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54화 (154/269)

제154화

층간 파라노이아 #4

‘사실은 그래서 필요하다면 내가 도청장비를 심을 생각이었다만… 설마 진짜 도청당하고 있었다니. 일이 기묘하게 돌아가는 군.’

시현은 한숨을 내쉬고 계약서를 꺼냈다.

“아무래도 이 이후로는 진짜 본격적으로 계약을 맺어야겠군요.”

“네?”

“저희 시현 탐정 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고객이 아니신 분에겐 서비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의 규모를 봐야 비용을 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규모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구두계약만으로 작업했습니다만 이제 일의 규모가 대충 짐작이 가는 군요. 계약을 하실까요?”

“계약을 하면 정말 제 편에서 싸워주실 건가요?”

“네. 물론 원하는 범위까지입니다만.”

시현은 윤영기 씨에게 계약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 * *

한편 아랫집 사람의 광증의 피해자인 이기찬 씨는 오래간만에 시현 탐정 사무소에서 푹 잘 수 있었다.

싸구려 접이식 간이 침대지만 그 어떤 호사스러운 호텔 침대보다도 편안함이 느껴졌다.

남의 집도 아닌 사무실이라 그러면 안 되는 데 말이다.

“아, 시현 씨! 오늘은 또 무슨… 응?”

젊은 여성 한 명이 들어오다가 깜짝 놀랐다.

“…아. 저는 그, 여기 탐정 분께 수임한 계약자입니다.”

“계약자시라고요?”

“네. 아가씨는….”

“저는 어, 여기 조수에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 전화기를 들어 탐정과 통화했다.

“음, 다 끝났으니까 자택에서 뵙자고 하네요.”

“네?”

이기찬 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 끝났다니요?”

“상황 종료라고요.”

“상황 종료?”

그게 말이 되나?

이기찬 씨는 아랫집 사람의 광기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여 없애면 모를까 그런 광인을 단시간에 사람의 말을 듣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오라고 하니 안갈 수도 없는 일, 무엇보다도 이 아가씨와 여기 사무실에 있을 수 없다.

“아, 알겠습니다.”

이기찬 씨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 * *

산을 바라보고 있는 낡은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에서 탐정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오시는 걸 확인하고 방금 계단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탐정의 눈이 어째 금색으로 빛나는 것 같아보였다.

“네? 그게 무슨….”

“사건은 종료되었습니다.”

“네?!”

“윤영기 씨가 부동산에 집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이사 갈 겁니다.”

“헉? 어, 어떻게 한 겁니까? 설마 죽인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오늘 당장 윤영기 씨는 집을 비울 예정이라서요. 앞으로 한동안 윤영기 씨는 저와 함께 행동하게 될 겁니다.”

“그, 그게 무슨….”

“그러니 이사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비용은 이후 청구할 테니 정산해주시면 됩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생긋 웃었다.

“너무 빨리 처리되어서 믿어지지 않으시지요?”

“네? 아 그, 그게 좀. 사실 절대로 쉽게 끝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쉽게 끝난 건 아니죠. 제 입장에선 오히려 시작입니다만….”

“네?”

“뭐 고객님과 관련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좀 더 확인해보고 정산하시겠습니까?”

“일단 집주인과 부동산에 전화를 해보고요.”

이기찬 씨는 집주인과 근처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화를 해보고 시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아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시현은 윤영기 씨를 이사하도록 꼬드기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노, 놀랍군요. 대체 무슨 수를 쓴 겁니까?”

“뭐 진심을 다해서 설득을 했을 뿐이지요.”

“진심은 저도 있었는데요.”

“진심에 프로의 테크닉을 더했다고 해두지요.”

“대단하시군요.”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한 1주일 뒤 다시 찾아뵐까요? 아니면 지금 여기서 정산해주시겠습니까?”

“정산이라고 한다면….”

“수명 1년 정도는 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면서 정산이라고 말해주시면 됩니다. 돈은 차근차근히 입금해주시면 되고요.”

“뭔가 특이한 절차로군요. 하지만… 알겠습니다. 정산하지요.”

이기찬 씨는 바로 얼마 전까지 정말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렇게 빠른 시간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시현에게 정말 감탄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다.

“감사합니다. 그럼.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주저 말고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제 명함은 가지고 계신가요?”

시현은 다시금 새 명함을 건네주고 자리를 떠났다.

* * *

“정산 받았군요?”

류하리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흠 여기 오셨군요?”

“네. 윗사람들이 또 당신 보고서를 써내라고 해서….”

류하리는 그리 말하고 차 옆에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그래서 이분은 누구지요?”

“제 다음 의뢰인입니다.”

“의뢰인을 더블 부킹 하나요?”

“종종 하지요. 트리플 부킹도 하고, 많을 때는 여섯 개까지 한꺼번에 처리한 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과거도 가고요.”

“네. 실은 미래도 간 적 있습니다.”

“…….”

보통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개소리라고 하겠는데 시현이 하는 말이니 설득력이 있다.

류하리 자신도 몸소 경험하지 않았는가?

“아, 정말 미칠 것 같군요. 대체 보고서를 뭐라고 써야 하지?”

“제가 틀은 다듬어주겠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야… 아 그래도 따라다녀야 해요. 이번에는 당신을 많이 안 따라다녀서 그걸로 보고서가 설득력 있겠냐고 사수에게 핀잔을 들어서요.”

