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의리를 입에 달면 #9
“자 그럼 회사도 되찾아드렸으니 계약은 완료 되었지요?”
“하지만 이래서야 회사를 당신에게 빼앗긴 것 같은데요. 구 상무 대신 당신이 들어온 것 아닙니까?”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고객님. 구 상무가 들어왔을 때는 멀쩡한 회사에 들어온 거고 저는 이미 부도나기 직전의 회사에 부도를 막아준 것 아닙니까? 그들은 법인계좌를 털었고 저는 제 돈으로 법인계좌를 채워 넣었습니다. 제가 이 회사 정상화하는 데 쓴 돈만 해도 6억 정도 됩니다. 이 회사의 영업이익을 생각하면 그렇게 투자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요.”
“아니 그런데 제 말로 이러긴 좀 그렇지만 직원들에게 왜 상여를 그렇게… 상여금만 해도 한 오천 쓰지 않았습니까? 아깝게스리….”
중소기업 사장인 고필석은 직원들에게 나간 상여금에 대해 아까워했다.
시현이 6억을 법인계좌에 넣었는데 그중 5천이 바로 직원 상여로 빠져나간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직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죠. 폭력배들에게 위협받으면서 회사를 지킨 사람들 아닙니까?”
“걔들 그렇게 유능한 직원들도 아닌데…. 정말 유능한 놈들은 구 상무 일당이 들어오자마자 사표 쓰고 나갔단 말입니다. 그놈들은 그냥 오갈 데 없어서 남은 놈들이라고요!”
돈이 그렇게나 아까워서였을까?
고필석은 직원들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언하건데 지금 직원들은 꽤 쓸 만할 겁니다.”
“네? 그럴 리가요? 그러면 대기업 갔지 이런 중소기업에 있겠습니까?”
고필석은 직원들이 유능하다는 시현의 평가를 비웃었다.
“물론 애초에 아주 유능한 직원들은 폭력배들이 회사를 장악했을 때 다른 데로 이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은 사람들이 무능한 건 아닙니다. 정말 직원들이 아주 무능했다면 폭력배들이 해고시켰을 겁니다.”
“네?”
“돈도 안 되는 직원들을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폭력배들이 회사를 운영하면 사람들을 뭐 권고사직 시키겠습니까? 그냥 자르지요.”
“………”
“뭐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가스라이팅 잘 당하는 수동적인 사람들이겠지요. 수동적이니까 폭력배들에게 위협당해서 싫어도, 직장을 옮기는 것보다 참고 그 자리를 지켰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의외로 장점이란 말이지요.”
“그게 장점이라고요?”
“좋은 리더가 있고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그런 수동적인 직원들도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무능한 리더라는 소립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시현은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업을 정상화하는지 보도록 하지요. 정산은 그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러시지요.”
시현은 정산을 유예하는 고필석 사장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어차피 조명성에게 수명 정산을 받은 지 일주일 정도 지난 뒤라 아직 31일의 여유가 있다.
‘흥, 얼마나 잘하는지 보겠수다.’
고필석은 자신의 사업체를 강탈하다 시피 한 시현이 과연 얼마나 잘하는 지 두고 보기로 했다.
* * *
“…….”
직원들은 시현과 고필석 사장의 말싸움을 듣고 있었다.
사장실과 직원 사무실이 얇은 가벽 하나로 분리되어 있다보니 당연히 언성을 좀 높이면 밖에서 다 들린다.
상여금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져 있던 직원들은 사장의 막말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현이 자신들을 믿어준다는 것에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야. 담배피러 나가자.”
그들은 흡연자도 아닌 직원들과 함께 잠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 거 고필석이 저 새끼….”
이전 같으면 고 사장님, 고 사장님, 설령 눈 앞에 없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회사의 실질적인 오너는 바뀌었고 고필석 사장이 직원들을 그딴 식으로 생각한다는 게 밝혀진 지금, 아무도 고필석 사장을 존중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없으면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어쨌거나 이거 좀 빡치는데…. 퇴사할까?”
“에이… 좆소가 어딜 가나 다 저렇죠. 뭐, 그래도 고 사장이 우릴 우습게 보긴 해도 때리거나 뭐 사적인 일 시키진 않잖아요?”
그들은 고필석 사장에게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고필석 사장 말고 다른 중소기업의 오너가 딱히 저것보다 더 나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정도로 사표 쓸 거였으면 진작에 그만뒀지.
“화딱지 나는데.”
“……”
이게 인터넷에 나오는 사이다 썰 같은 거면 어떻게든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서 저 고필석 사장 보란 듯이 업무실적을 개선하고 고필석 사장을 해고하던가 내쫓던가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드문 일이니까 사람들이 썰로 공유하고 다니는 거지.
미담이 드물어서 사람들의 입을 타고 다니듯, 후련한 보복 같은 것도 현실에 드문 법이다.
‘우리가 뭐 딱히 숨겨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우리가 매출이나 실적을 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겠어?’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신세계 컴퓨터를 인수한 오너, 시현이 사옥 건물에서 걸어나와 그들에게 다가왔다.
“보아하니… 들은 모양이로군요.”
시현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미행을 본업으로 하는 탐정인 그였다.
직원들이 밖에서 고필석 사장과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걸 눈치 못챘을 리가 없다.
“아, 회, 회장 님?”
“회장은 무슨, 그냥 시현이라고 부르세요.”
“네?”
“시현 님…?”
“님이나 씨라고 불러도 됩니다. 어쨌거나 여러분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실적 개선에 열의가 있는 것 같군요.”
