요. 지금 수사하는 측도 이번 사건이 당신에게 매우 매력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당신이 성급하게 굴지 않고 날 기다린 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대안했는데 좀 감명 받았습니다.”

“뭐야. 뭔가 놀리는 것 같은데?”

“아니요. 정말 말 그대로 감동받은 겁니다. 후후후.”

최형림이 음흉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아주 좋군요.”

“뭐가?”

“사이다패스 당신 덕분에 수사본부에 들어갈 수 있었고… 경찰이나 법원, 검찰 모두 제각각으로 노는 덕분에 일이 매우 진행하기 쉬워졌습니다. 게다가 당신도 비교적 제 말을 잘 들어주고요.”

“뭘 할 생각인데?”

“한동안 쉬었으니 이제 전국을 놀라게 할 생각입니다.”

“아 그래? 그거 좋네. 솔직히 그동안 날 사칭하는 놈들이 있는데도 참고 지내느라 정말 따분했어.”

사이다패스는 의욕을 내기 시작하는 최형림을 보며 덩달아 의욕을 냈다.

“어디 이 나라를 뒤집어 보자고.”

* * *

박원일 서울 고등법원의 형사3부 부장판사는 아내와 불화를 겪고 있었다.

고시 공부 후 판사가 된 그는 원래 자신을 뒷바라지 하던 여자 친구를 버리고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더 좋은 집안의 맞선 자리를 잡아서 한 식품회사 소유주집안의 딸과 결혼했다.

덕분에 그는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서 슈퍼카를 굴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내가 질투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박원일 판사가 유흥업소에 가면 귀신같이 알아내서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탐정들을 고용해서 그의 불륜 흔적을 잡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많은 불륜 증거가 아내에게 넘어가버려서 박원일 판사로서도 아내에게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박원일 판사는 이미 부와 권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맛에 취해버렸다.

돈 약간만 쥐어주면 한창 피어나는 젊은 여자들과 질펀하게 놀아날 수 있는 데 다 늙고 박색한 아내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젊은 시절 고생해서 겨우겨우 부와 권력을 손에 넣었는데 누릴 수 있는 쾌락은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데드맨3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