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70화 (170/269)

제170화

의리를 입에 달면 #5

너희들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값을 후려치겠다는 게 무슨 소리냐? 이건 오히려 돈을 더 받아야 하는 유가증권이다.

영업사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 임마? 어음을 가져와 놓고 할인을 안 한다고? 정가로 사란 말이야?”

“아니 이거 참... 고사장님은 안계신가요?”

영업사원은 계속 억지를 쓰는 구 상무와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필석을 찾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캉!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재떨이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분노한 구 상무가 재떨이를 집어던진 것이었다.

“이 새끼가....”

구 상무는 영업사원을 노려보았다.

분노해서 희번덕거리는 눈의 흰자위가 노르스름하게 번들거린다.

사람의 눈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눈이다.

“지금 날 무시해? 장난 하냐? 왜 자꾸 고 사장을 찾아?! 너 이 새끼 지금 내가 멍청하다고 무시하는 거냐?”

구 상무는 이놈이 자신과 거래하지 않고 굳이 고필석을 찾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

“아,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 지금 거액의 유가증권을 들고 있으니 사장님을 뵙고 이야기를 하는 게....”

“닥치고! 이 새끼야! 지금 날 좆으로 보지? 너 이 새끼가 지금 날 무시해?”

구 상무의 행동은 이미 비즈니스 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폭거다.

이 폭거, 욕설과 협박에 영업 사원이 당황해한다.

“꺼져 이 새끼야!”

“네?”

“꺼지라고. 그거 놓고....”

“어....”

영업사원은 굉장히 당황해서 유가증권을 챙겼다.

“놓고 가란 말이야! 보고 확인하게!”

“그럴 수는 없지요.”

영업사원은 이것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유가증권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사장님께서는....”

“아 사장 찾지 말고 꺼지라고! 아니면 뭐냐? 여기서 죽고 싶냐?”

구 상무가 으름장을 놓자 그가 회사에 심어둔 직원들, 폭력배들이 슬금슬금 몰려왔다.

영업사원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일반인 같지 않은 분위기를 보고 위축되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서류를 챙기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아니 괜찮겠습니까? 상무님? 저거?”

폭력배들도 일단 성질나는 대로 협박을 하긴 했지만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자기네 사무실을 찾아온 놈에게 이런 식으로 굴면 만약 상대가 신고할 경우 위험해진다.

여기 직원들이야 집도 가족도 다 알고 있고 월급을 어쨌건 주고 있는 상황이니까 저항할 의지가 없는 거지 다른 회사의 직원은 무작정 폭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야. 형우야!”

“네. 상무님....”

“저 새끼 쫓아가서 미행해.”

“네?”

누가 봐도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남자도 순간 당황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강도짓을 하면 누가 했는지 빤히 보일 텐데 그런 짓을 하라니?

“아니, 아니다. 명함에 주소가 있네. 여기 양아치 애들 모아서 털어라.”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걸리면 바로 우리를 의심할 텐데요.”

“촉법소년 애들 뒀다 뭐하냐. 애새끼들 데려다가 치고 나 몰라라 하면 되지. 안 그래? 아니 줄 거 다 주고 장사할 거면 뭐 하러 건달을 하냐고. 그냥 장사꾼 하지.”

“아, 알겠습니다.”

“그래. 잘하자. 응?”

“.........”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원래 신세계 컴퓨터의 직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자신들의 회사가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강탈당해서 백주대낮에도 이렇게 범죄모의를 하다니....

하지만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눈에 보이는 것 없이 흥분하는 구 상무라는 작자의 행동을 보니 뭐 하나 잘못해서 꼬투리 잡히면 그게 큰 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다들 싫어도 입을 다물고 숨죽인 채로 조용히, 그저 지나가기 만을 바랄 뿐이다.

“어이, 다들 뭘 하고 있어? 구경났어?! 일들 해! 일!”

