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의리를 입에 달면 #4
‘보아하니 폭력배들이 무서워서 그들에게 항거할 생각은 안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3만원만 요구하는 거지.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지.’
류하리는 시현이 이제부터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흠... 혹시 회사를 되찾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신적 없습니까?”
“뭐?”
“회사를 강탈한 폭력배들에게 복수하고 당신의 원래 위치를 되찾고 싶다. 그런 생각은 없으신지요?”
“하하. 왜 아니겠나. 하지만 틀렸어. 경찰들에게 신고하면 그놈들이 날 죽일 거야. 나 하나 죽는 걸로 끝이 아니라 내 자식들까지 죽는다니까. 그리고 뭐... 자네는 뾰족한 수가 있나? 내가 이것저것 떠들긴 했지만 증거는 없다고. 그리고 나는 증인으로 서진 않을 거고.”
“상관없습니다. 지금 말해주신 정보로 제가 알아서 하지요.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시현탐정 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걸 위해서는 당신이 고객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시현은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봐. 돈을 내라는 거야? 설마? 나는 완전 폭삭 망했다고!”
고필석 사장은 지레 겁부터 냈다.
“아니, 제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닙니다.”
시현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아, 역시... 그런데 매번 계약서 세부 조정하지 않나? 사람들 마다 다 보수 다르게 청구하면서? 어째서 이번엔 계약서를 가지고 있는 거야? 설마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류하리는 시현이 계약서를 꺼내들자 눈살을 찌푸렸다.
망해서 모든 걸 잃어버린 고필석 사장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수명을 약간 바쳐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게 아닐는지?
어차피 신용불량자가 된 시점에서 이런 남자의 수명이라도 받아서 유용하게 사용하는 게 서로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고 사장은 재기해서 좋고 시현은 수명을 얻어서 좋고.
‘이렇게 생각하는 시점에서 나도 참 이 남자에게 많이 물들었구나.’
류하리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뭐야 이건? 신체포기 각서인가? 내 몸뚱아리 쓸 만한 것도 없을 텐데?”
“일단 읽어보시고 이야기하시죠.”
“...수명 3년에 성공 시 성공보수 업무 주당 500만? 제정신인가?”
“성공보수이니 괜찮지 않습니까? 만약 성공하면 그 정도는 낼 수 있게 될 텐데요.”
“아니 내 말은 돈이야 그렇다 쳐도 수명은 대체 뭐냐고? 장기라도 뜯어가나?”
“농담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제게는, 그리고 저희 탐정 사무소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이런 게 싫으시면 그냥 이대로 가셔도 됩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말하면 미친 사람 같잖은가.”
“미친 사람이 아니면 굳이 조폭들에 대항해서 당신을 위해 싸워줄 리 없잖습니까? 안심하세요. 저희 시현 탐정 사무소의 고객서비스는 정말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대단하니까.”
“하아....”
고필석 사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접시위에 놓인 음식들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알겠네. 하지!”
“네. 대단히 감사합니다.”
시현은 고필석 사장에게도 기어이 수명 계약을 받아내었다.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3만원, 아니 10만원만 좀 빌려주면 안 되나?”
“............”
류하리는 개궁상을 떠는 고필석 사장에게 당황했지만 시현은 대답대신 품에서 돈 봉투들을 꺼냈다.
두터운 것, 중간 것, 얇은 것 등등 여러 가지 돈 봉투가 시현의 코트에 들어있었다.
“.......”
돈 봉투를 본 순간 고필석 사장의 눈이 충혈 되었다.
“음... 이거면 되겠지요?”
시현은 중간 크기의 돈 봉투를 집어 들었다.
중간크기라 해도 안에 5만 원권이 가득 들어있다고 치면 한 500만원은 들어있을 것이다.
“어... 이거....”
처음에 원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어서 고필석 사장이 당황했다.
“이걸 드릴 테니까 당장 씻고 면도하고 어디 사람같이 보이게 신경 쓰세요. 휴대폰도 챙기시고.”
“뭐?”
“곧 준비해야 할 겁니다. 어서요. 저는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무조건 28일 안에 끝내야 하거든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신세계 컴퓨터 파의 업무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송금이었다.
어떻게 하면 필리핀에 효과적으로 돈을 보내는 가.
그것이 그들의 업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필리핀의 카지노에 고객을 보내 도박을 시키고,
필리핀의 마약조직들로부터 코카인이나 헤로인을 수입해 온다.
이러한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필리핀 카지노에 칩값과 정킷 라이센스비를 지불해야 하고 마약조직들에 마약대금도 지불해야 한다.
한국에서 돈이 계속 필리핀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이게 계속되면 당연히 감사를 받게 된다.
물론 이들도 필리핀 측에 받을 돈이 있긴 하다.
컴퓨터 부품들 값과 카지노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부가 그들 것이긴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대금 지불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필리핀에서 목재를 수입하면서 시세보다 더 비싸게 쳐서 돈을 보내기도 하고 더 좋은 컴퓨터부품, 아니 아예 신품을 헐값에 넘기기도 하면서 돈을 보내려 한다.
그래도 부족할 때에는 직접 돈을 싸들고 사람을 보내곤 한다.
문제는 다 폭력배들이라서 큰돈을 들려서 보내면 언제 도망칠지 모르고 또 세관에서 걸리면 다 벌금을 물거나 조사를 받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구 상무에게 연락이 왔다.
* * *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넘기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양복 정장 차림으로 들어오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기, DX트레이드의 장세환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DX트레이드? 뭐하는 곳이지?”
