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92화 (192/269)

제192화

영사의 방식 #4

사이다패스는 자신을 힐끔힐끔 보고 있는 지은재를 보며 다 먹은 컵라면을 버리려 했다.

“아 버리지 말고 거기 놔두세요. 나중에 따로 버리겠습니다.”

“뭐? 그래준다면야. 그래서 언제 할 거지?”

“내일 할 겁니다.”

“내일?”

“예. 로비스트인 이영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앙심을 품은 자를 확정짓고 내일 만날 예정이거든요.”

“아하… 놀라운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찾아냈어?”

특정 로비스트의 이름을 알아내는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어떻게 그에게 원한이 있는 이를 찾아내고 그가 사람을 죽일만한 원한이 있음을 측정할 수 있는 가?

“그 정도 정보력이 있으니까 당신과 발을 맞춰나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정도 되니까 사이다패스 네가 우리랑 같은 편먹고 있지 않느냐?

영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음. 당신도 그 최검사 못지않게, 아니 더 위험한 인물이네? 뭔가, 음침한 걸? 어쨌건 저 지은재의 재주를 보려면 내일 오면 된다는 거지? 그래? 알겠어. 잘 먹었어.”

사이다패스는 그 말을 남기고 영사의 사무실을 떠났다.

“아. 갔군요. 음 저 진짜 내일 그거 하나요?”

“네. 내일 합니다. 아 그리고.”

영사는 사이다패스가 먹어 치운 컵라면을 가리켰다.

“안 건드린 물건이니까 먹든가 버리던가 하세요.”

“네?”

지은재가 컵라면을 살펴보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컵라면 안에는 내용물이 가득 차 있었다. 물을 부은지 좀 되어서 불어있긴 하지만 손가락 하나 안댄 모습이다.

“이게 대체?”

“뭐 젯밥 같은 겁니다.”

“젯밥?”

“네. 우리가 보는 사이다패스는 그녀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유령 같은 거지요. 유령일지 꿈일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계약자라는 건 그런 거지요.”

영사는 그리 말하고 지은재를 살펴보았다. 지금 말해준 것으로 사이다패스에 대한 그의 이성에의 흥미가 좀 가시려나 하고 보았는데 어째 호기심만 더 부추긴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인가요?”

“그녀에겐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본인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사님. 염려 마십시오. 제가요. 고향에서 입이 무겁기로 소문이 났거든요.”

“.......”

전혀 입이 무거워보이지 않는데? 물에 던져두면 입으로 둥둥 떠다녀서 어업용 부표로 써버리고 싶다는 욕구마저 느껴지게 하는데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러는 사이 지은재는 살짝 불은 컵라면을 아주 맛깔나게 후루룩 거리며 먹는 게 아닌가?

* * *

추정훈은 한강건재의 회장 류장천의 조카이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괜찮고 집안도 부유했던 그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지방의 소형 건설사를 하나 인수해서 자신이 사장이 되었다.

건설사라는 건 인맥과 자본 없이는 절대로 굴릴 수 없는 것이지만 그는 한강건재의 인맥을 이용해서 어린 시절부터 승승장구했다.

한강건재 사장의 조카이다 보니 이런 저런 지원을 받아서 초반엔 아주 잘나갔다.

남들보다 쉽게 인가를 받고 남들보다 쉽게 재건축을 하고 중기계, 자재 등을 정확하게 공급받아서 남들보다 훨씬 편하게 납기를 맞춰 작업할 수 있었다.

부모와 친척이 만들어준 바탕 위에서 땅 짚고 헤엄치며 돈을 버는 그런 흔한 부잣집 자식의 삶을 살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이 잘 풀리다 보니 자연히 추정훈은 나쁜 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미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반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은 첫 마이카를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고 기쁠지 모르지만 추정훈은 슈퍼카를 사더라도 기쁨은 잠시, 그보다 더 큰 공허감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추정훈은 도박과 유흥에, 그리고 부모나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아무리 한강건재가 뒤에 배경으로 있다고 해도 사장 당사자가 마약에 절어 사업을 점차 뒷전으로 두면 순식간에 사업이 기울게 된다.

잠깐의 실수로 몇 억이나 되는 적자가 발생해버리는 것이다.

이걸 만회하기 위해 추정훈은 로비스트에게 돈을 주고 로비를 꾀했다.

뉴타운 사업의 도로 공사 부분 수주와 아파트, 오피스텔 부지 낙찰을 위한 로비였다.

하지만 막대한 돈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낙찰에 실패하고 빚더미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추정훈은 로비스트를 해치기 위해서 뒷세계에 속하는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개자식!”

이 모든 게 자신을 농락한 로비스트 때문이다.

추정훈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려운 순간 자신을 속여 뜯어먹고 떠난 녀석.

로비스트 이영하.

그 녀석을 살려두고 싶지 않다.

이렇게 조롱당한 채로는 다른 사업도, 재기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여긴 추정훈은 살인 청부를 해줄 사람들을 사라고 비서들을 풀었다.

외국인 폭력조직을 사서 로비스트를 암살할 셈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그가 류장천 회장의 조카라는 걸 알게 된 청부업자들은 계속해서 돈을 올려달라고 하고 그들 중 일부는 그가 청부하는 내용을 녹음해둬서 오히려 그를 협박하고 나섰다.

인간들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살인 청부라는 게 돈 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젠장!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다 날 뜯어먹으려고만 하고!”

그는 화가 나서 자택에서 술을 병나발로 불고 있었다.

코냑을 병나발로 불다니 애주가들이 욕할 것이나 추정훈은 그저 뭐라도 좋으니 자신을 취하게 하면 좋았다.

