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88화 (188/269)

제188화

소울 브라더 #9

한 번 파격을 허용해버리면 가진 거 많은 쪽이 불리하다.

메이저 정당 쪽에서 다른 메이저 정당을 공격하기 위해 파격적인 수를 써버리면 군소정당들이 옳다구나 하고 자신들도 똑같은 짓을 저지르게 되고 이 경우 민생당이 더 많이 두들겨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당장 이득이 된다고 해서 그런 짓을 허용할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상대가 시현이라는 것이다.

‘시 의원인 도현숙 씨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걸로 보입니다만?’

시현은 과거 강남경찰서와 트러블이 있을 때 자신을 윤 회장에게 팔아넘겼던 선진당 시의원 도현숙을 틈나는 대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돈을 지불해서 윤 회장에게 자신을 팔아넘긴 일은 일단 없었던 걸로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방심하기엔 묘한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시현이 방심하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잠재적인 적을 그냥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를 감시하던 중 우연히 그녀가 민생당의 홍보의원, 홍영기 의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원래부터 연예계 출신이던 도현숙 의원과 방송계에서 잔뼈가 굵은 홍영기 의원은 방송국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옛 연인 관계였다.

그런데 시현이 도현숙 의원의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려주어서일까?

아니면 시현이 감시하기 전부터 이미 부적절한 관계였을까 모르겠지만 그들은 최근에 종종 따로 만나서 긴밀한 시간을 지냈다.

꺼져버린 옛 사랑의 잔불이 다시 그들을 불태우는 것인지, 아니면 시현이 배우자의 불륜을 밝혀주어서 실망한 도현숙이 보복성 불륜을 벌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불륜은 불륜.

정치권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들에게는 참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시현이 그걸 넌지시 이야기해주니 홍영기 의원은 매우 적극적으로 기자회견실 대절을 승인해 준 것이다.

“이야.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정작 그렇게 뒷공작으로 일을 진행시킨 시현은 시치미를 뚝 떼고 너스레를 떨었다.

* * *

그 후 시현은 기자들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선진당 당직자와 있었던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폭탄테러가 두려우니 당사 내의 기자회견실을 빌려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사 앞에서, 길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것도 추천하지 않는다. 노상에서 기자회견을 하면 시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

‘차라리 어디 예식장이나 컨벤션 센터를 빌려서 하던가?’

당직자가 이렇게 말하던 것을 흘려보내자 기자들은 신이 나서 그걸 그대로 받아써서 기사로 내보냈다.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내용이다.

게다가 그동안 당 내에서 막말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던 신경호 위원장이 아닌가?

당을 위해 최전선에서 구르던 젊은 청년위원이 당을 갈아타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하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선진당은 당연히 발칵 뒤집혀 졌고 여기에 대해서 신경호 청년위원회장은 청년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아예 당에서도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 대신 민생당에 입당하였으니 전 국민의 관심이 한데 몰린 가운데 무사히 이직, 아니 이적에 성공한 것이다.

경찰과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김상기 목사 일파를 살인과 횡령, 사기 등의 혐의로 체포했고 이 과정에서 조기석에게는 검찰이 기소를 포기함으로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납치당해서 일을 강요당했다는 조기석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을 매끄럽게 끝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민생당에서는 신경호에게 자신들의 당직자 자리를 제안했고 신경호는 내후년 있을 선거를 위해 민생당에 자리를 틀고 다시금 정치 인생을 이어가게 되었다.

* * *

“하아.”

류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군요. 분명히 신바울 목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당신도 놀랐었는데 그걸 이렇게 틀어버린 다고요? 게다가 선진당 관련자를 민생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시키다니!”

시현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신바울 목사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 답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까지 보였었다.

하지만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시현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말 한 달도 안 되어서 일들을 끝내버린다.

신경호의 계약을 완수했을 뿐 아니라 조기석까지 고객으로 끌어들여 의뢰를 청탁받고 완수해버린 것이다.

이래서야, 타자기의 악마가 이길 길이 안 보이는데?

류하리가 보니 이건 뭐, 타자기의 악마를 동정하고 싶은 심정이다.

“원래 진인사 대천명이라지요. 매 순간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열심히 경주함으로서 고객만족에의 길이 열리는 법입니다.”

“네. 고객만족 말이지요.”

류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고객(?)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만족하셨나요?”

검찰이 기소를 포기해서 풀려난 조기석이었다.

그는 시현의 사무실 응접실에 앉아서 사탕바구니를 뒤적거리다 류하리와 시선을 마주치자 헤벌쭉 웃었다.

“놀랍군요. 정말 놀라워요. 대단하군요. 감탄했습니다. 진짜.”

조기석은 그리 말하고 사탕을 꺼내서 입에 넣었다.

“다만 원래는 신경호에게 엿을 먹이고 싶었는데 너무 매끄럽게 처리된 게 좀 아쉽군요.”

“그에게 잡혀서 고문당하거나 감방에 가지 않게 된 것에 만족하지 못하십니까? 그리고 지적재산권도 인정받게 되었는데?”

시현은 조기석과 신경호의 사이를 중재해서 소스코드 도용 문제도 돈으로 해결 보게 했다.

조기석은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 듯 했다.

“전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병신 취급받았어요.”

“그야 뭐, 살짝 자업자득 아닌가요?”

듣고 있던 류하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여자 겨드랑이를 도촬하고 다녔는데 올바르고 교양 있는 사람대접을 해준다면 그건 현실사회가 아니다.