“무역 회사입니다. 다른 무역회사 일들을 대행하기도 하고요. 그, 고 사장님 소개받고 왔는데요. 필리핀에 전자부품을 거래하신다고 해서요.”
“고 사장이면 고필석... 사장님?”
“네.”
“흠... 사장님은 지금 부재중이신데. 무슨 일로 온 건가?”
“필리핀 쪽에 어음이나 신용장, B/L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마침 필리핀 쪽 신용장을 좀 구해왔습니다. 웰스 파고 마닐라 지점의 신용장입니다.”
장세환이 내놓은 서류는 무역용 신용장이었다.
“뭐? 그게 뭔데?”
하지만 조직폭력배인 구 상무는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무역회사들이 돈 받을 수 있는 증서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어음이지요.”
“뭐?”
구 상무는 눈을 크게 떴다.
조직폭력배인 구 상무는 사실 무역업이나 그런 걸 잘 모른다.
무역이나 통관관련 업무는 전부 원래부터 이 회사의 담당직원이던 김상우 대리에게 맡기고 있었다.
“야. 상우야. 신용장이라는 데….”
“아, 무역대금 신용장이요?”
“그래. 쓸 만하냐?”
“있다면 쓸 만한 정도가 아니지요.”
“그렇단 말이지?”
“예....”
김상우라는 직원은 그렇게 답했는데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런 것도 모르는 놈이 해외 교역을 하는 회사를 장악했다는 것에 자신의 처지가 안타깝게 여겨지는 걸까?
“서류 확인해봐라.”
“아, 알겠습니다.”
김상우 대리는 영업사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류를 받아보았다.
웰스 파고 마닐라 지점의 신용장으로 관련된 B/L(선적선하증권) 사본까지 들어있었다.
보아하니 석고보드나 창호, 샤시 등 건설자재들을 필리핀에 실어 보내고 그 대금으로 받은 서류 같았다.
“이거 한강건재 대리점 건데요?”
“음? 한강건재?”
“네... 일단 서류상 아무 문제없는 것 같습니다. 선박 정보도 일치하고 컨테이너 번호랑 가격도 맞고 세관도 이미 무사히 통과했네요.”
“확실해?”
“확실하냐면 당연히 제가 답할 수는 없지요. 선사나 웰스 파고에 연락해서 직접 문의해봐야겠지만 그런데 원래는 B/L만 해도 이미 유가증권이에요.”
“무슨 소리야?”
무역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구 상무는 의아해하고만 있었다.
“.......”
영업사원인 장세환이 구 상무의 무식함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신세계 컴퓨터는 분명히 한국에서 경쟁력이 없는 컴퓨터 부품을 해외로 팔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그럼 내부에 어쨌건 무역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상무나 되는 사람이 기초적인 용어들도 알아먹질 못하다니....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정도면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신뢰도를 가진 서류라 이겁니다.”
김상우 대리는 그렇게 설명했다.
* * *
과거, 한국의 모 완성 PC겸 각종 생활가전 업체는 홍콩과 동남아에 유령 회사를 세우고 그 유령회사와의 거래기록을 거짓으로 만들어 엄청난 매출을 올린 것처럼 위조했다.
그리고 그 B/L과 거래증명서를 담보로 은행에 대출을 계속 받아내서 수백억대의 부정대출을 한 사건이 있었다.
김상우 대리는 지금 이 서류가 그 정도는 되는 서류라고, 즉 자기가 보기엔 진짜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여튼 진짜 같다는 거지? 음. 고 사장이 소개했다고?”
구 상무는 생각에 잠겼다.
‘이거 꽤 좋은 기회인데? 고 사장 그 인간 정말 괜찮은 인맥이 있었구먼.’
사실 그들은 사업의 일부를 접으려고 생각 중이었다.
특히 카지노 정킷을 접을 생각이었다.
정킷 자체는 분명히 수익이 나온다.
하지만 필리핀으로 대금을 송금하기가 어렵다.
수익률이 아무리 높아도 관리하는데 손이 많이 가는 사업이다.
애초에 필리핀을 거점으로 두고 한국에서 입금조직을 만들어서 한국에서 입금을 받는 쪽이 나은데...
신세계 컴퓨터는 한국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문제였다.
필리핀이 몸통이면 어렵지 않은 일인데 한국이 몸통인 입장에서는 이 정킷을 관리하는 데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킷을 감행하게 된 것은 온라인 카지노 사이트를 만들어서 더 많은 돈을 빨아내려고, 손이 많이 가는 걸 알면서 정킷에 진출한 것인데 정작 시스템 개발자들을 구하지 못해서 온라인 카지노 사이트 구축에 실패하고 있는 지금 정킷은 계륵이었다.
때마침 프로야구선수 조명성이 물려서 조명성에게 공갈쳐서 갈취하는 걸 끝으로 정킷은 접으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무역회사의 어음을 이용해서 대금을 필리핀에 수월하게 보낼 수 있다면?
정킷 사업을 굳이 접을 필요가 없다.
개발자 몸값이 올라서 한동안 포기했었지만, 언젠가는 그래도 온라인 카지노 시스템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고….
“괜찮은데?”
구 상무는 군침을 흘렸다.
“그래서? 어음을 할인해달라는 건가? 얼마나 할인이지?”
그러자 영업사원의 표정이 당황으로 바뀌었다.
“아뇨. 할인이라니요? 이 신용장은 이 B/L 사본과 함께 가져가면 바로 지급받을 수 있는 겁니다. 할인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할증을 받아야 하는데요. 그저 저희 사장님과의 친분 때문에 고 사장님께 가져왔는데....”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