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36화 (136/269)

제136화

데드맨VS사이다패스 #6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목숨을 구걸하겠다는 뜻입니까.”

“정확합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게….”

박원일 판사 입장에서는 무슨 질풍노도의 시기에 썼던 시집을 온 세상에 공개당하는 기분이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십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나라의 사법행정이지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초반엔 꽤나 열정적이고 감수성도 풍부하셨던 것 같은데 후반부로 갈수록 정말 감정이 말라가고 드라이해지는 게 느껴집니다. 업무가 너무 과중했겠지요.”

“…초반이 오히려 잘못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사이다패스의 말이 맞습니다. 전 정의를 참칭한 겁니다.”

박원일 판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날 미행해서 알겠지요. 내가….”

“유흥업소에 출입하고 접대부와 2차도 나가고 그랬던 것 말입니까?”

“네.”

“뭐 감수성 터지는 것과 하반신의 욕망은 별개의 문제이지요.”

“그런데 그게 부끄럽단 말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감수성.

그걸로 은혜를 입은 김길환 씨 같은 사람은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는 게 난감하며….

그때와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을 실감하면서 또 난감해졌다.

그런데 시현은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도 미담은 언제나 통합니다. 사이다패스는 여론을 신경 쓰니까요. 여론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선언서 같은 걸 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설사 그런 사람들을 모은다 해도 그걸 어떻게 사이다패스에게 알릴 겁니까?”

“TV죠.”

“네? TV요?”

박원일 판사는 경악했다.

그게 가능한가?

TV라는 게 그렇게 사람이 나가고 싶다고 나가지는 물건이냔 말이다.

시현은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박원일 판사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TV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걸 제가 멋대로 결정할 수는….”

판사에게는 품위를 유지할 의무가 있다.

과연 무엇을 품위라고 말하는 지 명확하게 정해진 바는 없지만 판사가 TV에 나와서 자신의 미담을 상층부의 인가 없이 멋대로 떠벌리고 다니는 것은 품위를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시현이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만약 김석영 씨도 같이 TV프로에 출연한다면 그에게 오심을 사과할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런 짓을 하면….”

박원일 판사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짓을 하면 박원일 판사의 커리어는 끝장난다.

관료 사회를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짓을 하면 판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겠지요? 오심이나 실수가 있었다고 자기가 멋대로 사과를 해서 대한민국 판사들의 명예를 훼손해버리면 추후 판사들의 사회에서 내쳐질 테니까?”

“잘 아는 군요.”

“한국 프로야구 심판이랑 비슷하군요. 오심을 인정하지 않고 심판의 권위를 위해서 억지를 부리는 게 어찌나 똑같은지.”

“…….”

프로야구 심판이랑 대한민국 판사를 같은 선에서 이야기 하다니.

하지만 둘이 닮은 것은 사실이다.

“오심은 발생하는 순간 이미 불명예입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뭉개고 있어봐야 더 더러워질 뿐인데 사과하고 바로 잡는 걸 불명예스럽다고 여기다니.”

“………”

“뭐 판사나 야구심판만 그러는 게 아니긴 하지요? 인지부조화는 모든 인간들의 본능, 아니 본성이라고 할까요? 안심하십시오. 그런 사정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네?”

“사이다패스가 하는 걸 보니 김제철 변호사만 죽을 것 같지 않습니다. 경찰들이 경호를 잘하면 잘할수록 사이다패스의 살해수법도 잔혹해지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겠지요. 그렇게 되고 나면 다른 판사들도 당신이 오심이나 오판을 사죄한다고 해서 적극적인 불이익을 주진 않을 겁니다. 물론 조금 무시는 당하겠지만요.”

박원일 판사는 시현의 말에 기겁했다.

김제철 변호사가 내던져져 살해당한 사건에서도 시현은 덤덤하게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섭군…. 이사람.’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살인사건도 담담하게 바라보는 이 남자에게서 박원일 판사는 공포를 느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남자는 저 살인자와 비슷한, 아니 더 무서운 인물일지도 몰랐다.

그때 냉동 탑차가 성당을 향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 일 시작이군요.”

“네? 벌써요?”

“수백 명 분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니까요.”

“…….”

“열심히 하시지요. 저는 이 명단을 조사해보겠습니다.”

“아니…”

“힘내세요.”

시현은 판사에게 그리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자원봉사자용 숙소와 성당 숙소에서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바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산더미 같은 양파와 감자를 까면서 박원일 판사는 몇 번이고 감자를 떨어뜨렸다.

감자와 양파 모두 껍질을 벗기면 진액이 나와서 미끌미끌해져서 고무장갑으로 잡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장갑을 벗으면 손이 녹아버릴 것 같다.

물은 또 차디차서 고무장갑 너머로도 손가락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런 박 판사 앞에서 김길환 씨가 식재료들을 다듬는 기본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아 네. 음식은 어떻게 배우셨나요?”

“하하하 판사님 말 편하게 하십쇼. 그야 전 그 판사님 덕분에 마음잡고 출소 후 음식 장사를 하면서 요리를 배우고 여기 따뜻한 한 끼 공동체에 기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부끄럽게도 장사가 잘 안되었는데 신부님이랑 사무장님이 이 공동체의 조리장이 되어주지 않겠냐고 하셔서 본격적으로 여기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김길환 씨는 따뜻한 한 끼 공동체의 조리장으로서 식사의 밑손질 작업을 하고 밤에는 야식 업체를 운영하면서 생계비를 벌었다.

