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28화 (128/269)

제128화

참칭의 대가 #8

“이번엔 또 왜 이래?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막 쓰나보군.”

“정신이 상당히 불안정할 것이라고….”

최형림은 그리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언론사에 선언문이 올라갔나?”

“예. 이번에도 선언문이 유출되었습니다. 아마도 사이다패스 본인이 언론사에게 선언문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걸 추격해서 잡을 수 있겠나?”

“유감스럽게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서 보내어진 것이라서….”

“블록체인… 젠장. 그거 생기고 나서 좋은 꼴을 못 봤다니까.”

천용덕은 분해서 가슴을 텅텅 쳤다.

* * *

검찰들도 경찰들도 사이다패스에게 완전히 유린당해 일방적으로 괴롭힘 당하고 있었다.

증거를 남기지 않고 보안장치를 파괴, 혹은 우회하며 밀실살인을 저지르는 사이다패스의 알 수 없는 살해수단 때문에 수사팀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경호로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언론은 그런 수사팀의 무능을 질타하고 나섰다.

특히 반 씨 가문이 소유한 언론사들은 자신들의 혈족을 잃은 원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일제히 포문을 열어 규탄에 나섰다.

그러나 인터넷 여론은 반대로 호의적이었다.

원래부터 사이다패스는 사람들의 청원을 받고 있었고 이번에 죽은 사람들의 워낙 고관대작, 부잣집 자식이라 일반 서민들은 남의 일로 여기는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살인자가 아무나 막 닥치는 대로 죽여 댔다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고 민심은 금세 흉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표적, 그것도 일반 서민들은 구름 위의 존재처럼 여겨지는 고관대작이나 재벌가 자제만이 노려지자 서민들 대다수는 재밌는 구경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 * *

“으음.”

류하리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이다패스가 어떤 존재인지 안다.

‘과학수사로는 절대로 잡을 수 없어.’

그나마 잡을 가능성이 있다면 함정수사뿐.

그러나 사이다패스는 바로 그 함정수사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이다패스는 표적의 스펙트럼을 넓혀서 함정수사를 힘들게 했다.

사이다패스의 선언문은 그의 정신 상태를 드러내는 수사도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주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선언문을 던져놓음으로서 살인동기를 표명하고 그로 인해서 수사를 혼란에 빠트리고 언론을 자극할 수 있었다.

언론이 자극당해서 들끓어 오르기 시작하면 수사망은 출근시간 신도림역의 승객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이 떠밀려 다니게 된다.

본격적으로 함정수사를 하겠다고 하면 경찰들이 죄다 과로사할 판이다.

경찰들은 이제 사이다패스 목격제보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현재 가장 언론을 뒤흔들고 있는 범죄자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게 제보지만….

제보가 하나 들어올 때마다 다 인력을 출동시키면 모든 경찰들이 과로사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보를 무시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다른 성격의 요청이 들어왔다.

‘내가 사이다패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르니 경호해 달라.’

자신이 사이다패스에게 노려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또 자신이 성취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성취 리스트를 풀었을 때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류하리와 시현은 성취에게서 성취리스트를 받아내고 그것을 해외 서버에서 자동으로 풀리도록 만들어 놓았다.

처음에 류하리가 그 일에 참여할 때는 어떻게든 성취를 다른 이들의 보복에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담보로서 생각했지만 성취가 죽어버린 지금 성취 리스트의 의미는 확 변했다.

그것은 살생부였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는 국정원과 법무부, 그리고 경찰 정보과 등이 일제히 나서서 성취 리스트의 대중 공개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VPN, 딥 웹 , 증권가 찌라시 등에서 성취 리스트는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으며 거기에 자신들이 모욕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가필해 넣은 가짜 리스트들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무를 숨기고 싶으면 숲에 숨기라던가?

일부 가짜 리스트들은 아마도 국정원이나 경찰 정보과 등에서 일부러 만들어서 푸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도 든다.

그렇게 진짜 성취 리스트와 가짜 성취 리스트가 세간에 나돌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사이다패스의 다음목표가 자신이 아닐까 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경찰에 보호 요청을 할 때마다 경찰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이다패스 문제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전국의 모든 경찰들이 계속해서 가혹한 환경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류하리는 이대로 경찰이 말라죽느니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라면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어. 그나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류하리의 머릿속에는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시현에게서 협력을 얻어내지? 내 수명을 걸어야 하나?’

류하리는 외출준비를 하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 * *

“거절합니다.”

시현은 단칼에 잘라 대답했다.

“제 수명을 건다면 요?”

“하하하. 류 경위님의 수명이요?”

시현은 얼굴은 웃지 않으면서 웃는 소리를 냈다.

“으윽. 왠지 화가 나는 데요. 그 태도?”

“애초에 이 계약은 진지하게, 정말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겁니다. 류 경위님이 사이다패스를 잡기 위해서 그렇게 간절한 것 같지는 않군요.”

“아니 간절해요! 얼른 잡고 쉬고 싶다고요. 이대로라면 저도 과로사 하겠어요.”

“그게 진지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럼 경찰을 그만두면 되지 않습니까? 실제로 지금 일선에서는 많이들 그만두고 있다고 하던데?”

