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30화 (130/269)

제130화

참칭의 대가 #10

그런데 지금 그가 아쉬운 게 있어서 탐정인 시현을 찾아왔다.

게다가 이제 와서 기분이 나쁘다고, 이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는 탐정을 찾아 온 게 아니라 시현을 찾아 온 것이기 때문에, 다른 탐정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꿈을 꿨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속삭임이… 내 안에서 생각이 계속해서 날 부추기고 있었소. 그래서 여기 왔지.”

“절 만나고 계약하면 그 속삭임은 사라질 겁니다. 아니면 계약을 거부해도 사라질 겁니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타자기의 악마가 찍은 계약자들은… 시현과 쉽게 계약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그들의 의식, 무의식에서 ‘그것’이 속삭이기 때문이다.

시현이 수명을 넘겨달라는 말을 돌 직구로 던져도 대부분 반신반의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이 정말 기적을 바랄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인 탓도 있지만 타자기의 악마가 그들의 심령을 흔들어 놓은 영향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가는 데 이 사람은 꽤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군. 꽤나 성실한 봉사자겠어.’

시현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소. 그런데 최근 그가 위험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소. 미친 것 같다고 여기겠지만….”

“흠.”

시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너무 작위적이군요.”

“뭐라고 했소?”

타자기 너머의 존재는 계약자를 대지 못하면 시현과의 내기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래서 타자기 너머의 존재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신변을 알려주어 시현에게 그들을 찾아가 계약을 하게 하던가 아니면 그들이 찾아오게 해서 계약을 맺게 하건 했었다.

하지만 그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광고를 보던가 주위사람에게 평판을 듣던가 해서 결과적으로 시현을 찾아왔다.

지금처럼 꿈이나 속삭임처럼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 김길환의 눈은 충혈 되어 있고 몸은 떨리고 있었다.

저 강력한 악마가, 미지의 존재가 그 힘을 약간만 투사한 것만으로도 이 사람은 광인과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평소엔 절대로 이렇게 작위적인 수단을 쓰지 않았을 텐데? 계약자로 삼을 만한 사람이 정말 바닥이 났거나 그게 아니면 이 사람의 소망이 굉장히 위험한 것임에 틀림없겠군.’

시현은 타자기의 악마가 승부수를 걸어왔나 싶어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물어보았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 누굽니까? 설마… 박원일 판사?”

“어, 어떻게 아셨소?”

“…….”

그야 지금 상황에서 시현이 가장 경호하기 싫은 사람이니까.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다년간의 경험과 통찰력 때문이라고 해두죠. 어서 오시죠. 시현 탐정사무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 *

시현은 이미 박원일 판사에게 태그를 박아둔 상태였다.

박원일 판사의 아내가 그의 불륜을 감시해달라고 부탁해서 잠깐 쫓아다녔다.

그때 본 바로는 박원일 판사는 전형적인 고위 판사였다.

학창 시절에 훗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공부에만 쏟아 부은 공부벌레로 근육이 거의 없는 비만 체형에 약간 당뇨기도 있는 모습.

그렇지만 젊은 시절 누리지 못했던 쾌락에 보상심리라도 있는지 심취해 있어서 비아그라 처방까지 받아가며 오입질에 힘쓰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에 충실하면서 또한 자신이 공부로 성취한 것들을 당연시 여기는 전형적인 공부벌레였던 자.

이런 사람에게 과연 수명을 바쳐가면서 까지 은혜를 갚으려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시현은 물어보았다.

“의외로군요. 박원일 판사님이 그렇게 인망이 두텁지 않은 걸로 아는데 정말 당신이 그 판사님을 위해서 간절히 바라고 있단 말입니까?”

시현의 질문에 김길환은 자신의 팔을 걷어보였다.

그의 팔에는 화려한 잉어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잉어 문신에는 손톱으로 긁어서 살을 후벼 파낸 상처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박원일 판사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요? 어째서 지요?”

“부끄럽지만 저는 젊을 때 망나니였습니다.”

“……….”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어머니는 술집 작부였소. 매일같이 두들겨 맞는 게 싫어서 집 밖으로 싸돌아다녔고 누구에게 무시받는 게 싫어서 싸움박질만 했고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면서 금수와 같이 살다가 그만 큰 죄를 짓고 말았지요.”

“어떤 죄였습니까?”

“…애를 죽였습니다.”

“애를요?”

“같이 살던 여자와 낳은 애가 있었지요. 아이가 콜록콜록 기침하고 앓고 있었는데 돈도 없고 관심도 안가고 해서 그냥 돈 벌러 나갔다가 애가 병들어 죽었소.”

그렇게 말하는 김길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끔찍한 죄였지만 당시에는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소. 이 세상은 내게 지옥이니까 내 자식인지 남의 씨인지 모를 어린 것이 세상을 모르고 죽는 게 차라리 자비라고 여겼으니 말이오. 어차피 나는 그렇게 좋은 아비가 못될 거고, 나와 똑같은 삶을 살아갈 아이를 하나 더 만드는 게 오히려 죄라고 여겼으니까.”

“…….”

“그런데 박원일 판사는… 눈물을 흘리며 날 동정해주었소. 아동학대범이라고. 인륜을 저버린 금수라고 모두들 날 손가락질 했을 때 그는 나를 금수로 키운 세상을 대신해서 내게 사과하고 그 바쁜 판사생활 중에도 나를 돌봐주었소. 알고 보니까…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박 판사님은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더군요.”

“의외로군요.”

