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26화 (126/269)

제126화

참칭의 대가 #6

이 고급 빌라는 성취가 살던 곳으로 그가 사이다패스에게 추격당할 때 이미 한 번 뚫린 적이 있었다.

다만 성취는 여기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실은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CCTV는?”

천용덕 검사는 검사 보좌수사관들에게 물어보았다.

“역시 부서져있었습니다.”

“역시…?”

“네. 사이다패스는 CCTV에 찍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유령이라고….”

“그런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최 검사!”

천용덕 검사는 최형림을 불렀다.

최형림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용덕 앞에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이건 보통 일이 아니네! 감히 전직 법무부장관을 살해하다니.”

“네.”

“왜 죽였다고 생각하나?”

“여기 선언문이 있습니다.”

“선언문?”

“네. 읽어드릴까요?”

“정신병자의 헛소리를 듣고 싶은 정신은 아니지만 수사에 필요하니 봐야겠지. 이리 주게.”

“알겠습니다.”

최형림은 사이다패스의 선언문을 촬영한 사진 파일을 건네주었다.

* * *

대륙법은 나폴레옹 법전에 기반한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나폴레옹은 임페라토르, 군사 황제다.

그는 시민의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국가의 주인이던 시민을 황제의 신민으로 전락시켰다.

국가가 정의를 독점하고 인간들이 오로지 국체를 위해 종사할 것을 바랐기에 그는 정의를 찬탈하고 그것을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그것이 고스란히 군국주의 일본이, 그리고 한국이 받아들였을 때부터 대한민국의 시민들 또한 정의를 찬탈 당했다.

법이 지정해주는 것이 정의라 믿고 순종하길 강요당해온 것이다.

그러나 판사는 인간이다.

검사 또한 인간이다.

오욕칠정에 더럽혀지고 탐욕에 찌든 이들을 보라.

이 거대한 아파트를 보라.

공무원의 월급을 모아서 이런 거대한 탐욕의 성을 살 수 있다고 믿어지는 가?

결단코 아니다.

이 거대한 성은 그들이 정의를 찬탈한 독선과 오만의 증거다.

이들은 정의를 약탈하고 오만하게도 시민들을 유린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조차 가볍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찬탈의 책임조차지지 않는다.

기소편의주의.

법정편의주의.

온갖 편의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이들이 어찌 감히 정의의 망치를 그리 쉽게 휘두른단 말인가?

그러니 판사와 검사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참칭한 중죄인임을 알고 스스로 겸손해져야 한다.

만약 그들이 겸손을 알지 못한다면….

내 몸소 그들의 가느다란 목뼈에 겸손의 무게를 얹어 주리라.

* * *

“미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아주 제대로 미쳤군. 법조인을 다 죽일 셈인가?”

천용덕은 눈살을 찌푸렸다.

“김석영 사건 때문일 겁니다.”

“그게 전 장관님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런데 상관이 있습니다. 우선 서두현 장관님은… 당시 김석영 사건 때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셨습니다.”

“고작 그 정도 연관으로? 그럼 아예 전 국민 다 죽이지? 모두들 방관자였다던가. 모두들 그를 비난했었다고!”

“그런데 사실 이게 꽤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서두현 전 장관은 연쇄 강간사건으로 여론이 나빠지자 증거라고는 목격자 증언밖에 없는데 사건을 종결시키라고 압력을 넣으신 분이니까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서두현은 여론을 의식해서 김석영 사건을 빠르게 종결시키라고 사법부와 검찰 양측 모두에 좋게 말하면 권고, 나쁘게 말하면 압력을 넣고 있었다.

김석영 사건의 재판은 매우 졸속이었는데 목격자 여성의 증언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일치하지 않았으며 현재 그 목격자 여성은 장기요양병원에 입원해있는 상태다.

조금만 더 침착하게 조사했었다면 그녀의 증언이 법정증거능력이 없음을 모를 리 없다.

여론이 나쁘니까 사건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그냥 다짜고짜 무고한 사람을 교도소에 집어넣었다.

법무부와 법원, 행정부와 사법부가 함께 손을 맞잡고 한 무고한 시민을 파멸시킨 것이다.

“게다가 박원일 판사와는… 다들 알다시피 이너서클에서 긴밀한 관계이시죠. 성취의 성상납 리스트에도 같은 그룹으로 묶여있습니다. 별장 리스트에 들어있는 거 아시죠?”

성취는 서울 근교 골프장의 클럽하우스 내부에 있는 별장을 빌려서 그곳에서 접대부와 VVIP를 모아 화끈한 파티를 벌여주었다.

이때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있었다는 소리니 보통 긴밀한 사이가 아니리라.

실제로 그들은 S대 법대 출신 선후배 사이다.

“그래. 알겠네. 그렇다면 현장 감식 결과는 어떤가? 뭔가 증거가 나온 게 있나?”

“나온 게 없습니다. 방어흔도 없이 한방이었습니다. 서두현 전 장관님보다 훨씬 건장한 이들도 한방이었으니까 당연히 방어흔도 없고 증거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젠장. 이 정신병자가 정말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여기 보안이 엄청날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야?”

“일단 보안 관련자들을 조사 중입니다만 다들 여기 보안시스템은 전자식과 기계식을 혼용해서 해킹 같은 것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가능한 건 강변북로 쪽에서 보안벽을 넘어오는 건데 그게 가능하다면 아마 스포츠클라이밍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자 이상이 되어야 하며 그쪽에도 CCTV가 설치되어 있지요.”

“우리가 유령을 상대한다는 건가?”

