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소울 브라더 #8
“제길, 웃기지 마. 이 자식! 용서가 안 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조기석이 멋대로 자신을 피해자인양 말하고 있지만 이 자식이 처음에는 신이 나서 기쁘게 협력했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이 자식을 용서하란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걸 권유한 시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신경호 위원장을 바라보았다.
“뭐 용서가 안 되신다면 직접 손을 더럽히면서 처리하시는 것도 방법입니다만, 당신이 그의 소스코드를 빼앗은 것도 사실 아닙니까? ‘갈륨-인듐 AESA레이더의 위상 대수학적 해석 최적화 이론.’ 이런 소스코드를 석박사 통합과정에서 튕겨나간 프로그래머가 짤 수 있다니 조기석 씨가 확실히 천재긴 천재군요.”
“으음.”
방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신경호는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
그가 조기석의 소스코드를 훔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니 나는 그, 훔치려고 한 게 아니야. 나중에 분명히 제대로 보상하려고 했어! 하지만 주위에서 자꾸 날 보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비웃잖아! 그래서 보란 듯이 내세울 만한 공적이니까!”
“조기석 씨가 한 거지요.”
“그 자식은 변태라고! 어차피 이미 평판은 말아먹었잖아! 그에 비하면 정치판에 굴러먹고 있는 내가 더 급해! 이 사업으로 내가 평판이 좋아져서 의회에 입성하면 어련히 자길 안 챙겨 줄까봐 그 잠깐 새를 못 기다리고 자기가 했다고, 날 도둑이라고 몰면서 결국 우리 아버지 죽이는 데도 가담을 해?!”
“분명히 말해서 조기석 씨는 악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악의일 뿐이지 살의는 아니죠. 살의는 김상기 목사 일파에 있었고 조기석 씨는 그에 편승해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죄를 사적으로 처벌하겠다고 하시면 저야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니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그런 식이면 조기석 씨도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군요.”
시현의 말에 신경호도 입을 다물었다.
겨우 진정한 신경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시현에게 다시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 절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경찰은 지금 조기석 씨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수배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그걸 당신이 뒤집는 겁니다.”
“제가요?”
“네. 그렇게 하면 당신의 유능함을 입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절 보고 지금 조기석을 철저히 이 사건의 희생양으로 배제시키라는 소린데?”
조기석이 만약 이들의 공범으로 처리된다면 신경호의 유능함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모두다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놈이 주범은 아니고 공범이라더라.
이렇게 되면 임팩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조기석은 범인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요당한 희생양.
그렇게 되어야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역시 현명하시군요.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아니 말입니다.”
시현이 씩 웃었다.
“이로서 두 고객님의 니즈가 같은 방향으로 통합되었군요. 저희 탐정 사무소로서는 더 많은 고객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
때리고 싶다.
그러나 시현의 체격을 보니 손댔다간 오히려 맞아죽을 것 같다.
“그럼 당신은 정말, 저와 조기석, 둘 다에게 수명을 받아내려고?”
“물론이지요.”
시현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 * *
신경호 선진당 청년 위원장은 선진당 당사관리팀에 연락해 기자회견을 열려 하니 기자회견실을 대절해도 되겠느냐고 연락을 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진당은 기자회견실 대절을 거부했다.
[신경호 위원장님. 죄송하지만 이것은 당무와는 별개인 게 아닌지요? 게다가 폭탄 테러라도 일어나면… 위험하잖습니까?]
당 실무 팀은 신경호 위원장의 기자회견실 대절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니까 자기네 앞마당에서 폭탄 터지면 곤란하니까 안 된다.
그 소리였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당원이 위험에 처했다고 모르는 체 하다니.”
[그게 아니라 폭탄 테러범에게 노려지고 있는데 굳이 언론을 불러서 일을 키우실 필요가 있냐고 조언하는 거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당사 앞에 길에서 하지요.”
[그건 또 곤란합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그럼 뭐? 당이랑 아무 관련 없는데 어디 예식장이라도 빌려서 할까요?”
[그것도 괜찮군요. 요새는 예식장이라고 안하고 컨벤션 센터라고 하잖습니까? 행사장으로 쓰라고 있는 곳이니 장소의 본질에 딱 맞는 군요.]
“...........”
이쪽은 어이가 없어서 빈정거린 건데 저쪽은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경호 위원장은 짜증을 내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양복을 빼입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한 비서가 서 있었다.
정치가 비서 모드가 된 시현이었다.
“어떻게 하지요. 비서 씨?”
“후후. 염려마시길. 이런 때를 위해서 정당정치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현은 그리 말하고 전화번호를 찍고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여기는?”
“민생당입니다.”
“미, 민생당?”
신경호 위원장은 당황했다.
민생당이라면 민주생명당, 선진당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네. 민주생명당 관리팀입니다.]
“아 저, 선진당의 청년위원장 신경호라고 합니다.”
[네? 선진당 신경호님이요?]
“네. 그게….”
그때 시현이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기자회견실을 대절하고자 하는데요.”
[네?]
