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93화 (193/269)

제193화

영사의 방식 #5

시현은 타자기의 악마가 자신만만해 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귀에 꽤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 세상에. 뭐 이런 허름한 곳에 사무실이라고…. 정말 이런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거야?”

“네. 류 이사님.”

신경질 적인 장년 부인의 목소리와, 시현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

잠시 후 들어온 사람을 시현은 단 번에 알아보았다.

고급스러운 부인복 차림의 장년 아주머니. 그녀는 류장천 회장의 누이인 류화영, 류하리의 고모 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재벌가문이 그러하듯 한강 건재와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으며 한강건재에 이사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영사가 있었다.

“저기, 당신. 여기 직원인가요? 사무소장을 불러와봐요.”

“제가 이곳 소장 시현이라고 합니다.”

시현은 그리 말하고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

영사가 손을 내밀어서 시현에게 명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명함 한 장을 내밀었는데 그걸로는 부족한 지 한 장 더 달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시현은 마지못해서 영사의 손에 또 한 장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영사는 명함 한 장은 자신이 가지고 다른 한 장은 류화영에게 보내어 그녀가 명함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어머. 당신이 소장이에요? 예상보다 꽤 젊군요.”

그녀는 시현이 너무 젊다는 것에 당황했는지 영사를 돌아보았다.

“원참, 원 이사 이거 괜찮겠어?”

영사의 지금 신분은 한강건재 영업이사 원영재.

그 이름대로 불리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업계에서 평판이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반신반의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빨리 뭐라도 하지 않으면 도련님이 위험해지실 겁니다.”

영사는 그리 말하며 류화영을 독촉했다.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시현은 영사에겐 눈길을 주지 않고 류화영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음. 이건 꼭 비밀을 지켜줘야 겠는데.”

“의뢰주의 비밀은 철저히 엄수합니다. 시현 탐정 사무소는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니까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힐끔 영사를 바라보았다.

영사는 시치미를 뚝 떼고 시현을 모르는 체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시현은 영사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었다.

타자기의 악마나 다른 악마들은 영사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영사는 악마들에게는 전혀 재미있지 않은, 재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영사가 찾아왔다니 아마도 계약자는 역사가 아닐 것이다.

류화영이겠지.

그런데 영사가 끼어있다면 어지간한 일이라 해도 타자기의 악마가 그와 계약을 알선 할 리가 없다.

악마들이 그만큼이나 영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즉 악마들의 입맛에 맞는 일이니까 영사가 가져온 일임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성사시킬 정도다.

‘이건 꽤 난관이겠군.’

저번에 신경호 위원장과 조기석 사건에서도 시현은 위험한 함정에 빠진 적이 있었다.

돌파하고 나면 별 거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은 그 이상의 일이 될 것이다.

“실은, 우리 아들 일인데.”

류화영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우리 애가 사람은 참 착한데 그만 실수로 나쁜 친구들을 사귀어서 문제지 뭐야.”

“나쁜 친구들 말입니까?”

시현은 이제 30대 초반이 된 성인 남자를 여전히 어린애처럼 다루는 류화영의 발언에 혀를 찼다.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게 당사자 본인에게 고통이긴 하겠지만 이렇게 집안에서 밀어주는데 본인의 정신적인 문제로 다 말아먹고 만 인간을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며 뒤를 닦아주려 하다니.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게 과연 그 개인에게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뭐 개털도 없는 거지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보다는 무조건 낫겠지만… 좀 역겹군.’

시현은 그리 생각하며 힐끔 타자기와 영사 쪽을 훑어보았다.

영사는 은근슬쩍 타자기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힘 때문인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타자기의 악마가 그렇게나 영사를 싫어하는 것이다.

만약 타자기를 들어서 영사를 한대 후려갈기면, 그렇게 강제로 육체접촉을 일으키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렇게나 싫어하는데 왜 계약자로 데려온 거지? 솔직히 지금 이야기로는 계약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시현으로서는 류하리 집안의 친척을 계약자로 받는 다는 게 매우 껄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추정훈은 그도 안면이 있었다.

“그 다음은 제가 말씀드리지요.”