구 상무는 그런 직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 * *

구 상무의 부하이자 사실상 폭력사업 대부분을 관장하는 조직원 박형우는 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유흥업소의 웨이터를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리자 어렵지 않게 가출소년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아까 전 찍었던 영업사원의 얼굴, 그의 명함 주소, 그리고 영업사원이 신용장을 담고 있던 서류가방 사진 등을 보내주었다.

“이런 서류가방을 가져와야 한다. 이 녀석이 지금 가지고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을 거야. 그 전에 칠 수 있겠냐? 시간이 얼마 없어.”

영업사원이 유가증권을 들고 돌아다닐 때가 기회다.

저 영업사원이 회사에 돌아가면 고액의 유가증권은 금고에 보관할 테고 요즘 금고는 절대로 쉽게 딸 수가 없다.

디지털 도어락처럼 되어있는 금고들은 일단 잠기면 아예 용접기로 잘라야 하는데 산소 용접기로도 한참 걸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금고를 들고 나르는 것도 문제다.

중형 금고만 해도 무게가 70킬로그램이 넘는다.

카메라가 도처에 깔린 지금 금고를 들고가면 어디든 쉽게 잡히고 만다.

가장 좋은 건 유가증권을 들고 이동하는 영업사원을 습격해서 강탈하는 것, 그러나 자기 회사를 찾아온 영업사원을 자신들이 추격해서 폭행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누가 보더라도 범인이 빤하지 않은가?

’남의 소행으로 보여야지. 다행히 이놈 사무실은 사당역 인근에 있군. 강남의 유흥업소에 출퇴근 하는 후배들이 사당이나 방배 근처에

숙소를 잡고 있는데 그 녀석들을 써먹을 수 있겠어. ‘

과연 후배들은 고작 20만원씩 사례해주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네. 선배님!]

[그 사무실 근처에 매복해있죠!]

“좋아. 부탁한다. 서류를 빼앗아야 해!”

박형우는 후배들에게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 * *

“실패했네요.”

류하리는 시현의 차를 몰면서 조수석 쪽 문을 열고 영업사원, 장세환으로 변장한 시현을 맞이했다.

“아 그러게요. 이거 진짜 신용장인데....”

시현은 변장용 안경을 벗었다.

DX트레이딩의 영업사원 장세환은 바로 시현이 분장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무역 회사를 하면서 기초적인 무역 서류도 볼 줄 모르고 근거도 없이 감으로 행동하는 조직폭력배 영감탱이는 역시 구슬리기가 쉽지 않군요.”

시현은 분명히 상대가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덤벼들 수밖에 없는 미끼를 준비해갔다.

그런데 상대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놈이 아니다.

“기업을 탈취했다고 해서 좀 지능범일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그냥 금수 같은 놈이었군요. 아마도 픽서가 따로 붙어서 사기기술을 가르쳐 주는 거고 본인은 그냥 건달인 듯합니다.”

“그럼 이제 어쩌죠?”

“뭐 플랜 A가 실패했을 뿐 플랜 B는 착착 진행 중입니다.”

“믿어도 되는 거예요? 당신? 당신이 하는 말 중 상당수는 허풍이 섞여있던 것 같은데.”

류하리는 첫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시현을 보며 의아해했다.

대답 대신 시현은 리시버를 하나 꺼냈다.

귀에 꽂는 블루투스 리시버였는데 그 안에서는 현재 신세계 컴퓨터 사무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친절하게 저쪽에서 우리를 찾아올 것 같습니다.”

“아, 음.....”

류하리는 리시버 너머에서 습격을 모의하고 있는 폭력배들의 대화를 듣고 혀를 찼다.

이 폭력배들은 놀랍게도 시현을 습격해서 유가증권을 빼앗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걱정되네요. 유혈사태가.”

“절 걱정해주는 겁니까?”

“아뇨. 당신보다는 당신을 상대해야 할 사람들을 걱정하는 거지요.”