“……”
“그럼 프로젝트를 만들어볼까요?”
“네?”
다들 깜짝 놀랐다.
설마 오너인 시현이 직접 자신들에게 올 줄이야?
“안심하세요. 새 프로젝트를 굴려서 실적이 나오면 확실한 성과급으로 보답해 드릴 겁니다.”
“예!”
직원들은 성과급을 약속하는 시현의 말을 믿고 있었다.
* * *
“음 제가 다녀온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류하리는 테이블에 앉아서 시현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 사장 웃기네요. 결국 자신이 구 상무인지 뭔지 그 패거리들을 불러들여서 회사 말아먹어놓고선 부하들이 무능하다고 비난하다니. 책임을 따지자면 경영자로서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지 않나요? 시현 당신도 좀 한마디 해주지 그랬어요? 네가 무능하니까 직원들이 고통 받지 않았냐. 그렇게요.”
“하하하. 시현 탐정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데 고객님께 그런 폭언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신세계 컴퓨터의 경영은 정상화 되었나요?”
“네. 당연하지요. 벌써 수명 정산은 받았습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고필석 사장의 계약서를 타자기에 밀어 넣었다.
“고필석 사장을 자르진 않을 거지만 직원들의 사기를 깎아먹으니까 권한을 좀 제한두어야 겠지요.”
“어떻게 한 거예요? 이렇게 단기간에 승복하다니?”
류하리는 시현이 고필석을 승복시킨 게 놀라웠다.
“우선 제가 B/L하고 신용장을 가져왔잖습니까? 그 시점에서 제가 다른 무역회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셔야죠. 제 소유의 무역회사를 이용해서 회사들 간의 거래로 어느 한 회사의 경영상황을 호전시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
류하리는 시현이 하는 말을 듣고 혀를 찼다.
그러니까 시현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른 회사의 실적을 밀어줘서 신세계 컴퓨터의 경영을 빠르게 정상화 시켰다는 소리다.
“그거 돈 세탁 아닌가요?”
“딱히 돈세탁을 한 건 아닙니다.”
“정말요?”
“사실은 좀 했습니다.”
“…….”
그럼 직원들이 유능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냥 시현이 가지고 있던 법인중 일부의 이익을 이쪽으로 돌려놨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제가 그동안 탐정 일을 하면서 만난 많은 고객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서 신세계 컴퓨터의 경영을 적극 개선했습니다.”
“고객네트워크요?”
“네. 제 고객 분들은 사회 각계층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그분들을 통해서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게 제가 가진 강점이거든요.”
시현은 계약자들의 사건을 처리해주면서 만약 그들에게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면 그들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그래서 경영하는 사업체도 여럿, 거기에 딸린 인간들도 상당히 많다.
게다가 그 사람들의 충성도가 상당하다.
다들 시현이 수틀리면 사람 하나 조져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감히 딴생각을 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시현의 과거 고객들은 시현의 충실한 인맥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침 상선에서 근무하시던 분이 있어서 그분에게 소개를 받아서 신세계 컴퓨터의 거래처를 아프리카 쪽 국가들로 거래처를 늘렸습니다. 필리핀보다 아프리카 쪽이 컴퓨터 중고 부품 등에 대한 수요가 월등히 높거든요.”
“아….”
“그리고 직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키오스크나 POS기기 개발도 진행 중입니다.”
“키오스크요?”
“네. 키오스크나 POS는 성능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으니까 중고 컴퓨터 부품을 이용해서 만들어도 되거든요. 거래처만 튼다면 중고 컴퓨터 부품을 매입하고 있는 업체에서 만들기 좋은 아이템입니다.”
“그걸 직원들이 제안해서 진행한다고요?”
“네. 직원들의 발상입니다. 놀랍지요? 다행히 제가 포스 기기를 납품하는 회사를 하나 가지고 있어서 만들기만 하면 납품은 어렵지 않을 전망입니다. 사실 직원들을 칭찬한 건 고필석 사장을 좀 놀려먹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도 있었는데 상여금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군요.”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류하리는 혀를 내둘렀다.
“뭐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납품할 수 있다는 상황이 매우 좋은 거 아니겠어요?”
“그래도 칭찬하고 싶군요. 솔직히 저도 별 기대는 안했는데.”
“…….”
류하리는 시현에게 열광하고 있을 신세계 컴퓨터의 직원들을 떠올리며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류하리 앞에서야 직원들 별로 믿지 않았다고 말하겠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온 바, 시현은 직원들 앞에서는 ‘역시 여러분들을 믿고 있었다’면서 신뢰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을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간을 믿고 따르고 있을 많은 직원들에게 류하리는 묵념을 보냈다.
그때 류하리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음?”
성신아의 전화였다.
“무슨 일이지?”
류하리가 전화를 받자 성신아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류하리! 봤어?]
“뭐를?”
[사이다 패스가 돌아왔어!]
“뭐?”
류하리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 * *
사이다패스가 돌아왔다.
이번에 사이다패스가 살해한 이는 선진당의 3선의원이며 법사위원, 전직 검사 출신인 김중헌 의원이었다.
메이저 정당 중 하나인 선진당의 중진의원이자 공안검사 출신으로 성취의 접대 리스트에도 올라있는 인물이니 사이다패스가 그를 죽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현이 의아해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대체 왜? 지금 그를 죽였을 까요?”
“네? 아니 뭐가 이상해서요?”
류하리는 왜 시현이 이번 사건을 궁금해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