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영사의 방식 #3
잠시 후 시현과 류하리는 모 체인점의 국밥집에 앉아있었다.
“뭔가 이정도면 이제 고집이 느껴지는 군요.”
“어차피 내일 최 검사님과 근사한 저녁식사를 할 거 아닙니까? 너무 입맛 버리지 않게 적당히 먹지요. 그리고 탐정이나 경찰이나 수사를 끝마치면 국밥을 먹는 게 왠지 분위기 살고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네 그러네요. 수사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은 붙잡아다 뜨거운 국물을 코로 들이붓고 말이지요?”
“바로 그겁니다.”
“뭐가 바로 그거에요? 경찰의 명예를 너무 실추시키는 거 아닌가요? 그거?”
류하리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TV에서 특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 국토교통부 차관이며 현 한국도로공사 사장인 김기형이 사이다패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는 속보였다.
“와 또 전직 차관급 인사를 살해하다니. 사이다패스가 확실히 활동을 재개하는 군요.”
“그렇군요. 의외인데요?”
“의외라고요?”
“그녀가 아직 회복되었을 리가 없는데 말이죠.”
“아 당신이 공격해서요?”
“그보다는 그녀가 절 공격해서지요. 계약자들끼리는 서로서로 명확한 이해관계 없이 공격하는 게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들과 계약한 존재는 계약자를 소중히 여기는 편이거든요.”
“무슨 뜻인가요? 그게?”
“그러니까 우리 계약자들은 저 악마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장난감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장난감으로서 나름의 보호는 받고 있지요. 장난감들이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해 부서지는 건 납득할 수 있지만 갑자기 불합리하게 덤벼들어서 깨부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악마의 장난감. 적나라하군요.”
“사실이 그러니까요.”
시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사이다패스는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요건의 상대를 죽이겠다고 서원했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권력자라서 기성 사회의 법과 정의에 의해서 처벌받지 않는 존재들을 숙청하겠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보에 방해된다고 절 직접 공격했습니다. 그녀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렇게 빨리 회복되다니 꽤 편애 받고 있군요.”
“악마와 계약한 조건,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거군요. 그럼 당신이 사이다패스를 잡지 않는 건.”
“제 계약상 그녀를 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만약 의뢰인 중에 사이다패스를 잡아달라고 하는 이가 온다면 요?”
“그럼 잡아야지요. 하지만 이런 건 돈 의뢰가 아니라 수명 의뢰만이 성립할 겁니다. 그리고 사이다패스가 자신의 규칙을 확실히 지키고 산다면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제게 찾아올 청원자가 있을까요?”
사이다패스는 철저히 뒤가 구린 권력자들을 죽여 왔다.
그렇다면 그 유가족들도 감히 자신의 가족의 복수를 해달라고 시현에게 찾아올까?
특히 지금 죽는 자들은 성취의 성상납 리스트에 있던 이들인데?
즉 사이다패스에게 죽는 것 자체가 추문이다.
굳이 나서서 가족의 죽음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추문을 확대시키는 일이다.
굳이 나서서 그 추문을 확대시키고 여론의 뭇매를 맞는 짓을 유가족들이 할까?
차라리 남은 재산을 잘 간수해서 어떻게든 그의 공백을 메우는 쪽을 택할 것이다.
즉 사이다패스에게 살해당한 자들의 유가족이 시현에게 사이다패스를 잡아달라고 할 가능성은 한 없이 낮다.
“잡으려고 하면 잡을 수 있다는 거군요?”
“쉽지요.”
“..........”
류하리는 시현이 블러핑을 정말 잘 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풍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블러핑과 허세가 일상화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시현이 쉽다고 하면 정말 쉬운 거다.
‘경찰 검찰들이 몸 비틀며 용을 써도 못 잡는 상대를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아 하지만 이건 정말 사실인데? 크, 아깝다.’
류하리는 입맛을 다셨다.
“아까우신 모양이군요. 말씀드렸다 시피 계약자들끼리는 서로서로 싸워야 할 명백한 서사가 준비되어야 싸울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제가 재미삼아서, 혹은 상금이 탐나서 사이다패스를 잡겠다고 나서면 그건 제게 치명적인 일이 될 겁니다. 어디까지나 청원자가 나타나서 저와 계약을 맺고 사이다패스를 잡아주길 원해야 가능한 일이지요.”
“알겠어요. 다만 지금도 고생하는 직장동료들이 걱정되어서 그렇지요.”
“그리고 최형림 검사님도 그렇겠군요.”
“..........”
최형림 이야기가 나오자 류하리가 할 말이 없어졌다.
“약혼 축하드린다고 해야 할까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건 집안 문제라서요.”
“집안 문제라면 류장천 회장님이 밀어붙이셨나보군요. 최형림 씨를 정계에 진출 시킬 생각이신가 보죠?”
“아, 그건.”
그때 류하리의 전화기가 울렸다.
박진감 팀장이었다.
[류 경위 님. 빨리 와야 할 일이 생겼어.]
“네?”
[류 경위님이 알려준 대로 대림동 오피스텔에서 보이스피싱 총책이 잡혔는데 이놈 헤로인을 소지하고 있지 뭐야? 그래서 지금 수사가 확 커졌는데 또 지금 사이다패스가 사람을 죽여서 경찰서가 뒤집어졌어!]
사람이 필요하다. 박진감 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네. 아, 알겠습니다. 식사중이라서요. 끝나는 대로 곧 갈게요.”
류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힐끔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얼른 가보라고 그녀에게 손 인사했다.
“바쁘신가 보군요. 먼저 가시지요.”
“아, 저기…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공무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라.”
