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파격 약혼? #3
자신이 하는 행위가 불법이라는 것, 그리고 목숨 걸고 일하고 있는 경호원들이 응당 받아야 할 돈을 횡령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이미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하는 탐욕을 부리면서 정작 본인이 탐욕을 부리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다.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스스로 우국지사, 지금 이순간도 불철주야 나랏일만 걱정하는 애국자가 되어있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니까.’
비서는 솔직히 감탄하고 있었다.
경호원들 네 명에게서 인당 400만원씩, 월 1600만원씩 임금을 떼어먹고 있지만 그 정도는 김중헌 의원에게는 그렇게 큰돈이 아니다.
푼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걸렸을 때의 손해를 생각하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금액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다.
어쩌면 이게 남의 위에 서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인가?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커리어를 망칠 이런 사소한 횡령 따윈 하지 않을 텐데 정치가들은 이상하게도 정말 알뜰하게 반드시 해먹는다.
비서도 선진당 당원이었지만… 정말 직접 국회의원들을 보면 그들의 꼼꼼함에 감탄하곤 한다.
“에휴….”
얼른 빨리 자리를 잡아서 비서 질을 그만두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저런 의원이 되지 말아야지.
비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중헌 의원을 대신해 서류작업들을 하고 당비 운영 팀에 보낼 메일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끼기긱….
의원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문에 디지털 도어락이 달려 있어서 정상적으로는 열리지 않는 문인데 갑자기 문이 열린 것이다.
분명히 디지탈 도어락이 붙어있는 방화문인데 도어락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다니? 차량 사고 났을 때 차 문짝 잘라서 사람 구조하는 스프레더 같은 장비로도 방화문을 뜯어내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것이다.
“뭐… 뭐지?”
당황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이 비서가 기억하는 것의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비서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 * *
비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의 앞에 무슨 교통사고 당한 듯 한 상태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김중헌 의원이 살해당하고 그의 죄상에 대한 규탄이 담긴 선언문이 시체 위에 붙어있었다.
사이다패스가 돌아온 것이었다.
* * *
선진당 대표이자 정계의 거물, 양천용 의원은 갑작스런 김중헌 의원의 사망과 사이다패스 사건에 대해서 수사부가 보인 무능을 질타하며 국정감사를 요구했다.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무부가 그동안 어떻게 사이다패스를 수사했는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솔직히 사이다패스를 두려워해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다패스가 사람을 죽일 때는 그의 죄상을 낱낱이 선언문을 통해서 질타하는 지라 사이다패스에 의해서 죽는 자는 그 추악한 면모를 만천하에 까발리게 된다.
국회 의원들 중 상당수,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이 성취와 윤 회장이 제공하는 향응을 받아먹었으니 그들 누구라도 언제 사이다패스에게 공격당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용감한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 * *
검찰수사관들과 함께 법무부에 파견 나와 있는 최형림의 앞에서 검찰수사관들이 혀를 찼다.
“턱도 없는 쇼를 하는 군요.”
“누가 뭐 사이다패스를 잡기 싫어서 안 잡나? 못 잡으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거 알 만한 사람이….”
검찰 수사관들은 매스컴을 끌고 온 양천용 의원의 행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요즘 세상에 항의서한을 들고 오다니…. 정말 죽더라도 대통령을 해먹고 싶나 보군.”
최형림은 양천용 의원을 그렇게 평가했다.
굳이 항의서한을 직접 전달하겠다는 퍼포먼스를 보이니 검찰 입장에서는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양천용 의원은 검사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며 많은 검사들을 정계로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즉 국정감사에서, 언론 앞에서는 검찰을 때리되 뒤에서는 검찰들과 커넥션을 유지하는 그런 사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저러면 사이다패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만약 최형림이 사이다패스를 컨트롤하지 않는다면, 사이다패스 독단적으로 움직인다면 그녀의 성격상 양천용 의원을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 * *
법무부의 사이다패스 대책본부로 쓰고 있는 사무실에 양천용 의원이 직접 방문했다.
매스컴들의 앞에서 형식적으로 항의서한을 전달한 그는 매스컴이 물러가자 대책본부장인 천용덕 검사에게 사죄했다.
“미안하네. 천 검사님.”
“아뇨, 실제로 수사에 영 진전이 없어서… 국감에 나가면 어떻게 될지 고민이군요.”
“국감 하자고 했지만 뭐 실제로 하진 않을 걸세, 민생당이 막기로 약속되어 있으니까.”
“약속이 되어 있단 말입니까?”
“국회를 보이콧 할 거란 말이지. 그럼 국감이 진행되겠나? 알고 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네.”
양천용 의원은 천용덕 검사와 그렇게 말하고 시선을 돌려 최형림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최형림 검사인가?”
“네?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류 회장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흠, 너무 젊은 데?”
“죄송합니다. 나이는 먹고 싶다고 먹어지는 게 아니라서.”
“아 그런 뜻이 아니네. 그저 인물은 좋은데 캐릭터가 겹쳐서 걱정이 된다는 거지. 흐음. 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세.”
양천용 의원은 그리 말하고 자신의 비서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비서가 명함을 꺼내 최형림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연락 줌세.”
양천용 의원은 그리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자 천용덕 검사가 의아해하며 최형림을 바라보았다.
