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장수를 잡으려면… #3
“뭐 사이다패스 때문에 고생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난국에 탱킹을 잘했으니까 잘나가겠죠! 인물 괜찮고 집안 좋고, 실제로 위기 상황에서 수습을 잘했으니까. 저도 덕분에 덕 좀 보고요! 크윽…. 그런데 그렇게 자주 봤는데 정작 왜 류하리에게 관심을 보이냔 말이에요!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아뇨 그런 건….”
“그렇죠? 역시 부모 때문이라니까. 젠장.”
시현은 그 외에도 최형림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성신아는 울고 웃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성신아 경위님은 다른 남자들도 관심을 많이 보였을 텐데….”
“아하하하하. 아니 뭐 동기나 선후배들이 찝쩍거리긴 하죠. 상사들도 그렇고.”
“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플러팅을 해야 의미가 있지 관심 없는 사람이 플러팅 하면 짜증만 난다고요.”
“…….”
“뭐 당신도 보아하니 오르지도 못할 나무 보다가 실연당한 것 같은데 실연 동기네요. 마셔요 마셔.”
“실연이랄 것까지야.”
“또 그렇게 자기부정을… 뭐 하긴 아직 그 꼴을 못 봐서 그렇죠?”
“…….”
* * *
그래도 시현은 이래저래 성신아의 주사를 잘 받아주면서 최형림이 어떻게 지내는지, 검찰청이나 법무부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간접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신아는 택시를 태워서 보내기까지 했다.
“후우. 재밌는 아가씨네.”
시현은 성신아를 택시에 태워보내고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최형림 검사는 상당히 유능한데. 너무 지나치게 유능해.’
게다가 신경 쓰이는 건 최형림이 류하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 전부터 접근했었지. 남자친구 행세를 하면서 류하리의 집안 어른들이 간섭하는 걸 차단해주었다.’
그때 타다닥 하고 타자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신경 쓰이십니까?]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당신은 그녀를 위해서 영혼까지 건 도박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이미 당신이 알던 그녀가 아닙니다. 억울하겠군요.]
“신경써주는 척 하는 군. 쓸데없이 종이랑 잉크 낭비하지 마. 혹시 누가 보게 될 거 치지도 말고. 세절해버린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다 혀를 찼다.
“아니 세절은 해야지.”
[잠깐만, 아직 종이에 여백이 많이….]
“됐어.”
시현은 종이를 빼서 세절기에 쓱 넣어버리고 탐정사무소의 불을 껐다.
* * *
다음날 시현은 다른 탐정과 흥신소들의 부탁으로 불륜 사건 조사에 나섰다.
낮 시간에 불륜을 벌이는 사람들은 보통 교외 근처의 모텔들이라서 서울 바깥, 산이나 강 쪽에 위치한 모텔들을 돌아야 했다.
“도심 쪽이 좋은데… 뭐 어쩔 수 없나. 요새는 점점 일반적인 일거리들이 줄어드는 느낌이야. 서&정에게 하청 받는 신세가 되는 건 싫은데.”
시현은 여전히 일거리가 많긴 하지만 탐정업계 전반적으로는 서&정 같이 케이블TV광고도 때리고 방송도 타는 대형 업체에서 일을 쓸어가고 있었다.
‘나는 괜찮지만 다들 힘들겠군.’
그런데 그때 전화가 왔다.
류하리에게서였다.
“네.”
[아 시현 씨. 지금 어디에요?]
“나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사무실에 있어요?]
“흠. 왜요? 찾아오시게요?”
[네. 이야기 할게 좀 있어서.]
“알겠습니다. 대충 일 정리하고 그때쯤 들어가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 * *
류하리는 시현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금요일 저녁에 최형림 선배랑 보기로 했어요.”
“흠. 그렇습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히 건드려서 긁어 부스럼 만드나 모르겠네요.”
시현은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말해두었다.