그렇게 하면 거의 잠을 길게 잘 수가 없다.

아침, 점심, 저녁 사이의 잠깐잠깐 쪽잠을 자면서 하루 24시간 내내 손에 물을 묻혀야 하는 일이다.

이걸 꾸준히 계속 해왔다니 그 근면함, 그 노동 강도는 정말 믿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전심전령을 다해 박원일 판사를 존경하고 있었다.

“어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내 김지향 씨가 비웃었다.

“유흥업소 가고 오입질이나 하는 사람인데 무슨….”

“험… 험험. 실례지만 가정은 있습니까?”

박원일 판사는 민망해져서 물어보았다.

“가정은… 제 자식도 죽게 내버려둔 애비가 무슨 권한이 있어서 다시 가정을 꾸리겠습니까? 하지만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들을 거둬서 부끄럽지만 입양을 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어? 그럼 저건….”

박원일 판사는 식자재를 다루는 공간 옆에 벽에 액자를 보고 기겁했다.

액자 안에는 헌 내복이 들어있었다.

“…부끄럽지만 이건 판사님이 제게 보내주신 겁니다. 아껴서 잘 입다가 출소한 후에 진공포장해서 액자에 넣어두었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걸 보고 마음을 다잡기로 했거든요.”

“…….”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 김지향 씨가 코웃음 쳤다.

“남이 보면 성자네 성자야.”

“부, 부인.”

다행히 김지향 씨도 자기 집 아닌 곳에서 부부싸움을 할 만큼 막나가는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 그럴 사람이라면 애초에 시현을 고용해서 남편을 지켜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 *

박원일 판사와 그 경호원들이 졸지에 함께 자원봉사를 하고 있을 때 시현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빠져나와서 다른 일을 준비 중이었다.

물론 류하리도 시현을 따라 나와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긴 마찬가지였다.

“뭔가 판사님을 고생시키니까 좀 미안하네요.”

“아니죠. 판사님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니까 판사님도 사실 좋아할 겁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박원일 판사는 익숙지 않은 육체노동에 헐떡이고 있었다.

마른 비만으로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배가 거친 숨에 들썩인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이제 여론전을 본격적으로 벌여야겠군요.”

“어떻게요?”

“제가 매 분기마다 불량 채권을 사들이는 건 보셨지요?”

“네.”

“그때 모은 인력들에게 아주 약간의 도움을 받는 겁니다.”

시현은 인생막장, 아니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량 채권을 사들이고 그들을 파악한다.

그런 이들을 자신이 인수한 사업체등에 박아 넣어서 언제든지 원할 때면 인력을 충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작 탐정사무실은 혼자서도 운영이 가능한 것이다.

“그 약간의 도움이라면?”

“댓글부대가 되어달라는 거지요. 물론 그냥은 아니고…. 이제 막 자원봉사 시작한 걸 가지고 부각시키면 웃기겠지요?”

“그렇겠죠.”

“그래서 김길환 씨와 관련된 미담을 매스컴에 띄워야겠습니다. 후우. 연락하기 너무 싫은데….”

시현은 방송작가 유정미의 연락처를 핸드폰에 띄워놓고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시현조차 저 방송작가 유정미와 연락하는 건 꺼려할 정도인가 보다.

“연락한다고 그 여자가 해줄까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 지금 사이다패스 사건이 핫하잖아요? 100%낚입니다. 게다가 우리 판사님이 젊은 시절에 꽤나 감수성이 들쑥날쑥한 인간이라서 피해자들이나 피고들 많이 챙겨줬었더군요. 그들을 모아서 그 미담을 부각하는 기획이라면 방송하면 이래저래 인터넷에서 난리가 날 수밖에 없어요. 사이다패스를 옹호하던 사람들을 공격하기에 아주 좋은 소재가 될 테니까요.”

인터넷 여론은 사이다패스를 옹호하는 측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반대하는 측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송을 만든다면?

방송의 인기는 폭발할 게 틀림없다.

게다가 방송작가 입장에서는 이미 섭외 다 끝내고 기획도 잡아둔 걸 던져주는 거니 낚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판사의 미담이라… 웃기네요. 뒷바라지 하던 여친은 내팽개친 인간이?”

“뭐 인간은 속물이면서 또 자아도취하기 쉬운 생물이니까요. 인간의 감수성이라는 건 그래서 믿으면 안돼요. 감수성 넘치는 놈이 성욕에 져서 섹슈얼 해러스먼트 같은 걸 저지르기도 하거든요.”

“당신은 정말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군요.”

“아니죠. 저야 말로 진짜 인간을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걸었다.

과연… 유정미 방송작가는 즉각 낚였다.

[단타로 치기 아주 좋은 기획이네요. 하죠. 합시다!]

“대신 저도 방송에 대해서 수익 지분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섭외를 제가 다 했고 기획도 제가 잡아두었으니 그 정도 이익은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 물론 드려야죠.]

유정미는 시현의 기획이 마음에 들었는지 돈과 지분을 달라는 시현의 요구조건에도 응했다.

“보셨죠?”

시현은 유정미가 그대로 낚이는 걸 보여주며 류하리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피해자인 당사자의 용서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석영씨 말이에요.”

데드맨3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