“알겠습니다. 자 윤영기 씨. 오세요.”

“어. 이 아가씨는?”

“제 조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윤영기 씨.”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을 정리해보죠. 차에 타시죠.”

시현은 윤영기 씨를 차에 태우고 윤영기 씨와 이야기를 나누어서 류하리에게 설명하는 걸 대신했다.

* * *

“그러니까 윤영기 씨는 문화관광부 소속으로 T시 인근의 카지노 사업 인가에 대한 조사원이었다 이거지요?”

“예. 저는 주로 반대쪽 의견을 취합하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사업 승인을 반대하는 쪽으로요? 그래서 사업을 하려는 쪽에서 당신을 도청했을 것이다?”

“네.”

“흠. 이거 엄청난 일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류하리는 윤영기 씨가 얽힌 일의 개요를 듣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어떤 일이죠?”

“약을 드세요.”

“약이요? 하지만 의사가 절 독살하려고….”

피해망상증 환자는 이게 문제다.

약을 불신하면서 먹지 않게 되어서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현은 여기서 윤영기 씨의 피해망상의 방향을 틀어주었다.

“독을 타는 건 의사가 아니라 약사입니다.”

“네?”

윤영기 씨는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세요. 처방전을 써주면 그 처방전으로 약을 타지요? 그런데 약국에서 처방전에 치명적인 독약이나 마약이 들어있으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은 의약분업 국가입니다. 의사는 직접 약을 주지 않고 약국에서 약을 타도록 처방전만을 써주니 의사가 사람을 독살할 방법은 없습니다. 약사가 독살하겠지요.”

즉 의사가 처방전으로 사람을 독살하려 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헛소리인 것이다.

물론 그 전까지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던 윤영기 씨라서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현이 윤영기 씨의 의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타겟을 바꾸어주자 납득하게 되었다.

“그, 그럼 약사가 절 독살하려고….”

“그러니 의심이 간다면 새 의사를 찾아가서 처방전을 받도록 하지요. 그 처방전의 내역을 확인해 봅시다.”

“아 네.”

“지금 당장.”

시현은 내켜하지 않는 윤영기 씨를 잡아끌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 * *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병원에 끌려간 윤영기 씨가 처방전을 받아왔다.

“그럼 이 처방전을 검사해보지요. 보건복지부 의약품 관리 사이트에서 검색해봅시다.”

시현은 처방전을 일일이 검사해서 약들이 정말 무해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럼 이제 다시 차에 타세요.”

“아 네.”

윤영기 씨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시현의 행동력에 당황했다.

대부분의 불안증 환자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기를 선호한다.

의사를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의사가 악의 비밀결사의 조직원 같은 거라서.

내게 독을 타니까.

나를 미친놈으로 만들려고 해서….

등등의 이유로 찾아가지 않는다.

약사를 찾아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피해망상을 빌미로 가만히 있기를 선호하거나 그러다 못 참아서 공격성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시현은 그를 붙잡고 정말 하나하나 다 폭발적인 행동력으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의 약국이 의심된다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안갈 것 같은 약국을 갑시다. 그곳에서 처방전으로 약을 타도록 하지요.”

시현은 그렇게 해서 약을 타왔다.

“카지노 사업권을 가지고 당신을 노리는 이들이라고 해도 전국의 약사들을 전부 포섭할 수는 없으니까 이 약은 괜찮을 겁니다. 먹어요.”

“하지만….”

“층간소음으로 망가진 당신의 몸과 신경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약입니다. 먹어요.”

시현의 설득이 통했는지 윤영기 씨는 약을 먹는데 동의했다.

시현이 그에게 다가와 신뢰를 얻고 이런저런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주니 윤영기 씨는 자신이 직접 생각하기 보다는 시현에게 모든 것을 맡겨둔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택지를 맡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안락하고 평온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윤영기 씨는 지금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공포감과 불안감에서 해방되어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현이 윤영기 씨의 피해망상을 적당히 긍정하면서 그러면서도 합리적인 대응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었다.

“흐음.”

보고 있던 류하리가 혀를 찼다.

“요새는 진짜… 당신이 고객만족 면에서 확실히 도가 텄다는 걸 인정하게 돼요. 심지어는 미행당해도 아 이 사람이 주당 500만 원짜리 일을 기꺼이 내게 하는 구나. 그렇게 하고 감탄하게 된다니까요.”

“게다가 저는 사실 미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귀찮거든요.”

태그만 박으면 굳이 미행할 필요가 없다.

굳이 고전적인 미행을 할 이유가 없는데 귀찮게 왜 미행을 하겠는가.

“후후. 그럼 저번 날에 절 미행해 준 건 정말 귀찮음을 무릅쓰고 한 일이로군요.”

류하리는 시현이 자신을 미행한 일에 대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 * *

“어 저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약을 먹고 난 윤영기 씨는 시현에게 다음 행동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거 참 분위기만 보면 인감증명 내놓으래도 내놓게 생겼다.

“자 그럼 이사를 갑시다. 일단 집을 내놓긴 했는데 바로 올 것 같지는 않고 이사 갈 곳은 있습니까? 이사할 비용은 있는지요?”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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