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영사의 방식 #1
선진당 청년정책위원회에서는 청년위원장인 신경호에게 휴가를 권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말이 휴가일뿐이다.
당직활동이라는 게 출퇴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선긋기, 방출이라는 걸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기실 신경호 위원장은 지금까지 당을 위해서 많은 헌신을 했다.
투표 없이 그냥 배지를 받는 비례대표가 아니라 굳이 지역구 선거에 나서서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아 부으며 고생해서 몸소 당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그런 게 가능했던 것은 신경호 위원장이 신바울 목사의 아들이라서, 집이 유복해서 선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게 없어졌다고 토사구팽, 허울뿐이던 당직에서도 내팽개쳤다.
문제는 신경호가 그 후 바로 당에 커다란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네.”
선진당 당수 양천용 의원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직접 최형림을 만나고 있었다.
“내후년 선거 때 우리 당을 위해서 힘을 써줄 수 있겠는가?”
“제가 말입니까?”
최형림은 양천용 의원의 앞에서 시치미를 뗐다.
최형림은 권력을 원했다.
자신의 아버지 최중선 회장을 위협할 수 있는 권력을!
검사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형림이 예상치 못한 게 하나 있었으니....
검사가 되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검사가 되기 전엔 몰랐지.’
검사만 되면 아무나 다 수사하고 쥐고 흔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평검사 수준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평검사가 대기업 회장을 건드리면 그 위에 다른 검사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결국 그가 검사로서 아무리 빠르게 승진한다 하더라도 최중선 회장을 수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될 때쯤이면 이미 고령인 최중선 회장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최중선 회장의 살날이 그리 많지 않기에 최형림은 더 빨리, 더 강력하면서 독립적인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된다면 확실히 더 빨리 독자적인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
국정감사를 준비하겠다는 이유로 독자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고 수사팀들에게 관련 자료를 요청할 수도 있다.
사실상 독자적인 수사팀을 꾸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있으니 국회의원의 길은 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다.
그 길을 열어주겠다는 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하지만 최형림은 바보가 아니다.
당장 방금 전까지 당을 위해 헌신하던 신경호가 토사구팽 당하는 걸 보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라는 것 아닌가?
그러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최형림이 시치미를 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형림은 검사 출신이라서 신경호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았다.
신경호는 젊은 청년들을 위해 막말을 많이 함으로서 스스로의 품격을 깎아먹었다.
그 결과 비례대표가 아니면 지역구에서는 이기기 힘들다.
여성계나 다른 층에서 워낙 적을 많이 만들었으니까.
문제는 비례대표 자리는 지역구 공천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값비싼 티켓이라는 것이다.
반면 최형림은 이미 검사, 그리고 사이다패스 수사본부의 대변인을 수행해서 전국에 얼굴을 상당히 알린 인물이다.
잘생겼고 재벌가 아들이면서 검사출신이라는 그 강렬한 캐릭터는 지금 당장 지역구 선거에 나가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캐릭터다.
굳이 비싼 비례대표 자리를 줄 필요 없이 지역구 공천만 해줘도 알아서 선거에서 이기고 올라올 인물이다.
선진당 입장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캐릭터로 그동안 신경호 위원장을 써먹다가, 최형림이라는 캐릭터로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다.
선진당도 최형림도 서로서로에게 득이 되는 윈-윈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형림으로서는 아직 겸양해야 할 때였다.
지금 당장 좋다고 넙죽 받아들이기엔 지뢰가 많이 깔려있었다.
“부끄럽게도 사이다패스 수사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제가 검찰을 그만두고 정계에 가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성과가 나도 어떻게 나지 않겠는가?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말해주게. 아, 아니지. 현직 검사에게 정치적 중립은 의무이던가?”
양천용 의원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최형림이 정말 정치에 생각이 없으면 양천용 의원의 사무실 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 * *
“이야기는 잘 하셨습니까?”
영사가 최형림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류 회장님이 알선해주신 건가요?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별 말씀을 다 하시는 군요. 이젠 한 가족 아닙니까.”
“가족이라.”
최형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사가 기뻐하는 것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황이 좋군요. 신경호 위원장에게 이런 불상사가 생기다니. 이것도 당신의 소행입니까?”
“아닙니다. 이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터넷에서 조기석이 신경호 위원장을 향해 악담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영사는 살인예술가를 이용해 조기석에게 접촉하려고 했었지만 그가 접촉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김상기 목사 일당이 조기석을 낚아채간 뒤였다.
“덕분에 직접 손도 안대고 어부지리만 취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운이 좋으시군요.”
“운이 좋다?”
최형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분명히 그가 직접 손대지 않고도 일이 잘 풀리는 게 사실.
그렇지만 이번 한 번의 행운가지고 그가 평생 겪어온 불운과 고통을 다 운이 좋다고 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제 사무실에 다들 모이라고 해뒀습니다. 이번 상황을 일단 정리하고 이야기 해보시죠.”
