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소울 브라더 #3
퇴근시간이 되면서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시현은 차량의 크루즈 모드를 켜고 운전석에서 핸들을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류하리는 조수석에 앉아서 시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해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할 때 정말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
“제가 집착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할까요?”
“?”
류하리는 시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든 류하리는 깜짝 놀랐다.
최형림의 전화였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 참.”
류하리는 전화를 끊을까, 아니면 받을까 고민했다.
“사적인 대화입니까? 제가 귀라도 막아야 할까요?”
“…아, 아뇨.”
류하리는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냈다.
[지금 바빠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
그렇게 보내자 답문이 날아왔다.
[경찰서가 아니신가 보군요. 이번에 약혼예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던데… 일단 저는 약혼 예물에 대해서는 거절하려 했습니다만 저 만의 일이 아니니 서로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결정해야 겠더군요.]
“……….”
류하리는 당황해서 옆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그녀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 눈이 아무리 좋아도 지금 운전 중에 이 작은 휴대폰 화면을 보고 대화를 읽어내진 않겠지. 아, 아니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벌벌 떨고 있지? 죄지은 사람 마냥?’
류하리는 아직 최형림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것을 시현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현이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보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없다! 전혀 없다!
제 발 저릴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제 발이 저리다.
[저도 예물에는 반대에요. 애초에 약혼이라는 것부터가 요즘 세상에 굉장히 고리타분한 이야기인데….]
[바로 그 고리타분한 상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그런데 류 경위님, 혹시 아버님이 대체 누구를 신경 써서 이런 약혼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버님이 눈치 보는 상대라도?]
최형림은 이 약혼이 대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류하리의 부친, 류장천 회장은 자기 기업의 절대적인 주인이다.
그런데 대체 누구를 경계해서 굳이 약혼이란 형태로 최형림과의 접촉을 합리화 하려고 하는 것일까?
다양한 국가 정보망에 접근 가능한 신분인 최형림으로서도 류장천 회장이 누구 눈치를 보는지 몰라서 직접 류하리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글쎄요. 아버지의 일은 저도 잘….]
[그렇습니까? 의외로군요. 류 경위님이라면 아버님 사업에 어떻게든 관심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
류하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류장천 회장과 그가 데리고 다니는 영업이사, 영사는 누가 보더라도 암흑가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류하리는 자기 아버지 일을 들춰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아.]
그런데 갑자기 전화기에 문자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시현의 전화기에도 일제히 문자가 밀려들어왔다.
뭔가 사회에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큰일 났군요. 서울 한복판에서 차량 폭발이라니… 바빠지겠군요.]
최형림은 그리 말하고 뉴스링크를 보내주었다.
그 뉴스 링크를 본 류하리는 깜짝 놀랐다.
“어….”
“뭡니까?”
“운전 중에 봐도 괜찮아요?”
“크루즈 컨트롤 중이라 괜찮습니다. 흠. 아….”
뉴스에는 신바울 목사 일가가 폭탄테러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올라와 있었다.
* * *
신바울 목사는 바로 신경호 위원장의 부친이었다.
다비치 선교회의 담임목사인 그는 집사 권사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갑자기 차량 폭발에 휩쓸려 사망하고 말았다.
신바울 목사의 아내와 딸까지 함께 폭발에 휩쓸려 전부 사망하고 만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런….”
시현은 그 뉴스를 보고 혀를 찼다.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요?”
“이거 참. 계약을 잘못했군요.”
“네? 계약을 잘못했다니요? 신경호 위원장과 계약한 것 말인가요?”
“신경호 위원장은 절 보고 자신을 경호해달라고 계약했었지요. 조기석이 자신을 죽이려든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사정이 달라질 겁니다. 그가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 조기석을 죽일 거예요.”
시현은 혀를 차고 눈을 빛냈다
다행히 신경호에게는 태그를 박아두어서 그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
남은 수명은 이제 6일 남짓, 하지만 이건 신경호 위원장이 살해당해서가 아니다.
“정치를 하려는 자가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일까요? 사람을 죽이면 모든 걸 잃는데?”
“이미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지요. 애초에 신경호 위원장의 정치력은 신바울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겁니다. 신바울 목사가 가진 인적 네트워크와 금전적 지원이 있으니까 그가 그 나이에 정치에 전념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청년 위원장이라는 게 이름은 번드르르 하지만 당에서 지원해주는 돈은 쥐꼬리만 하고, 일은 많아서 아마 자기 생계를 돌보기도 힘들 텐데 어디서 돈이 나서 정치활동을 계속하겠습니까? 부모님 없으면 끝장인 겁니다.”
“그럼 아버지가 죽었으니 모든 걸 잃은 김에 복수한다고요?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무엇보다도 폭탄 테러를 당했으면 본인도 살해당할 까봐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신경호 위원장은 조기석 씨에게만은 머리를 굽힐 수 없습니다. 그런 사이지요.”
