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파격 약혼? #4
“아니 그러니까 그건 자기 입으로 말할 경우에 그렇잖아. 내가 보니까 그 남자는 돈에 정말 관심이 없어. 돈은 이미 많더라니까.”
“오 많아? 얼마나?”
시현이 돈이 많다는 말에 성신아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글쎄?”
류하리는 대충 시현의 재산을 헤아리다가 그만뒀다.
옆에서 본 바로는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사업체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현상금에 목매지 않아도 될 정도는 벌 것이다.
“이거 또 부잣집 영애인 류하리 경위님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네. 그게 한강건재 따님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많다는 거야? 아니면 거지같은 서민들 사이에서 그나마 밥은 안 굶고 다니네? 뭐 그런 거야?”
“넌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때 류하리의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고모님의 전화였다.
“음… 네. 류하리에요.”
[하리니? 축하한다. 축하해.]
“축하요? 뭘요?”
[약혼 축하한다고.]
“네? 약혼이요? 누구요? 저요?”
류하리는 깜짝 놀랐다.
[그래. 그 검사 남자친구랑 약혼한다며? 음 교회에선 좀 안 좋은 소문이 있던데 그래도 너희 아빠가 인정했다잖니. 너희 아빠 눈썰미가 어디 보통 눈썰미니?]
“그러니까, 최형림 선배랑 제가 약혼이라고요? 아버지 인정 하에?”
“뭐?”
옆에서 듣고 있던 성신아도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그보다 교회에서 최형림 선배에게 안 좋은 소문이 있다는 건 뭐에요?”
[아 그게 최 회장님이랑 사이가 아주 안 좋대. 회사 안물려줄거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하지만 하리 네가 뒷바라지 잘하고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떡 하니 안겨드리면 최 회장님도 마음이 변할 거 아니니. 오호호. 노인네들 다 그래.]
“………”
만약 숙모님의 생각이 앞서나가는 속도를 따라잡을 만큼 빠른 우주선을 인류가 만들 수 있다면 인류는 이미 은하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성간문명을 건설했으리라.
당사자인 류하리는 약혼부터가 금시초문인데 왜 벌써부터 손주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인가?
“자, 잠시 만요. 바빠서 이만 끊을게요.”
류하리는 전화를 끊고 황망한 표정으로 성신아를 바라보았다.
성신아의 표정은 아주 시기와 질투로 불타올라 지금이라도 칼들고 뛰어들 것 같은 기세였다.
“아, 네. 약혼을 하셨습니까? 류 경위님. 떡두꺼비 같은 재벌가 손주를 낳으셔서 저 출산 사회에 애국 애족하시겠군요.”
“아냐. 이게 처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너야 말로 어떻게 된 거야? 나와 함께 여경의 몸으로 경찰계의 톱이 되자는 약속은 어쩌고?”
“…그런 약속 안했어.”
“아 나 진짜. 누가 부잣집 딸내미 아니랄까봐, 어이가 없네.”
“나도 금시초문이야. 이게 어, 어떻게 된 건지 일단 집에 가서 따져봐야 겠어.”
“그래. 그래라. 나는 그 탐정에게 이야기나 해줘야겠다.”
“뭐? 하지마 너!”
류하리는 시현에게 알려야겠다는 성신아의 태도에 당황했다.
“왜?”
“아니 왜 그 사람에게 말하는 건데?”
“아니 그럼 왜 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이런 경사스러운 일은 만천하에 알려야지….”
“너 진짜….”
“됐고, 나 일어난다.”
성신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하아.”
성신아는 전철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좀 충격이네.”
류하리가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최형림과 류하리의 약혼이라는 건 집안끼리 이야기가 되어서 진행하는 것이리라.
결국 류하리나 최형림이나 그녀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종족들이다.
‘손닿는 거리에 있어서 같은 종족이라고 착각했지 뭐야.’
그런 점에서 충격이 컸다.
“으 심란해. 응?”
그런데 그때 전철 옆 블록에서 시현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시현은 성신아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으로 인사했다.
“의외의 장소에서 뵙는 군요.”
“아 네. 당신도 어쩌다 여기에?”
“뭐 제 업종이 일하다보면 전국 방방곡곡 다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 경위님은 왜 그런….”
“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류하리 앞에서는 그녀의 약혼 사실을 시현에게 알리겠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지 진담은 아니었다.
이런 일을 남에게 떠벌려서 좋을 게 뭐 있겠냐.
“사이다패스가 다시 등장한 것 때문인가요?”
“하, 네. 그래요. 일이 많아졌네요.”
성신아는 자신의 상황을 넘겨짚는 시현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시현이 고개를 절래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군요.”
“네?”
“지금 이건 4호선 전철이고 김중헌 의원 살인 현장은 안양. 안양에 들렀다 가시는 것 같은데 만약 일이 많아서 고생할 정도라면 성신아 경위님은 경찰차로 이동하고 있었겠지요.”
“…….”
성신아는 시현의 정확한 지적에 혀를 내둘렀다.
‘류하리가 이 남자 말 믿지 말라고 했지? 사전 조사하고서 마치 현장에서 바로 추리한 것처럼 뻥카를 장난 아니게 쳐댄다고?’
하지만 사전 조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당신은 왜 그럼 여기에?”
“경마장이요.”
“네?”
“사람 추적하려고 경마장에 갔다 가는 길입니다.”
“아 그렇군요.”
성신아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탐정의 업무 중에 그런 게 있지.
“그럼 시간은 괜찮나요? 괜찮다면 잠깐 이야기라도?”