안정적인 직업이기에 경찰공무원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 경찰들에게 주어지는 업무부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기에 경찰공무원 말고도 다른 할 게 있는 사람들은 사표를 내고 이 기회에 전직하고 있었다.

류하리는 경찰공무원을 그만두더라도 할 게 많은 사람 아닌가?

시현은 그런 의미에서 물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남은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그만 못 둬요.”

“왜요?”

“저는 먹고 살려고 경찰이 된 게 아니라 진심으로 경찰이 되고 싶어서 경찰대학에 간 거라고요. 경찰이 되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 총을 합법적으로 휴대한다.”

“큭… 크크큭.”

시현은 류하리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요. 진담이니까.”

“아 네. 그, 그래서요?”

“그리고 지금 경찰을 그만두면 생전 못 보던 사람이랑 팔려가듯 결혼해야 하는 장래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기껏 자아실현을 위해 경찰대학까지 들어갔는데 결혼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요!”

“…흐흠 최형림 검사는 어떻습니까? 최근 주가가 미친 듯이 튀어 올랐던데?”

최형림이 검찰청 대변인으로서 포토라인에 선 이후 그의 존재는 종종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잘생기고 부잣집 자식에 검사라는 엘리트 명함까지 있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왜 최 선배 이야기가 여기서 나와요?”

“아니 류 경위님 주위에 그만큼 괜찮은 남자도 없지 않나 해서요.”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류하리는 눈을 감았다.

“으음. 최형림 선배라… 뭐 남자로선 확실히 괜찮겠네요. 하지만 제 이상형이라면….”

류하리는 손뼉을 쳤다.

“집안 배경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좋아요.”

“네?”

“어차피 저는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걸요. 남자 집안이 쓸데없이 과해서 서로서로 눈치보고 끌려 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자 쪽이 아예 고아라던가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배경이야 별 상관없이 사람 당사자가 좋아야겠죠. 똑똑하고 머리도 잘 굴러가고 신체도 강건하고….”

“………”

“음? 왜요? 이상한 이야기 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현은 얼굴이 굳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아… 혹시 제 이야기에 기분 상했나요? 그, 당신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던가?”

“알면 좀 잠시 시간을 주시죠. 바로 물어보지 말고. 저도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아 죄송해요.”

류하리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발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어서 빨리 시현이 감정을 추슬러서 다시 사이다패스 수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게 산책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앉아있으면서 압박을 주는데 감정이 추슬러지겠냐….’

시현은 류하리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걸 보며 내심 피식 웃었다.

그래도 잘라낼 건 잘라내야 했다.

“하여튼 사이다패스는 안 됩니다. 스스로 해결하세요.”

“그,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그럼? 조언이라도 잠깐.”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무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일수록 자기 서비스에 정확한 가격과 자부심을….”

그런데 그때 시현이 멈칫했다.

“왜요?”

“성신아 경위네요.”

“아 또 농땡이 피러 왔나보군요.”

“…….”

“전 농땡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신을 설득해서 사이다패스 문제를 해결하려고….”

“경찰이 탐정에게 그렇게 의존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만큼 지금 상황이 심각한 거지요. 탐정에 의존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그게 더 좋은 게 아닐까요? 뭐 절 레스트레이드 경감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레스트레이드 경감이라면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나오는 무능한 경찰로 탐정에 의존하는 경찰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다.

“알겠습니다. 레스트레이드 경위님.”

“잠깐만요! 경위라뇨!?”

“그야 경위님이잖아요?”

“아니 레스트레이드 경감이라고 하면 소설 속 캐릭터니까 얼마든지 욕해도 돼요. 하지만 경위라면 그건 제 계급이니까 절 욕하는 게 되잖아요?”

“레스트레이드에게도 경위였던 시절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처음부터 경감이었던 건 아니었을 테니?”

시현과 류하리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유로 말씨름을 시작했다.

* * *

그러는 사이 성신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야?! 또 여기서 농땡이 치고 있었어? 류하리?! 마포 경찰서는 한가한가봐? 요즘 같은 상황에 정보경찰을 탐정 감찰에 돌릴 만큼?”

성신아는 그렇게 말하며 응접 테이블에 있는 사탕바구니에 손을 쓱 집어넣더니 사탕을 한 움큼 퍼서 일부는 자신의 핸드백에 넣고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

지금까지 남의 사탕 바구니를 털던 시현이 오히려 사탕 바구니를 털리자 표정이 굳었다.

“너야 말로 농땡이 피러 왔잖아?”

“아니. 나는 서부지검 들렀다가 생각나서 널 만나려고 이쪽에 왔지.”

“날?”

“그래. 방금 막 합동수사본부 회의가 끝났어.”

“사이다패스 전담수사본부 말입니까?”

시현도 궁금해졌는지 성신아에게 물어보았다.

“네.”

“결론은 어떻게 났습니까?”

“들으면 놀랄 걸요. 아차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 경찰도 아닌 당신에게 말할 내용은 아니네요.”

“흠.”

시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어보았다.

“서울 고법판사의 호위를 포기했겠군요?”

“네?”

성신아는 그 순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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