류하리는 시현이 사이다패스의 목을 관수로 관통해 찢어버리는 걸 보았다.

사이다패스니까 안 죽었지 인간을 그렇게 찢어버리면 초절엽기 살인사건으로 대서특필될 것이다.

“상대는 미성년자일 것 같은데 어쩔 거죠? 죽일 건가요?”

“아니요. 빼앗겨 줄 겁니다.”

“...네?”

류하리는 깜짝 놀랐다.

시현이 미끼로 들고 간 신용장은 미화 40만 달러에 달하는 유가증권이다.

아무리 시현이 돈이 많더라도 그만한 유가증권을 빼앗기면... 그것도 자기 일도 아니라 남의 의뢰를 하다가 빼앗길 만한 금액이 아니다.

‘40만 달러의 유가증권을 그 야구선수가 내줄까? 한국 돈으로 4억 이상인데....’

조명성은 분명히 라쿤즈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자랑하는 야구선수이지만 그런 그에게도 자기가 각오하지도 않았는데 4억 이상의 지출이 갑자기 생겼다고, 그걸 감당해달라고 하면 황당해할 것이다.

“강도로 현장 체포할까요?”

“아뇨 뺏겨야 합니다. 어차피 녀석들은 결국 유가증권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직접 갈 겁니다. 그러면 놈들의 자금흐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안경을 다시 썼다.

“류 경위님은 돌아가세요. 저는 천천히... 지하철로 회사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 * *

영업 사원 장세환은 사당역에서 내려서 관악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DX트레이딩 본사를 향해 천천히 걷는 그의 뒤로 두 대의 배달용 언더본 바이크가 접근해왔다.

두 대의 언더본 바이크에는 아무리 봐도 중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휴대폰에서 사진파일을 열어서 눈앞에 걸어가고 있는 영업사원 장세환의 뒷모습과 비추어보았다.

“저놈이지?”

“음. 맞는 것 같다. 옷이 같잖아? 서류 가방도 있고.”

“그래도 확인해볼까?”

“어떻게?”

“물어보는 거야. 이름을 물어봐서 대답하면....”

“그럼 우리가 자기를 알고 있는 놈이라고 알게 되잖아? 나중에 잡힌다.”

“하면 그냥 치자고? 만약 엄한 사람이면....”

“뭐 엄한 사람이래도 스마트폰이나 지갑은 들고 있겠지.”

“그렇네?”

그들은 언더본 바이크의 스로틀을 꺾었다.

엔진이 굉음을 내며 힘겹게 골목길을 가속한다.

놀란 영업사원이 뒤돌아보았지만 그 순간 바이크에 탄 그들은 둔탁한 각목으로 영업사원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다.

-빡!

영업사원이 풀썩 쓰러지자 주위의 다른 행인들이 놀랐다.

“어?!”

“뭐, 뭐야?! 이거!?”

“어어어어!?”

백주대낮에 어린 애들이 바이크를 타고 돌진해서 사람 뒤통수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각목을 휘둘러 구타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행인들이 충격을 먹고 놀란 사이 언더본 바이크를 끌고 온 소년들은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목을 휘두른 녀석은 쓰러진 영업사원의 주위를 언더본 바이크로 빙글빙글 돌며 다른 행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그 사이에 또 다른 한 조가 쓰러진 영업사원에게 접근했다.

“와 죽은 거 아냐?”

“뭐 상관없어. 우린 어차피 촉법소년인데 뭘.”

“저 가방 가져오라고 했지?”

그들은 쓰러진 영업사원의 서류가방 뿐만 아니라 품을 뒤져 지갑과 스마트폰까지 빼앗았다.

“이. 이 새끼들!”

“뭐하는 놈들이야! 너희들!”

주위의 행인들 중 용감한 사람들이 이 미친 짓을 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기겁했지만 언더본 바이크를 끌고 각목을 들고 있는 녀석들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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