아무리 조기석이 폭탄 테러를 하건 사람을 죽이건 해도 신경호 입장에서는 절대로 머리를 숙일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문제는 제가 살인을 당할 사람이 아니라 하려는 사람이랑 경호 계약을 맺었다는 게 문제겠군요. 이래서야… 죽겠는데요?”
“당신 수명은 현재 얼마나 남아있는데요?”
“이제 20일이요. 문제는 이번 계약을 실패하게 되면 타자기의 악마가 다시 31일을 넘기기 전까지, 제게 계약자를 구해줘야 할 의무에서 면책됩니다.”
시현이 타자기의 악마와 맺은 계약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타자기의 악마에게 계약자를 구해줘야 할 의무를 지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기의 악마가 계약자를 구해왔는데 그 계약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시현이 타자기의 악마에게 승리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다.
악마와 계약한 시현은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저 악마들에게 끔찍하게 유린당하겠지.
언제나 여유 자적하던 시현이지만 지금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류하리는 시현이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흠 아니 정리됐다.”
뭐가?
류하리가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시현의 표정이 어느새 평상시로 돌아와 있었다.
“전화 좀 걸겠습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전화를 걸었다.
* * *
시현은 신경호 위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신경호입니다.]
“괜찮으십니까? 고객님?”
[괜찮냐고요?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 겁니까? 저는 방금 모든 걸 잃었습니다. 모든 걸요! 조기석 이 미친놈이 설마 우리 가족을 해치다니!]
신경호 위원장은 격분했다.
[나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할 병신새끼가 좋게 좋게 봐주니까 어떻게 이런 짓을…?]
아무래도 공포심보다는 분노가 앞서는 것 같았다.
폭발테러로 온가족이 몰살당했음에도 조기석은 두려워하기엔 너무나 만만한 상대였나?
‘위험하네 이거.’
류하리는 신경호 위원장이 머리끝까지 분개하는 걸 보며 걱정했다.
신경호 위원장은 조기석을 평생 깔보고 살아왔다.
설령 조기석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 밀어도 그에게 굴복하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상하관계가 오래 고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조기석이 자신의 가족, 자신의 미래를 파멸시켰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사이다패스건 살인예술가건, 아니면 본인 스스로의 능력으로건 조기석에게 보복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으리라.
이래서야 시현이 죽게 생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죄송합니다만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시현은 신경호 위원장에게 그렇게 말했다.
“에?”
옆에서 듣고 있던 류하리가 깜짝 놀랐다.
다 죽게 생긴 주제에 시현의 목소리가 너무나 침착했기 때문이다.
평소의 그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사람들의 성질을 건드리는, 그런 빈정거리는 듯 한 말투였다.
[뭐? 오해? 무슨 오해?]
“이번 사건의 주범은 조기석이 아닙니다.”
시현이 그렇게 단언했다.
류하리는 내심 경악했다.
‘뭐야 이 남자. 미쳤나? 분명히 방금 전에 자기 입으로….’
조기석처럼 공돌이 기질이 강하고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사람을 직접 죽이기보다 독가스나 폭발물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타겟인 신경호 위원장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말려들게 할 수 있으니 막아야 한다.
그게 시현의 주장 아니었나?
그리고 실제로 시현의 예측대로 폭발물 테러가 발생해 신바울 목사와 그 일가를 살해했다.
그런데 어째서 시현은 이제 와서 조기석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물론 신경호 위원장이 여기서 범인을 조기석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날뛰면 시현도 덩달아 위험해진다.
정치에 뜻을 품고 있던 신경호가 자신의 손으로 자기 친구를 죽이게 된다면 그는 재기불능이 된다.
사적 제재, 원한 살인을 저지른 자가 정계에서 활동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신경호의 행동을 막겠다고 이러는 거라면, 이해는 가지만 쌩 거짓말 아닌가?
누가 보더라도 지금 폭탄 테러는 조기석이 한 건데?
과연 신경호 위원장도 시현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당신 지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떠드는 거야? 지금 자신이 하는 말 책임질 수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책임이고 뭐고 간에 사무실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테러 위협이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경찰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게 낫겠습니다만….”
[경찰? 조기석 그놈이 무서워서 경찰에 몸을 맡기라고? 그러면 뭐? 이제 와서 죽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하나? 웃기지 마. 어차피 난 모든 걸 다 잃었어!]
신경호 위원장은 코웃음 쳤다.
“복수를 원하고 계신가 보군요. 그렇다면 제가 문자로 세이프 하우스를 지정해 드릴 테니 경호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피신하시길 바랍니다.”
[뭐? 무슨 뜻이야 그게?]
“사무실이나 자택으로 돌아가면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그게 아니라…. 이번 사건의 주범이 조기석이 아니라는 거 말야! 설마 주범은 아니고 종범이다. 뭐 그런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위원장의 목소리엔 분노가 짙게 깔려 있었다.
함부로 말장난을 했다가는 지금이라도 사람 생살을 씹을 것 같은 노기가 느껴진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