류하리가 최형림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그 때문이겠지만 이 경우 류하리가 최형림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줘야 할 것이다.
괜히 류하리가 의심하는 티를 냈다가 최형림을 경계하게 하지 않겠느냐?
그런 의미에서 시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마도 최형림 씨는 이미 나나 류하리를 경계하고 있겠지만.’
시현은 그런 생각은 말하지 않았다.
“저도 어지간하면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제게 보자고 한걸요. 게다가 당신을 언급하던데요?”
“저를요?”
“네. 당신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흐음.”
시현은 혀를 찼다.
설마 최형림 쪽에서 그렇게 나오다니….
“그래서 어쨌건 사회적으로 제 선배기도 하고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고 하니까 궁금해가지고… 거절하지 못했네요.”
“알겠습니다. 어디서 보기로 했습니까?”
“장소는 인사동이네요.”
“네. 그럼.”
“혹시 미행하실 건가요?”
“아뇨. 그럴 필요는…. 그 동네는 미행하기엔 좀 까다로운 곳입니다.”
시현은 말을 흐렸다.
* * *
“이봐요. 탐정씨! 미행하죠! 미행!”
시현은 미행을 안 하겠다고 했는데 성신아는 대뜸 시현의 사무실을 찾아와 그렇게 말했다.
“…….”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요?”
“에이 알면서. 조금 있으면 류하리랑 최선배랑 데이트 할 거에요. 데이트. 응? 서로서로 눈 마주치다가 나중에는 호텔로 들어갈 지 어떻게 알아요?”
“…….”
시현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다 큰 어른 둘인데 뭐 알아서 하겠지요.”
“어휴. 태연한척 하지 말고. 류하리에게 관심 있잖아요? 안 그래요?”
“미행해서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그들을 막거나 위자료라도 청구하게요?”
“뭐 그런 건 아니고 호텔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나도 당신도 마음정리가 쉽게 될 거 아니에요.”
“다년간의 불륜조사 경험으로 보건대 미행까지 할 정도면 절대로 쉽게 마음정리가 안됩니다.”
애초에 보통 집착이 아니니까 미행을 하지.
사람의 마음에 깊은 어둠이 깃들어야 미행이란 강경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당신은 좀 재미없는 사람이군요? 고지식하게. 그래가지고 흥신소 일해서 먹고 살겠어?”
“제가 이래봬도 프로중의 프로거든요. 고객님께 보이는 업무상의 모습과 일상의 모습이 다른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일할 때는 재밌는 인물이라는 건가요? 보통은 일할 때 고지식하고 오프 때 재밌어야지요. 그걸 반대로 하다니…”
“뭐 만약 두 사람의 감시를 원하신다면 정식으로 의뢰하시지요.”
“윽, 그건 좀 곤란한데요. 돈이 없어요. 그리고 미혼 경찰인 내가 탐정을 쓰면… 욕먹어요.”
경찰도 부부간의 문제에는 탐정을 써도 된다.
다만 성신아는 미혼이고 특히 시현은 그냥 탐정이 아니라 경찰들에게 미운털 박힌 탐정이라서 함부로 의뢰를 줄 수 없다.
아니 무엇보다도 성신아에게는 시현을 고용할 돈도 없었다.
“애초에 미혼 여성이 배우자도 약혼자도 연인도 아닌 상대를 미행하는 것 자체가…. 게다가 일 바쁘지 않으십니까? 사이다패스가 잠적했어도 그래도 일거리는 여전히 많으실 텐데요.”
“뭐 일이 없는 건 아닌데. 저 쯤 되면 업무보고로 할 만한 일들은 스스로 찾아서 잘 하는 편이라.”
“유능하시군요.”
“….아 젠장. 알겠어요. 그럼 데이트하죠. 데이트.”
“저와 말입니까? 장소는 인사동으로?”
“네. 아하하하하.”
“하… 아. 음 네 알겠습니다. 계속 귀찮게 하시려는 모양이군요. 마침 한가하니까 가시죠.”