류하리는 왠지 시현에게 미안해져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 *
다음날 아침, 류하리는 성신아와 함께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러니까 재벌집 검사 아들 약혼자를 놔두고, 그것과는 별개로 잘생기고 유능한 젊은 탐정에게 중요한 첩보는 받아먹어서 그걸로 공을 세우셨다? 양다리를 걸치면서 양심의 가책을 살짝 느꼈다 이거네?”
성신아는 류하리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틀린 말 있어?”
“아니 맞지. 맞아. 맞는 말이야.”
“그래. 잘하는 짓이다. 아주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이 되겠구나? 너. 그러려면 고작 양다리 갖고 되겠니? 누구 하나 더 참한 놈 없어? 세 다리 네 다리 걸치지 그래?”
성신아는 류하리에게 빈정거렸다.
“내가 원해서 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그 탐정은 상부에서 시킨 일이라서 붙어있는 거고 최형림 선배는 집안에서….”
“그러네. 어느 것도 네 책임은 아니네. 변명거리까지 완벽하구나. 오. 대단해. 대단해. 그렇게 넌 도망칠 구석 마련해두고? 아주 비련의 여주인공 났어 진짜. 야. 진심으로 가슴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쳐 줄게. 찬탄의 박수 짝짝짝.”
성신아는 류하리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
이 주제 가지고 계속 말해봐야 류하리가 신나게 두들겨 맞겠다. 류하리는 얼른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이번 사건은 어때? 그 도로공사사장 사망한 사건은? 정말 사이다패스 소행이 맞아?”
“맞아. 틀림없대.”
“틀림없다고?”
“그래. 흉기가 전번이랑 같다는 데.”
“그 외에 특기 사항은 없고?”
“아 이번에는 좀 다른 게 있는데.”
“뭔데?”
“고문한 흔적이 있대.”
“고문?”
“단번에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면서 괴롭혔다는 거야.”
“괴롭혀? 맙소사.”
류하리는 사이다패스의 신체 스펙을 생각해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사람을 고문했다니 현장은 대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일까?
“그렇게 궁금하면 최형림 선배에게 물어보지 그래? 최형림 선배가 너라면 아주 말을 잘 해 줄텐데?”
“아니 그런 건 좀 그렇잖아?”
“나에게 물어보는 건 괜찮고?”
“넌 괜찮지.”
“나 참, 무슨 기준이래?”
성신아는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그럼 잘 해봐. 나는 또 일하러 가야겠다.”
“그, 그래.”
류하리는 혼자 떨떠름하게 테이블에 남아 있어서 생각에 잠겼다.
* * *
“어. 이거 서류로 뽑아야 하나요? 이사님? 요즘 세상에 서류로 직접 뽑는 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은재는 영사가 출력하라는 자료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것은 성취 리스트라고 불리는 성취의 상납 대상자들, 각계각층의 유력자들의 리스트였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증언된 이들, 성취 리스트에는 없지만 각종 권력형 범죄에 연루된 부자, 권력자, 경찰들의 명단이 있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페이퍼 없는 사무실을 목표로 해서 굳이 이런 종이를 출력하지 않는다.
종이로 출력해버리면 범죄의 증거만 더 늘어날 뿐 아닌가?
심지어 지은재도 그걸 걱정할 정도인데…. 그런데 영사는 종이를 출력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이다패스는 디지탈 장비에 약하니까요.”
“네?”
“그녀는 자기 명의의 휴대폰도 없습니다. 재가 마련한 선불폰을 쓰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종이 서류가 있는 게 더 좋겠지요.”
“음.”
“아 왔군요.”
영사가 말하기가 무섭게 응접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히 사무실 현관문은 닫혀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응접실에서 사이다패스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신기한 능력이군요.”
지은재는 감탄하면서 응접실로 향했다.
“아함. 젠장. 배고파. 야. 지은재. 뭐 먹을 거 없어?”
“어떤 걸로? 단거 짠거?”
“아무거나 가져와봐. 싱거운 것만 먹었더니 영 입맛이….”
“그럼.”
지은재는 자신이 먹으려던 컵라면을 내밀었다.
“뭐야? 고작 컵라면이야?”
사이다패스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일단 먹기 시작하자 잘 먹었다.
“후우. 좋았어. 간만에 먹으니 맛있네. 그래서, 반응은 어때?”
“꽤 좋습니다.”
“좋다고?”
“네 김기형 도로공사사장이 죽고 그의 부패가 낱낱이 드러났으니까요. 여론이 아주 좋습니다. 게다가 로비스트들 명단도 얻었으니 말이죠.”
“로비스트라.”
“권력자들에게 돈과 향응을 제공하며 녹여내는 전문가들이죠. 하지만 아마 이들은 당신의 손이 나갈만한 상대는 아닐 겁니다.”
영사도 사이다패스가 계약자이며 계약자인 이상 자신의 원래 계약 조건에 맞는 이들만 살해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지은재 군이 가도록 하지요.”
“네? 저요?”
“당신은 비교적 느슨한 발동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참 장점이지요.”
지은재는 이미 원한이 있는 자의 살의를 증폭시킨다.
누군가를 죽일 만큼 원한을 사지 않은 이는 죽이지 못하는 약점이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이다패스보다는 훨씬 폭넓은 타겟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로비스트라면 응당 누군가에게는 원한을 사지 않았겠는가?
“다만 지금처럼 다크 웹에 상대가 접속해서 청원을 직접 올려주길 바라면,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청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경우는 오프라인으로 직접 상대를 골라서 능력을 발동시켜볼 필요가 있겠군요.”
“그래? 한 번 보고 싶긴 하군. 지은재의 능력이 어떻게 쓸모가 있는지 보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