“네. 그러지요.”
시현과 성신아는 가까운 역에서 내려 역 근처의 카페에 가서 앉았다.
* * *
“우선 최근 사이다패스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성신아는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딱히 생각이 없습니다.”
“네? 전국이 다 떠들석 하는 데도요?”
“시현 탐정 사무소는 고객만족이 최우선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객만족도를 더 높일 수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 가득차서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군요.”
고객에게 돈 받고 서비스하는 게 내 일이지 공짜로 경찰들 좋으라고 일할 거 아니다.
조언 단계에서는 어차피 현상금도 안 줄 거면서.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왜요?”
“아니 고객만족을 위해서 머리가 꽉 찼다니 그런 건 대기업 이미지 광고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당신이 하는 군요. 수사에 현상금도 붙었고 성공하면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되는 일인데 정말 관심이 없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여간 증거가 남지 않나보군요.”
시현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본 성신아는 어떤 의미로는 감탄했다.
‘류하리가 말하는 게 맞구나. 이 남자는 정말 관심이 없네?’
못하니까 포기했다. 그런 게 아니다.
정말 자기 일 아니면 눈 깜빡 안하는 사람인 것 같다.
“탐정 일은 보람찬가요?”
“고객님의 만족이 곧 저의 만족이지요. 현재로서는 매우 보람찹니다만.”
“…그, 그런가요.”
“그런 걸 물어보시니 뭔가 심란한 일이 있나보군요.”
“음. 아니 그러니까 후. 사실 저는 나름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괜찮거든요.”
“…….”
“자기 입으로 말해서 좀 깨나요?”
“아뇨. 요즘은 자기 PR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의 장점을 어필하는 건 마케팅의 기본이지요. 자기 입에 올리지도 못할 거짓말로 남에게 광고를 시킬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경찰이 되고 나서는 뭔가 학창시절처럼 그렇게 잘 풀리지 않네요. 게다가 그, 뭐랄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뭔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쫓아갈 순 없구나 싶어서요. 당장 이 서울에서 집값 오르는 것 봐요. 경찰 월급으로 대체 어떻게 사라는 건지.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가질 거 다 가지고 재주도 뛰어난 애가 나랑 비슷한 또래에 약혼이라니….”
“…….”
시현이 그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흠. 혹시 류하리 경위 말하는 겁니까?”
“아,”
성신아는 당황했다.
어지간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추리하면서 생각이 빠른 시현은 성신아가 살짝 운을 떼는 것만으로도 누굴 말하는 지 눈치 챈 것이었다.
‘음, 이건 내가 말한 거 아냐. 그렇지? 아, 아냐. 퍽이나 그렇겠다. 류하리가 보면 정말 내가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친 거로 보이겠지. 아니 그런데 말한다고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예비 유부녀가 총각에게 추파 던질 것도 아니고?’
성신아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흐음. 그러니까 성신아 경위님은, 류하리 경위와 최형림 검사가 약혼했다는 걸 알았다는 거군요.”
“아, 그, 그게. 제가 그걸 말하면 안 되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딱히 말할 것도 아닌 걸요. 다만 흠… 재미있군요.”
“뭐가요?”
“성신아 경위님은 최형림 검사를 노리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어째 류하리 경위의 재주를 더 아까워하는 것 같군요.”
최형림을 빼앗겨서(?) 아쉬워한다기보다는 류하리가 경찰을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것에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
시현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아니 뭐 물론 속상하긴 하지요. 이제 와서 제 주위에 최형림 선배 같은 스펙의 남자가 어디 있다고….”
다만 빼앗겨서 아쉬워 할 만큼 깊은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
‘무엇보다도 검사라는 게 굉장히 바쁜 직업이더라고. 사적인 시간이 나야 어떻게 꼬셔보던가 하지. 왜 검사들이 다 중매로 결혼하는지 대충 알겠다.’
결국 성신아가 지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은 최형림을 빼앗겼다는 것 보다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격차와, 류하리 때문이다.
“자신의 경쟁자가 집안 문제로 정략적 약혼 같은 걸 하는 게 아깝다. 그겁니까?”
“…그, 그야. 류하리가 저보다 성적이 더 좋았잖아요. 걔가 수석이라고요 수석. 그런데 그런 애가 취집으로 그렇게 커리어를 날려버리는 건 좀… 하다못해 나에게 실력으로 발려서 깨지고 난 뒤면 모를까. 주구장창 날 이겨놓고서 그냥 부자들끼리 결혼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왜 도둑맞은 가난이라는 말이 있듯이… 도둑맞은 스펙, 도둑맞은 열정, 뭐 그런 허탈함이 있네요.”
“결혼해도 경찰은 계속 할 수 있잖습니까?”
“농담하시는 거죠? 재벌가 며느리에게 경찰 같은 걸 시키겠어요? 재벌가가 자기들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건 유전자에요 유전자. 얼마나 똑똑해서 후대를 낳을 때 어느 정도 지능이 보장되느냐? 그런 거지 뭘 경찰을 하게 내버려 두겠어요?”
“후후후.”
시현은 그런 성신아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냥 성신아 경위님은 어지간히도 류하리 경위를 좋아하는 군요.”
“켁. 그런 거 아니에요.”
성신아는 시현의 지적에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데 당신은 괜찮으세요?”
“뭐가 말입니까?”
“아니 류하리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제가 말입니까?”
“네.”
“흠. 글쎄요.”
시현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관심이 없다면 거짓이겠지요. 그렇지만 절 노리는 놈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서 제가 그녀에게 집착한다면 그녀를 해치려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