천용덕 검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정작 말한 자신도 믿지 않고 있는 게 문제였다.

“현재 걱정되는 건 이미 지금 경호 대상들을 경호하는 것만으로도 필드에서는 곡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약간의 관계만 있는 자라 해도 경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만 해도 경찰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많은 업무 부하가 걸려있다.

그런데 여기서 경호 대상을 더 늘리자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어떤 트릭을 써서 CCTV나 보안이 무력화 되는 것 같나?”

“고출력 레이저 같은 걸로 CCTV를 쏘게 되면 CCTV이미지 센서가 타버립니다.”

“그렇지만 그럼 레이저를 쏘는 순간의 영상은 찍힐 거 아닌가. 그런 것도 없이 망가지다니… 그리고 침입은 어떻게 한 거지?”

“그건 저도 잘….”

최형림이 말꼬리를 흐리자 천용덕 검사는 위장을 부여잡았다.

“으윽…. 속이 다 쓰리는 군. 어?”

천용덕 검사는 자신의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전화기에는 무려 검찰총장의 전화가 와있었다.

“난 죽었군.”

천용덕 검사는 눈살을 찌푸리고 전화를 받았다.

* * *

서두현 전 법무부장관이 살해당하면서 사이다패스 수사본부는 대국민 회견을 가지고 현재까지의 수사 내용을 보고해야 했다.

발표를 맡은 것은 서부지검 형사부 소속의 최형림 검사였다.

최형림은 담담한 어조로 사이다패스가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에 침입해 CCTV를 태워버리고 서두현 전 법무부 장관을 살해했음을 보고했다.

CCTV도 기타 흔적들도, 어떤 증거도 없다는 점을 담담하게 보고하는 최형림은 비통해하면서도 침착한 태도로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최선을 다해 수사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최형림 검사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 *

원래 검찰청 대변인, 그것도 생방송으로 전국에 송출되는 자리에 나가는 대변인은 특수부나 공보부에서 뽑게 되어있다.

검찰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런데 특수부도 아니라 형사부의 일원인 평검사, 최형림이 그 자리에 나간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또 이번 기자회견의 성질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조직의 실패를 사과하고 돌팔매를 맞는 자리.

욕받이로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터넷에서는 오히려 최형림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야. 검사 잘생겼다.’

‘경찰대학 출신이래.’

‘아 우리 아버지가 검찰수사관인데 최형림 검사는 정말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더라.’

‘잘생겼는데 집도 재벌가라더라.’

‘한영그룹 자제인데 검사라고? 장난 하냐? 이러니까 외국인들이 한국 드라마보고 뻥이 너무 하다고 하는 거야.’

‘학창시절에 최형림과 같은 학교였습니다. 조용하지만 매우 성격이 좋고….’

다들 최형림의 외모와 태도, 그리고 평소의 평판에 관심을 보였다.

수수께끼의 살인마, 사이다패스와 그를 뒤쫓는 재벌가 출신 미남검사라는 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지 연일 인터넷 검색어 순위 10위권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 * *

“으아아….”

정작 경찰들은 죽어나가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류하리는 시현탐정사무소에 쳐들어와서 대뜸 소파에 드러누웠다.

“괜찮습니까?”

“저어언혀~ 괜찮지 않아요! 난리 났어요. 난리!”

“그런 것 같군요.”

“지금 사이다패스 목격 신고가 끊이질 않고 있어요! 가뜩이나 경호하느라 인력이 차출되는 판에 사방팔방에서 사이다패스 같은 걸 봤다고 주장하는 신고가… 나 미쳐!”

사이다패스 사건이 전국을 뒤집어 놓으니 경찰들은 덩달아 바빠졌다.

경호대상이 있는 관할 경찰서는 그야말로 죽음의 행군을 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연일 사이다패스 목격정보가 올라와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행정력을 소모해야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경찰들의 행정력은 여름철 전력 예비 분보다 적게 남아있다.

아니 경찰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공무원 조직들은 발전소의 예비전력보다 현저히 낮은 예비율을 가지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굴러갈 정도로 인원을 투입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행정부의 미덕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갑자기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경찰들 모두가 과부하가 걸려버리는 것이다.

“이거 발전소는 한계 이상으로 전력을 뽑아 쓰면 블랙아웃이라도 일으키지… 경찰은 뭐 단체로 과로사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류하리는 과로사를 언급했지만 농담이 아니다.

여성들도 제대로 씻거나 갈아입지 못하고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와서 농땡이를 피우고 계시는 겁니까?”

“농땡이라니요…. 당신을 감시하는 것도 제 업무 중 하나인데요.”

류하리가 그렇게 주장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농땡이 맞다.

“아 그렇군요. 흠. 응?”

시현은 쓴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허공을 바라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에? 왜요?”

“아니 성신아 경위가 이쪽으로 오는 군요.”

“성신아 걔가요? 왜지? 끙 봐서 좋을 일이 없으니 숨어있을게요.”

류하리는 깜짝 놀라서 일단 일어나 시현의 방, 소장실 쪽으로 들어가 숨으려다 멈칫했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성신아가 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제게도 여전히 뭐 그 추적 능력 쓰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어요?”

“네 맹세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이름에 걸고?”

“물론이죠.”

“…….”

시현이 저렇게 말하지만 류하리는 시현의 양심을 믿을 수 없었다.

부모님의 이름이야 뭐 부모랑 사이가 엄청 나쁘면 얼마든지 걸 수 있는 거고.

그래도 그 이상 추궁하기 뭐해서 류하리는 반신반의하면서 시현의 방, 소장실로 숨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 문이 열리고 성신아가 들어왔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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