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장수를 잡으려면… #5
“아 물론 이건 어느 정도 평소부터 관계가 좋아야 하니까 성신아 경위님은 절대 들키면 안 됩니다.”
“저는 사이가 나쁘다고요?”
성신아가 반발했지만 그녀는 곧 자신이 반사적으로 반발했음을 실토했다.
“아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니까 홧김에 반발했어요. 음. 확실히 걸리지 않는 게 좋죠. 저는… 아니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대체 미행을 들켜도 예쁘게 봐줄만한 사이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배우자들끼리도 미행하면 좀 그렇지 않나?
하지만 시현은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성신아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성 경위님은 이거 드시고 집에 가서 쉬시지요. 집은 혼자서 들어가실 수 있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류하리에게 당당하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아니, 나 원 참.”
성신아는 시현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먹으면서 걸어갔다.
“뭐 알아서 잘 해봐요. 미행하다 걸렸다고 변태취급 받지 말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시현은 그렇게 성신아를 배웅하고 류하리에게 다가갔다.
화려한 도시의 가로등 아래 혼자 서서 생각에 잠겨있는 류하리에게 다가가면서 그는 문득 류하리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 * *
그날은 비가 와서 물살이 많이 불어난 날이었다.
아직 어린 날의 시현은 강둑을 따라 걷고 있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처량한 날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늦게, 중학생 때 시설에 맡겨진 시현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과 융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야말로 지옥 같은 나날들이었다.
중학생 때까지는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나던 그가 고아원에 왔으니 다른 아이들보다 높은 학업성취도와 얌전한 생활 태도는 다른 아이들에게 미운털 박히기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게 린치 당하던 시현은 그날도 다른 아이들에게 책가방을 훼손당해서 어떻게든 수습하고 오느라 늦게 귀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강둑 저 너머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시골 강둑의 상류 쪽에 넓은 개활지가 있어서 그곳에 캠핑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캠핑장에서 물놀이를 하던 아이 한 명이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기겁했다.
여기서 더 떠내려가면 뒤에는 거친 여울이 있다.
여기서 건져내지 않으면 아이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한 시현은 강둑에서 뛰어들었다.
하지만 물에 뛰어든 순간 시현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무, 물이 너무 차!’
수온이 너무 차다. 게다가 물살도 빠르다.
시현은 어떻게든 아이의 고무튜브를 잡고 그 아이와 함께 강가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강폭이 좁아지며 생겨나는 빠른 물살 때문에 강 중심으로 계속 밀려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도 함께 떠내려 갈 판이다.
그때 누군가가 또 강으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시현은 별 생각 없이 허우적거리면서 그 누군가를 붙잡았다.
* * *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시현 자신도 물을 먹고 응급조치를 받고 있었다.
어지간한 아역 탤런트 배우보다도 예뻐 보이는 소녀가 그에게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깨어났구나! 괜찮아?”
“으음….”
시현은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인공호흡을 한 소녀를 보며 당황했다.
하지만 소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물기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게 아닌가?
“이야. 애들 구하려다가 너까지 떠내려갈 뻔했어. 그거 참 멍청한 짓이었네.”
“…멍청한 짓이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하 받아 마땅한 짓이지. 내가 치하해줄게.”
그렇게 말하는 류하리의 반대쪽 팔이 덜렁거리는 게 보였다.
“너, 팔이….”
“부러졌어. 아 괜찮아. 흔한 일이니까.”
“뭐?”
“너 때문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
그때 위험해 보이는 인물들이 강가로 몰려왔다. 선글라스를 쓴 건장한 남자들과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 영사가 다가온 것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 네. 제가 아이를 구하려고 무리하게 뛰어들었는데 이 아이가 절 구해줬어요.”
“……”
시현은 자신을 오히려 구조자로 바꾼 소녀의 발언에 놀랐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구급차를 부를까요?”
영사가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류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실금 정도 간 것 같아요. 별거 아니겠죠.”
“하지만 아가씨, 국가대표 선발전이 얼마 안 남았는데….”
“헉?”
그 이야기를 듣던 시현이 깜짝 놀랐다.
국가대표 선발전? 그런데 나가는 여자애가 지금 팔이 부러졌다고?
운동선수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부상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그제야 시현은 왜 이 소녀가 자신을 오히려 생명의 은인으로 바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 아저씨들 딱 봐도 그냥 경호원은 아니야. 뭔가 질 나쁜 사람들? 그런데 내가 이 여자애의 팔을 부러뜨렸다고 하면 나에게 보복하거나 나쁘게 볼 지도 모르지. 날 은인으로 바꿔놓으면 책임 추궁을 안 당하니까….’
시현은 소녀의 배려심에 놀랐다.
“자 나는 류하리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시현.”
“시현? 특이한 성씨네. 주소나 연락처는 어떻게 돼? 휴대폰은 없어?”
“…저기 고아원.”
“아.”
류하리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 그럼 아참….”
류하리는 팔이 하나 부러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끙 옷이 젖어서 잘 안 되네. 팔도 하나 밖에 못쓰고. 아 찾았다.”
그녀는 젤리 봉투를 하나 꺼내서 시현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거… 선물이야.”
“응?”
“당 떨어졌지? 피로 회복에 좋다고. 이거.”
“………”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어….”
시현은 자신에게 단언하듯 말하는 류하리를 보며 당황했다.
* * *
그리고 그 후 고아원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영사와 다른 양복 떡대들이 고아원에 왔고 시현은 개인 짐들을 싸들고 그 차에 올라탔다.
“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는?”