“아니 최 검사. 양 의원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집안 사정이 좀 있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최형림이 재벌가 자제이기 때문에 아버지나 집안을 핑계로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한다.
천용덕 검사도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런데 설마 최 검사. 벌써 정계에 입문하려고? 아니 재벌가 자제니까 검찰에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 같군.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를 놓치긴 아쉬운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정계입문은 언감생심 어림도 없지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최형림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매끄럽게 했다.
“뭐 그 뭐냐. 선진당에 청년위원장이라고 자네 또래 젊은 친구도 정치하겠다고 난리던데 그 사람보다는 자네가 스펙이나 인물이나 훨씬 낫지.”
천용덕 검사는 선진당 청년위원장을 언급했다.
* * *
“사이다패스가 돌아왔다!”
경찰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선진당의 중진의원을 살해해버려서 선진당에서는 뭐 국감을 열겠다느니 하면서 언론을 자극했다.
경찰이나 검찰의 무능을 질타하는 사람들의 비난이 높아지는 건 덤이다.
* * *
김중헌 의원 의원실 근처, 경기도 안양의 카페에서 성신아와 류하리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다패스가 돌아와서 사람이 죽은 건 안 좋은 일이지만 덕분에 일이 좀 생겼네.”
성신아는 이 상황을 나쁘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사실 사이다패스가 활동하지 않으면 그를 잡을 방법이 없다.
사이다패스에 대한 흔적이나 증거, 믿을만한 제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정보가 전혀 없으니 곤란하다. 그나마 쓸 만한 정보는 사이다패스 본인이 써 갈기는 선언문뿐이다.
이런 자기 과시형 범죄자는 활동을 많이 하면 할수록, 언젠가 반드시 꼬리를 드러낸다.
살인을 많이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잡을 확률이 높아지고, 살인을 도중에 멈추면 미제사건으로 남아버리는 것이다.
치안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범죄가 일어나라고 바랄 수는 없지만 미제 사건으로 남느니 어서 빨리 사이다패스가 활동해주는 게 좋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 탐정은 어때?”
성신아는 류하리에게 물어보았다.
“뭐가?”
“협력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탐정 꽤 유능하더라고. 게다가 평판도 들어보니까 다들 한 수 접어주던데?”
성신아는 시현에 대해서 조사해보고 깜짝 놀랐다.
동종 업계의 다른 흥신소들도 접어주는 불륜조사의 달인, 미행의 천재라고 불리는 탐정이라니?
“아마도 경찰이 쓰지 못하는 불법적인 수단을 쓰고 있겠지. 그런데 우리 대단하신 류 경위님은 왜 그 남자의 불법적인 수단을 잡아내지 못하지? 혹시 경찰에 물 먹인 그 남자 편을 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신경 끊어. 왜 여기 와서 그러는 데?”
“아니 사이다패스 사건에 대해서 생각 좀 해보려고. 아무래도 본격 수사팀들에서는 다들 날 어린 여자라고 무시하잖아.”
경찰도 대한민국 관료조직이다 보니 조직문화가 경직되어 있다.
아무리 성신아가 경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라 해도 강력범죄 현장에서 여성 경찰의 역할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성신아가 그래도 현장에서 존중받는 건 법의학과 그에 따른 수사 프로세스를 굉장히 잘 지킨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현장 자료 좀 보여줘.”
“마포경찰서에서 대체 왜 관심을 보이는 데? 뭐 공 세워서 승진하려고? 아이고 부잣집 영애가 박봉 공무원 밥그릇까지 빼앗으려고 하네.”
“그래. 그러려고 그런다.”
“흠. 여기.”
성신아는 류하리에게 툭툭대면서도 김중헌 의원 살해현장을 찍은 자료 사진들과 그 분석데이터들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지문은 안 묻었고 비서는 일격에 기절, 의원은 한 방에 죽였어. 재주도 좋아. 보통 사무실에 같이 있는 사람들을 실수로 죽이거나 해야지 어떻게 이렇게 안 죽이고 기절만 시킬 수 있지?”
사람을 때려서 기절시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데미지 컨트롤이 안 되면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그렇지 않고 기절하지 않고 의식이 있으면 소리를 질러서 소란을 키운다.
‘뭐 계약자니까 가능한 거겠지만 확실히, 일반 인간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짓이구나.’
사이다패스가 계약자라는 걸 알고 있는 류하리는 자료를 살펴보면서 혀를 찼다.
역시 수사 자료를 보면 남는 게 없다.
“검찰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대?”
“검찰에서는 CCTV가 하나도 남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CCTV업체를 조사하고 있는데… 조사는 힘든데 성과는 없어.”
“흠.”
“그래서 말인데 그 탐정은 뭐 없대?”
성신아는 시현이 뭔가 의견이나 새로운 발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 사건에 아예 관심이 없어.”
“관심이 없다고? 전국의 누구나 다 관심을 보이는 이런 연쇄살인사건을? 이걸 해결하면 그야 말로 전국적인 영웅이 될 텐데? 단숨에 탐정업계의 최정상이 되어서 돈을 갈퀴로 긁을 걸?”
“그러니까 그런 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돈에 관심이 없다고?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돈에 환장하는 법이야.”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