“나를 위해 다 큰 어른이 눈물을 흘리는 건 처음 있던 일이었소. 물론 처음부터 곱게 본 건 아니었지. 명문대 나온 잘나신 판사님이 나 같은 인간쓰레기를 동정하겠다고 까부는 구나. 부잣집 곳간에서 인심난다더니 여유가 넘치니 나 같은 쓰레기에게 동정심을 베푸시는 구나. 그렇게 비뚤어진 생각으로 거부했소. 하지만 깜빵에서 지내는 동안 그분은 나를 잊지 않고 책을 보내주고 편지를 보내주셨소.”

“………”

“감옥은 외로운 공간이오. 감옥 밖에서는 이 세상 혼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나였는데 감옥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편지 한 통 받는 것만 봐도 배알이 뒤틀리고 외롭고 괴로워서 견디기 힘들었소.”

“판사님이 편지를 보냈습니까?”

“…계절이 쌀쌀해질 때 편지와 내복이 한 벌 왔소. 부끄럽게도 다 큰 어른인데 소리를 내서 엉엉 울었소. 왜냐면 그게 내가 남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었기 때문이오. 부모도 내게 생일선물 같은 걸 챙겨주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생판 남에게 그걸 받았으니….”

“…….”

“감옥에서 나온 후 손을 씻고 남은 생 모두를 어떻게든 크나큰 은혜를 갚고자 노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분은 내 마음의 스승이고 부끄럽지만 나는 그분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걸어 들어갈 생각이오.”

“흠.”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 판사님에게 그런 면모가….”

“지금은 다르오?”

“뭐 대한민국 법원의 구조적인 문제지요.”

“구조적인 문제라니?”

“대한민국 법원에서 일반 법원의 판사에게 주어지는 업무량은 엄청납니다. 한 인간의 영혼을 말살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업무량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란 말이오?”

“일반 법원에서 보통 한 판사에게 주어지는 사건이 한 시간에 한 건 정도 됩니다. 문제는 재판이란 한 시간 안에 결판을 지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양쪽이 제출한 자료, 소명서를 보고 사건을 분석해서 사건을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카운슬러도 한 명당 적어도 1시간은 상담해야 뭔가 윤곽이 잡힐 텐데 판사는 양측의 소명을 다 받아서 1시간 마다 한 건씩 처리해야 하지요. 즉 퇴근해도 계속 일해야 합니다. 노동법의 보호를 못 받는 자리라고 단언할 수 있지요.”

“으음.”

김길환은 당황했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박 판사는 자신을 챙겨주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판사가 고위직이 될수록 일이 줄어들고 권한은 커지고 특권은 늘어납니다.”

“그게….”

“접객업 1달이면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하지요. 법원은 그런 접객업과도 비교가 안 되는 인간성의 바닥입니다. 업무량도 엄청난데 눈앞에서는 온갖 인간 군상들이 싸움박질을 벌이고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갈리고 신념을 잃고 그러다가 승진해서 특권과 부를 얻게 되고 강력한 위계질서를 가진 조직의 일원이 된다면 어떻게 될 까요? 사람이 변합니다.”

“…….”

“지금의 박 판사는 당신이 알던 박 판사가 아닐 겁니다. 그래도 그를 구하고 싶습니까? 자신을 희생해서?”

“물론이오. 왜냐면… 설령 지금의 박 판사가 그 어떤 악한이 되었다 해도 예전의 나보다 더 악당은 아닐 거요.”

“……”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당신이 악마래도 이 목숨과 영혼도 아깝지 않소.”

“영혼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받는 건 수명이지요.”

“수명 말이오?”

“네. 수명 5년 입니다.”

시현은 수명을 평소보다 세게 불렀다.

박원일 판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이다패스와 충돌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김길환 씨는 시현의 요구사항을 듣고 쓴 웃음을 지었다.

“생각한 것 보다는 싸군.”

“…싸다고 생각하십니까?”

시현의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눈앞에 김길환의 수명은 앞으로 2001일… 5년을 빼면 얼마 남는 것도 없다.

“영혼을 원하지 않고 수명만 원한다면 상관없소.”

김길환 씨는 그리 말하고 목에 건 묵주를 소중히 어루만졌다.

“으음.”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드는 군요.”

“네?”

“하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을 하도록 하지요.”

“고맙구려.”

“뭘요. 시현 탐정사무소는 언제나 고객만족을 최대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류하리는 접이식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기뻐하십시오.”

“네?!”

류하리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타자기의 악마는 내가 사이다패스와 격돌하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그, 그럼 사이다패스와 승부하게 되는 건가요?”

“네. 하지만 타자기의 악마가 꽤나 작위적인 방법으로 계약자를 끌고 왔던데… 이번엔 정말 위험할 지도 모르겠군요.”

“위험하다고요?”

류하리는 그 말에 당황했다.

사이다패스를 잡거나 무력화시켜서 경찰들이 이렇게 끌려 다니는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시현이 위험해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비록 잘은 모르지만 이 사람이나 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타자기의 악마에게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류하리는 시현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걱정되었다.

사이다패스를 잡자고 계속해서 시현에게 종용했는데 그게 자신의 욕심 때문에 눈이 멀었던 게 아닐까?

당사자인 시현은 만약 실패하면 죽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저 악마에게 당하게 될 것이다.

“죄,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생각이 짧았네요. 저만 생각하고….”

류하리가 사과하자 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제가 아니라 사이다패스를 불쌍히 여기시지요. 어지간하면 그녀의 소망을 짓밟고 싶지 않았는데 일이 이리된 이상 어쩔 수 없지요.”

“네?”

류하리는 시현이 너무나 당연히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걸 보며 당황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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