“네가 구해준 아가씨의 부친께서 네 후견인이 되어주겠다고 하셨다. 우리 사장님은 은혜를 아는 분이시지.”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아가씨에게 구조 받은 건데요. 아가씨를 구한 건 제가 아니에요.”
“흠. 아가씨는 네가 물속에서 머리를 부딪쳐서 기억이 혼미할 거라고 했지.”
“네?”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개뼉다구가 아가씨의 팔을 부러뜨려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못나가게 했다면 네 목숨이 위험하니까. 아가씨 나름의 기지를 발휘한 거겠지. 그러니 닥치고 있어라. 드럼통 타고 용궁 구경 가고 싶지 않으면.”
“……….”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게 되었군. 시현이라고 했지?”
“네.”
“나는 영사다. 이제부터 네 스승이 될 사람이지.”
“스승이요?”
“그래. 우리 사장님이 은혜를 아는 분이긴 하지만 또 사업가라서, 괜히 애 새끼 하나 그냥 돈 들여서 후원하는 게 아니거든. 입안의 혀처럼 충성할 놈을 뽑고 싶은 거지. 필요하면 대신 미운 놈 찔러주고 깜빵도 가고 그럴 놈 말이다.”
“…….”
“내가 만들어주마. 덤으로 충성심도 그 몸에 새겨주지.”
영사는 그리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 * *
“아 미안해. 미안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지?”
류하리는 지쳐서 허덕이고 있는 시현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팔에 삼각건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현은 안타까워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 때문에 국가대표 선발전에 못나가셨다고….”
“아, 아니야. 이건 그냥. 엄살이야. 엄살.”
“네?”
“아무래도 지금의 내가 시합에 나가는 건 공정하지 않으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건?”
“나는 초능력자인데 열심히 한 사람들이랑 같은 무대에서 경쟁하면 다른 선수들에게 미안하잖아? 그래서 이번 부상을 핑계로 은퇴하려고. 그런데 내가 그냥 은퇴해버리면 네가 너무 죄책감을 가질까봐 말이야.”
‘뭐지?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나?’
시현은 순간 류하리 아가씨에게 불경한 생각을 품었다.
“여튼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말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야. 알겠지?”
그 말을 들은 시현은 집의 복도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상장과 트로피들이 걸려있었다.
다 류하리의 상장들이다.
‘이런 상장들을 따서 장식해둘 정도인데… 올림픽도 헛된 꿈이 아닐 진데도 아가씨는 날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안심시키려고 이런 황당한 소리까지 하는 구나.’
시현은 그런 류하리에게 감동했다.
“…아가씨는 정말 엉뚱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이로군요.”
“그리고 너는 건실하고 고지식하지?”
“네?”
“우린 좋은 페어가 될 수 있겠어. 그게 있지 실은 내가 탐정이 되려고 하는데?”
“탐정이요? 뜬금없이?”
“뜬금없기는…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건데. 어쨌건 내가 지금 조수를 모집하고 있거든? 고지식하고 건실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
“어때?”
“그럼 물론 제가 입후보해야지요.”
“그래. 약속이다. 내가 탐정이고 네가 조수야. 알겠지? 내가 기발한 짓을 하면 네가 상식인 선에서 태클을 걸라고.”
“하하하. 그러지요. 그거.”
* * *
“하지만 설마 미행을 할 줄이야. 정말 상식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로군요. 당신은?”
류하리는 시현을 보며 배시시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스토커로 고소했을 지도 몰라요. 뭐 최형림 선배를 만난다고 했으니까 걱정하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류하리는 그렇게 말하다 시현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아니요. 당신에게 상식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감개가 무량해서요.”
“뭘 그렇게까지?”
류하리는 시현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가실까요? 도중까진 태워다드리죠.”
시현은 자동차 키를 빙글 손가락에 끼워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 * *
“의외로군. 빠르게 꼬셔서 어떻게 해보려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들이 밀어서 되겠어? 데드맨이 와버렸잖아?”
안국역 근처, 고층건물의 옥상.
미카엘이 난간 위에 서서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시현과 류하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최형림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녀는 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시현 탐정에게서 귀띔 정도는 들었으니 그렇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괜히 강하게 들이대 봤자 성사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은근하게 내가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전달하면 됩니다.”
“그래서 연애 문제로 방향을 선회해서 그녀의 의심을 지웠나?”
“연애 문제가 되면 탐정이 그녀에게 귀띔한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시현, 그도 연애문제에서는 그렇게 이득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게 적극적인 공세로 나오지는 않겠지요.”
최형림은 영사에게서 시현과 류하리의 관계를 들었다.
류하리가 본래 데드맨, 하지만 그녀는 실패해서 죽었고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 악마들과 계약을 맺고 시현이 데드맨이 되었다면….
시현은 류하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이다.
‘만약 류하리를 내 손에 넣는다면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시현은 내가 사이다패스를 이용해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걸 알더라도 오히려 내 야망을 위해 협력하겠지. 류하리를 손에 넣으면 덤으로 데드맨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최형림이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류하리를 손에 넣는 게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군. 뭐 그래야 보람이 있겠지.’
그리 생각한 최형림은 고개를 돌렸다.
“왜? 시현이 류하리에게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궁금하지 않나?”
“아니요. 더 볼 것 없습니다. 너무 상대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면 오히려 제 운신에 문제가 생기지요. 궁금하더라도 적당히 인내할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흠. 기묘한 연적이로군. 재밌어.”
미카엘은 시현을 바라보던 손 망원경으로 최형림을 바라보았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