영화 '트루먼 쇼'처럼 인생 전체가 조작당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야 할 지경이지.

“그럴 때마다 신경호가 날 돕는다고 하면서 날 지배하고 장악했죠. 내 입장에서는 뭔가 날 이래저래 관리하려는 기분 나쁜 형 같은 놈이었습니다. 인간이란 같이 지내다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는데 전체적으로 빚을 지고 들어가다 보니까 나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성질을 낼 수가 없고 좋을 때는 지나치게 아부하게 되더군요. 그야말로 간신배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한 방 먹여줘서 대등한 관계가 되고 싶었나 보군요.”

“그런 것도 있고 너무 절 호구로 보니까요. 부끄럽게도 신경호가 없었으면 저도 여태껏 잘 지낼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사내가 되어가지고 평생 저 녀석 그늘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그걸 뼈저리게 와 닿게 한 게 그 소스코드 도용 사건이고요. 소스코드라고 하니까 뭐 간단한 프로그램 몇 줄 가지고 유세한다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이거 보통 기술이 아닙니다. 획기적으로 저렴한 컴퓨팅 파워로 최신 레이더를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제 야심작이에요.”

“이 정도 크게 한 방을 먹였으면 충분히 그늘에서는 벗어난 것 같군요. 그래서 만족하셨습니까?”

“네.”

조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산을 부탁드립니다.”

“정산이라면….”

“500만원에 남은 수명의 절반입니다.”

“수명이라. 음. 뭐 어쨌건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500만원이 없는데.”

“돈은 나중에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물론 국채 연동금리가 붙습니다만.”

“구, 구체적이군요.”

조기석은 당황하면서 정산을 선언했다.

“그럼 잠시... 이야기라도 할까요?”

시현은 조기석에게 정산을 받고 류하리에게 잠깐 사무실 안쪽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 * *

“그런데 남은 수명의 반이라니 많이 받았네요. 왜죠? 수명이 얼마나 남아있었길래? 별로 오래 못사나요? 아니면 계약이 꼬였을 때 당신을 열 받게 해서?”

“그럴 리가요. 저는 어디까지나 제 나름의 원칙에 입각해서 서비스 요금을 책정합니다. 이번 사건을 쉽게 해결한 것 같지만 확실히 제게 있어서는, 아마 류하리 경위님이 본 사건 중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산장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갑자기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 사건 보다도 더요?”

“그런 거야 뭐 일상다반사고 이쪽이 더 위험했지요.”

대체 어떻게 해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과거로 날아간 사건보다 이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는 소리가 성립하는지 모르겠다.

류하리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위협적이었나요?”

“왜냐면 조기석 씨는 분명히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네?”

“조기석 씨를 설득한 후에 신경호 위원장의 수명이 늘어났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음.”

류하리는 시현의 말을 듣고 혀를 찼다.

“사기적인 능력이긴 하네요. 확실히 그거.”

남의 수명을 볼 수 있고 원거리에서 파악도 가능하다.

류하리가 지금까지 알아본 바, 시현이 타자기의 악마와 계약해서 얻게 된 능력은 그러하다.

고작 남의 수명을 보는 능력이 뭐 대단한가 싶었지만 그런 게 아니다.

그걸로 인간의 살의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기석 씨의 마음먹기에 따라 신경호 위원장의 수명이 변동되었다는 건 즉 조기석 씨는 저 김상기 목사 일파의 부추김이 없더라도 진심으로 신경호 위원장을 자신의 손으로라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렇게나 홀가분하게 구는데요.”

류하리가 보기에 조기석은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그저 납치당해서 가담했을 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본인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경호가 살아남아서 정치생명을 이어나가는 데도 저런 홀가분한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을 속일 수 있지요. 어찌되었건 자신의 의지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래도 고객만족을 위해서 틀어놓았으니 이렇게라도 벌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비싸게 요금을 책정했다고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두 고객님들을 이렇게 설득하지 못했다면, 두 고객님들의 초창기 니즈, 욕구에 맞추어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했었다면 신경호 씨는 조기석에 대한 복수를 원했을 것입니다.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더럽혀야 하는 위기 상황이었지요.”

그 순간 류하리는 물끄러미 시현의 손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이렇게나 위법을 많이 저질러 놓고서도 자신의 손이 깨끗하다고 주장하나 싶어서요.”

손을 더럽히는 걸 위기라고 말한다는 건 바꿔 말하면 지금 자기 손은 깨끗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류하리가 보기엔 충분히 더러운데.

“분명히 법 앞에서는 위법하다 할 수 있지만 하늘을 우러러서는 한 점 부끄럼 없습니다.”

“아 네. 법 말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깨끗하다.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류하리는 뻔뻔한 소리를 하는 시현을 보며 빈정거렸다.

* * *

어린 시절부터 함께 거의 형제처럼 지내온 두 사람, 신경호와 조기석은 이렇게 본의 아니게 폭력적인 서열 정산을 끝마쳤다.

언제나 조기석을 자기 수족처럼 막 대하던 신경호는 이번 사건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이제 조기석은 신경호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대가로 남은 수명의 절반을 헌납해야 했지만 본인은 그걸 반신반의하고 있으니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 두 친우간의 관계가 재정립되면서, 대한민국 정계에도 아주 약간의, 그러나 훗날 큰 태풍이 되는 움직임이 있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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