시현은 그리 말하고 차 키를 챙겼다.
* * *
“그런데 전부터 생각했는데 이거 외제차지요?”
“네. 어쩌다보니까.”
“비싸지 않아요? 유지비라던가? 사무실에 파리 날리는 것 같던데 카푸어 되면 곤란할텐데요?”
“……….”
성신아는 시현의 사무실이 텅 비어있는 것 만 봐서 그런지 시현이 먹고 살기 힘든 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걱정 안 해주셔도 될 정도로는 법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나저나 약속장소가 인사동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말했던가요?”
“류하리 경위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거 안됐다.”
성신아가 혀를 차며 시현을 동정했다.
“네? 왜요?”
“아니 자기가 썸남 만나는 거 알려주는 거, 오르지도 못할 나무 쳐다보지 말라고 미리 언질 주는 거 아녜요. 너는 나랑 수준이 안 맞으니 포기해라. 들이대지 마라. 뭐 그런 의미 아닌가요?”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요?”
“최형림 선배는 내게는 아무 말 없었죠. 그럼 나는 가망이 있는 걸 지도?”
“양다리 걸치려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오 반격이 매서운 걸요.”
“뭐 반격이랄 것까지야.”
“저도 이제 와서 선배랑 뭐 잘해볼 거라는 기대는 없어요. 아니 뭐랄까. 매너 좋고 이래저래 사람이 잘나가니까 자꾸 기대하는 게 없지는 않은데 그건 좀 망상의 영역이고.”
“망상의 영역이라고요?”
“왜 복권을 사면 현실적으로는 맞을 확률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망상의 나래를 펼치잖아요. 그런 거죠 뭐. 복권은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돈이 필요하지만 최형림 선배의 경우는 돈도 안 드니까 경제적이에요. 오히려 커피도 사고 먹을 것도 사주고 돈을 버는 걸요.”
“큭.”
시현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
“뭐가 웃겨요?”
“아뇨. 솔직하고 재밌는 분이군요.”
“….뭐 그렇게까지야. 그나저나 서울 시내에 어떻게 주차할 건가요?”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할 겁니다.”
“서울 시내라 주차비 많이 나올 텐데요. 그냥 택시타고 오는 게 낫지 않았어요?”
“택시 타고 나오려면 큰길까지 걸어와야 하거나 콜을 불러야 하는데 그 시간이 아까워서요.”
“아 하기야. 기껏 외제차 굴리는 데 차고에 세워두기만 하면 아깝겠네요? 감가상각도 매 순간순간 엄청 될 텐데. 게다가 이렇게 저처럼 미녀도 옆에 태울 수 있고.”
“………”
“왜요?”
“아니. 미녀 맞으십니다.”
시현은 말을 말았다.
* * *
인사동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류하리와 최형림은 그 거리 골목 안쪽에 한 작은 가게에서 만났다.
원 테이블 다이닝 레스토랑이라고 해야 하나. 테이블 딱 하나만 두고 조촐하게 예약손님을 받아 운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이런데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좋은데요.”
류하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쩐 일로 절 뵙자고 하셨죠? 선배님?”
“일단 식사부터 하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최형림은 그리 말하고 주문을 했다.
“요새 바쁘지 않으세요?”
“바쁜 건 피차일반이 아닙니까?”
사이다패스 사건은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그것은 사이다패스가 인심을 잃어서 생긴 일이다.
사이다패스의 꼬리조차 잡지 못한 경찰과 검찰은 둘 다 나란히 체면을 구겼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하신 건가요?”
“다름이 아니라 사이다패스를 무력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방송, 그 방송의 기획에 놀랍게도 비 방송인인 인물이 끼어있더군요.”
“아.”
“시현이라는 탐정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시현 탐정, 류 경위님께서 전담 마크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네, 그렇죠.”
“그런데 경찰 상부에는 그 사실이 보고되지 않았더군요. 마치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