영사는 지은재와 사이다패스를 불러두었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확실히 편하다.
최형림이 뭘 하고 싶은지 영사는 미리 알아채고 그보다 한 발 앞서서 준비를 해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최형림은 삼국지에서 양수를 처형시키던 조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이다패스와 살인예술가, 그 위험한 이들을 자의적으로 연락해서 손대는 군?’
최형림은 그들을 가급적 자신의 비장의 칼날로, 항상 허리에서 뽑아 쓸 수 있는 휴대용 무기처럼 다루고 싶었다.
아무리 그의 뜻을 위한 사전작업을 해준다 해도 영사가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내 인적, 물적 자원의 상당수는 이 남자에게서 나오지.’
최형림은 어느새 자신에게도 크게 다가온 영사에게 불쾌감을 느끼며 그의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강건재 영업이사, 영사의 개별 오피스.
그곳에는 최형림 검사와 지은재, 그리고 사이다패스와 영사가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신경호가 빠진 자리를 당신이 대신하기로 약속받았어?”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에게 물어보았다.
“예. 류장천 회장님 덕분에 선진당 당수께서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영사 씨에게 감사드려야 갰군요.”
“아닙니다. 제가 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건 추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어야 하지 않아?”
“아니 거 그거 있잖아요. 그거 뭐냐? 당 찍으면 자연히 국회의원 되는 거. 아 그거 뭐였지?”
지은재가 단어가 안 떠오르는 지 허공을 긁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비례대표?”
“네. 그거요.”
“풋.”
보고 있던 사이다패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군. 신경호라는 그 사람이 고꾸라져서 자리가 난 거 아냐?”
선진당의 청년위원장, 신경호가 민생당으로 당적을 바꾸게 되면서 선진당은 청년 인재라는 간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청운의 꿈을 품은 젊은이에게는 마침내 자리가 하나 났다.
그렇게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신 방식이네. 검찰에 윗사람들을 조져서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더니만 이번엔 경쟁자인 정치가를 당에서 쫓아내고? 이런 식으로 자기 앞길 방해되는 놈들을 하나하나 치우면서 전진하나? 대단한데? 지금 내가 그 협력자이긴 하지만 당신 정말 개새끼야. 지옥도 당신에게는 과분할 것 같은데? 웩.”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을 보며 역겹다는 듯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당신, 날 잡아야 하는 거 아냐? 이대로 사이다패스 사건에서 흐지부지 하면서 옮기는 건 좀 그럴 텐데?”
사이다패스는 최형림을 떠보았다.
최형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카드를 포기하라고요?”
“누가 원하는 사람을 죽여준대?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 맞아야지!”
사이다패스가 기분 나쁘다는 듯 으르렁 거렸지만, 최형림은 미소로 받아쳤다.
“당신이 날 아무리 혐오한다고 해도 잘 아시죠? 당신에게는 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당신은 꽤 영특한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 수집이나 표적 선정, 수사능력에서는 검사인 제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 검사를 그만두게 되면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지 않을까?”
“천만에요. 국회의원은 검사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처럼 윗사람 눈치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정감사를 위한 수사를 진행할 수 있거든요. 지금의 저는 평검사라서 뭔가 진행할 때 윗사람 눈치를 봐야 하지만 국회의원이 된다면 윗사람 눈치 볼 거 없이 마음대로 수사하고 부패한 법조인이나 관료들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흥. 정작 당신은? 부패한 놈들 중 아주 최악 아냐? 자기 앞길을 가로 막을 놈들을 차례차례 치워버리는 데?”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죽인 이들 중에 제게 크게 도움 되는 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상관을 죽였다고 제가 승진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법무부 특별대책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대국민 담화에 얼굴도 내비쳤잖아? 그게 정말 아무런 이득도 아니라고?”
“물론 그건 아닙니다. 분명히 이득이 있었지요.”
최형림은 사이다패스의 그간의 노고와 헌신을 치하했다.
“당신 덕분에 그간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검찰 조직이 마비되다 시피 했을 때 제가 그 빈 고리를 메우면서 제 자신의 유능함을 어필하고 평검사 치고는 수사권을 과하게 휘두를 수 있었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만 앞으로도 당신과의 협력관계는, 계속 필요할 것 같습니다.”
“쳇. 말은 잘해요. 사기꾼 자식. 하지만 뭐 아직은 참고 속아주지.”
사이다패스와 최형림은 여전히 서로서로를 반신반의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게 이득이다.
아니 정치가의 뜻을 품고 있다면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욱 더 중요하다.
‘이상한 놈이군. 검사이면서 살인자인 날 잡기보다 오히려 이용하고. 역시 이런 녀석은 꺼림칙해. 머리가 좋고 야심이 있는 녀석이라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겠단 말이지. 하지만 이 녀석이 없으면 나도 타겟 파악하기가 힘들지.’
사이다패스는 최형림과의 기묘한 관계를 생각하며 심경이 복잡해졌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