“그게 선진당에서 기자회견실을 대절을 거절해서요. 몇 가지 조사사항 발표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만 관련 자료를 넘길까요?”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화기 너머에서 뭔가가 바삐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쪽에서 답신이 왔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쓰실 겁니까?]
* * *
그리하여 선진당 청년위원장인 신경호의 황당무계한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신경호는 시현이 준비해준 자료를 자신의 사무실에서 따로 조사해서 밝혀낸 사실이라고, 자신의 공로로 바꾸어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김상기 목사 일당의 악행들과 그에 관련된 증거들, 그 과정에서 조기석은 그저 납치당해서 강요를 받았을 뿐이라는 것 까지 소상히 밝혀낸 것이었다.
발표 내용을 보면 신경호 사무실의 조사능력이 너무나 놀랍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째서 선진당의 당직자인 신경호 위원장이 하필이면 민생당 당사의 기자회견실을 빌려서 기자회견을 갖는가?
그 점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저희 쪽에서 따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신경호의 비서 모드가 된 시현은 기자들을 구워삶을 줄 알았다.
다들 궁금해서 몸이 닳아있는 데 바로 말해주지 않고 충분히 뜸을 들인다.
호기심은 충족되지 않을 때 가장 기승을 부리는 법, 시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며 그들을 조련하는 것이다.
물론 유능한 기자들은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민생당 쪽에 접근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간혹 시현에게 다가오는 이도 있었다.
“재밌는 짓을 하는 군.”
시현과 안면이 있는 K 신문의 장기정 기자가 다가왔다.
하지만 짐짓 시현은 모르는 체 했다.
“왜 그러나?”
“뜸 들이고 있는 중이라 지금 저희 측에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요. 그리고 장 기자 님 당신은 충분히 지금 상황을 알 만하지 않습니까?”
“아니 내가 재밌어 하는 건 왜 신경호의 비서 같은 짓을 하냐는 거지. 당신은 신경호라는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장기정은 시현이 신경호 같은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경호는 절대로 시현의 타입이 아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아버지가 죽어도 눈 하나 깜빡 않는 인물.
물론 그것은 대부분의 부자관계가 그러하다.
“일하는 데 사적 감정을 개입시키면 프로라고 할 수 없지요.”
“왜 그렇게 간드러지게 말하나?”
“그야 지금은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정치가의 비서 아닙니까? 어찌 제가 감히 장 기자 님처럼 언론에 기여가 많으신 분께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비서라니 무슨, 또 그놈의 고객만족인가. 하지만 이거 이러면 선진당에 대놓고 욕 박는 거나 다름없는데.”
선진당의 청년위원장이라는 자가 굳이 민생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내막을 따져보면 아마도 선진당에서는 기자회견을 열지 말라고 압박했거나 열더라도 다른 곳에서 하라고 한 거겠지.
고참 기자인 장기정은 굳이 시현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그 내막을 알 수 있었다.
‘민생당 입장에서는 방금 전 까지 적이었던 녀석을 품에 안는 셈이 되는데…. 신경호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면서도 독이 든 성배라는 게 문제군.’
어딜 가나 정치판은 젊은이가 없다.
정치를 하는 데는 많은 돈과 인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경호 위원장은 선진당 입장에서는 그 젊은 층에 어필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당내에서는 그에게 좋은 자리를 주지 않았다.
당권을 쥐고 있는 노인들 입장에서 신경호는 당에 아무런 기여도 없이 찡얼대는 애새끼에 불과했다.
그런 놈이 젊은 유권자들이 내 편이니까 나에게 한자리 달라고 해봤자 들어줄 리가 없다.
물론 젊은 유권자의 표는 아쉽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 젊은이에게 귀한 비례 대표 자리를 내줄 건 아니다.
그런 당내 높으신 분들의 속내를 잘 알고 있기에 신경호는 당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당을 위해서 스스로 싸움닭이 되어 거침없는 발언을 해대고, 당이 정한 말도 안 되는 경쟁자가 있는 지역구에 스스로 출마해서 상대의 승리에 초를 친다.
경쟁자 당의 거물에 대항해서 이쪽의 정치신인을 붙여서 그의 승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에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당을 위해 헌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당이 내준 건 청년위원장이라는 허울뿐인 당직, 그것도 아버지 신바울 목사가 죽은 후로는 슬슬 내팽개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신경호가, 아니 신경호에게 들러붙은 시현이 기사회생의 계책을 세웠다.
가장 몸값이 비쌀 때 이적하기.
선진당에게 엿을 먹이면서 언론의 이목을 끌어 모아 거기서 신경호의 유능함을 어필하고 자신에게 악플을 달고 다니던 조기석을 오히려 포용하는 대범함 마저 보이게 한 것이다.
기자들 입장에서야 선진당 사람이 민생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으니 그것만으로도 흥미는 보장.
민생당 입장에서도 선진당에 엿을 먹이겠다는 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아마도 그래서 민생당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 * *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 순진한 것이다.
민생당 역시 엘리트 주의자들의 집단인 건 마찬가지라서, 선진당의 신경호를 자기네 기자회견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게 해주면 선진당에 엿을 거하게 먹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허락해줄 리가 없다.
당장은 이득이 되겠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기득권 역시 공격당하기 때문이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