추정훈은 거실 유리창을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개새끼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찬바람이 실내에 감돌았다.

그리고 그의 뒤로 광대가면을 쓴 남자가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추정훈씨지요?”

“뭐? 뭐야? 넌?”

“안녕하세요. 저는 … 살인예술가입니다.”

“뭐?”

“살인예술가요.”

“?”

추정훈은 순간 당황했다.

그의 자택에 갑자기 나타난 가면 쓴 남자.

충분히 무서워야 할 상황인데 상대의 말솜씨나 말투가 어째 별로 무섭지 않다.

그래서 그는 투덜거렸다.

“뭐야. 그 사이다패스 흉내 내는 얼간이 말이야?”

추정훈도 살인예술가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이다패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살인예술가는 그야말로 모방범, 그것도 어설픈 모방범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모방범이 그의 자택에 와있는 것일까?

“뭐냐 너? 야! 경비원들은 어디 있어?”

“당신은 경호원이 없지요. 당신의 숙부인 류장천 회장은 천호동 금사자 파, 아, 아니, 금자탑 파를 데리고 다니지만….”

그렇게 말하던 살인예술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당신은 그런 위세가 없으니까 살인청부도 그리 쉽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뭐? 네놈이 하는 대로 하라고? 그런 어설픈 짓을?”

“지금까지 어설펐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아니 다를 겁니다.”

“꺼억. 쳇.”

술에 취한 추정훈은 트림으로 받아쳤다.

말하는 걸 보니 영 쓸모가 없을 것 같다.

“웃기지 마. 살인 청부업자라는 놈들이 일도 안 해주고 날 뜯어먹으려고 해서 짜증나긴 하지만 너처럼 어설픈 놈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거다.”

“그럼 정말 살의가 없다는 겁니까? 살인에 대한 갈망이 조금도 없다고?”

“그건 아냐! 지금이라도 로비스트는 물론 날 우습게 본 청부살인 업자들도 다 갈아 마시고 싶다!”

“그렇죠?”

그 순간 가면의 남자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기이한 붉은 빛이 번뜩인다.

“당신의 복수를, 살의를, 제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드리겠습니다.”

“어?”

추정훈은 거부하려고 했다.

그가 느끼는 살의는 약간의 가감도 없는 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녀석의 부추김으로 춤추는 광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술과 약물로 만신창이가 된 추정훈의 회색 뇌세포에도 그 정도 사리 분별력은 남아있었다.

그런데….

저 붉은 눈빛이 그의 사리 분별능력을 앗아간다.

거부할 수 없는 변화가 그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 * *

“놀랍군요. 놀라운 능력이야.”

영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제가 설득을 잘한 게 아닐까요?”

살인예술가. 지은재가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럴 리가 있나.

기껏 분위기 잡게 자택에 잠입시켜 줬더니만 전혀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고 앞에서 어버버 거리고 있었구만.

그런 식이면 미취학 아동들도 위협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당할 것이다.

영사는 그리 생각했지만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음. 놀라운데?”

영사와 함께 현장에 있던 사이다패스도 감탄했다.

“자세한 발동 조건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아 그건 말이죠.”

지은재가 말하려 했지만 그때 영사가 그를 말렸다.

“계약자의 능력 세부사항을 알려고 하지 마시길. 우리가 당신에게 그걸 묻지 않듯 말이죠.”

“뭐? 음. 아니 아냐. 그게 원칙이라면 어쩔 수 없지.”

사이다패스도 영사의 말에 납득하는 듯 했다.

말하려던 지은재가 뻘쯤해졌다.

“그럼 이제는 어쩔거야? 로비스트를 죽이게 하고 살인 예술가의 이름을 드높이나?”

“물론 그것도 좋지만 말입니다.”

영사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이다패스와 달리 살인예술가는 그 존재를 두각을 드러낼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만한 능력, 이건 감춰야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사이다패스는 평소 남들 위에 서는 사람들, 권력자나 부자들을 노골적으로 죽임으로서 여론을 뒤흔드는 존재,

반면 살인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쥐도 새도 모르게 타인의 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직접 나서서 초인적인 수단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이다패스와 달리 몰래 살인을 하는 살인예술가는 그 정체를 감추고 있는 쪽이 오히려 이득이다.

“음 별로 재미없는데요.”

지은재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그도 사이다패스처럼 유명해지고 싶다.

그런 욕망이 있는 것이다.

“일단 제 지휘에 따라주시길. 알겠습니까?”

영사는 그리 말하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 * *

시현은 할 일이 많았다.

의뢰에 관련될 때마다 인수한 사업체들을 못해도 분기별로는 관리해주어야 하고 분기 때마다 불량채권들을 매입해 신용정보사와의 관계도 돈독히 한다.

다른 탐정 사무소의 일을 하청 받아 주어서 그들과의 관계도 좋게 유지하는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평소 원한이 있던 이들을 도청하고 추적해서 그들의 행보도 알아둔다.

도저히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양의 업무였다.

물론 그래서 시현은 그런 업무 중 일부는 다른 탐정들에게 하청을 준다.

그런데….

-타다다다닥.

타자기가 울기 시작했다.

“흠. 이 시기에?”

시현이 신경호의 계약을 정산한지 고작 사흘 지난 뒤다.

그런데 새로운 계약자가 시현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번엔 꽤 재미있는 의뢰주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타자기의 악마는 이번 의뢰 주에 대해서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저번에 신경호도 자기 나름대로는 재밌다고 구해왔겠지?”

[네. 그랬지요.]

“과연 이번엔 대체 얼마나 변변찮은 계약자를 구해왔기에….”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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