영사가 류화영을 대신해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도련님이 나쁜 친구를 사귄다는 건, 그 로비스트에게 복수하기 위해 수를 꾸미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아니 그건 우리 애가 하려는 게 아니라.”

류화영은 절대로 자기 자식이 주범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헛소리다.

로비스트가 내 돈을 받아먹고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로비스트를 제거하려 하는 건 로비스트에게 돈을 넘겨서 금전적 손해를 본 장본인 아니겠는가?

하수인들이 직접 돈 봉투를 옮겼다 해도 실제로는 추정훈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간 것이니까 이 살인 모의의 살의는 오롯이 추정훈의 것이다.

‘왜 탐정에게 왔는지는 알겠군.’

이들은 아들이 살인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걸 발견했고 그걸 막고 싶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하면 체포당할 것이다.

가진 게 없고 도덕심은 투철한 사람들이라면 자식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느니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곤 한다.

그러나 가진 게 많은 집안은 거금을 들여서라도 자식을 감옥에 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막대한 비용을 치른다 하더라도 자식의 허물은 덮어주고 싶다.

뭐 그 정도는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저지르기 전에 막아달라는 것 아닌가?

일을 저지른 후 덮는 게 아니라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그런 목적이라면 저 말고 경호회사나 그런데 사람들을 고용해서 강제로 잡고 어디 격리해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이미 도련님이 누군가와 접촉했습니다. 살인 청부라도 이미 접수되었다면 어서 빨리 막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누구와 어떻게 무슨 일을 벌이는 지 금시초문이란 말이지요. 그걸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영사는 뻔뻔스럽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구와 접촉했단 말입니까?”

“자칭 살인 예술가라고 부르는 살인청부업자입니다. 다크웹에서 접촉한 모양입니다.”

영사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영사는 손쉽게 로비스트에 대한 살의를 품고 있는 이를 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평소 그가 모시고 있는 류장천 회장의 일가, 류장천 회장의 그 조카인 추정훈이었다.

영사는 그 조카인 추정훈을 살인예술가의 표적으로 삼으면서 그걸 이용해서 이번엔 외려 데드맨에게 그것을 막아달라고 의뢰를 넣은 것이다.

시현은 그 상황을 눈치 채고 영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류화영이 듣지 못할 정도로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시현이 그의 잔에 커피포트를 부으며 말했다.

“정말 개자식이시군요. 자신에게 일을 믿고 맡기는 고용주를 그딴 식으로 농락하다니.”

“농락이라니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인가?”

“당신이 사이다패스나 살인예술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알고 하는 말입니다.”

“놀랍군.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하나. 시현? 그렇게 판단할 근거라도 있나? 증거라도?”

“당신은 언제나 계약자들의 주위에 알짱거리지요. 악마들의 관심, 그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런 이유로 넘겨짚었나? 그렇지 않네. 나는 어디까지나 류화영 이사님과 그 자녀분의 장래가 걱정되어서 이러는 거지. 내가 류장천 회장님께 은혜를 입은 게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지.”

영사는 뻔뻔스럽게도 시치미를 뗐다.

시현의 능력인 생명을 보는 능력도, 그에 수반되는 태그 능력도 영사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시현이 그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 예리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 생각한 영사는 모르는 체 하고 류화영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시현 자네가 나에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자네 방식은 내가 가르쳐 준 것일텐데? 내가 하는 게 고객 우롱이라면 자네가 하는 짓도 충분히 고객을 우롱하는 게 아닌가?”

영사는 시현의 비난을 되돌려주었다.

고객을 우롱하고 그들의 말을 왜곡하더라도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것, 그것은 확실히 시현이 영사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현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전 어디까지나 고객만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우롱 같은 건 감히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흠. 본인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참 할 말이 없구만. 그래서, 의뢰는 수락할 건가?”

시현은 말없이 타자기 쪽을 바라보았다.

타자기의 악마는 다른 계약자, 살인예술가와 충돌할 수도 있는 이 일을 받아들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수락하도록 하지요. 저는 말입니다.”

“무슨 뜻이지?”

“류화영 씨가 어떤지 기억 안 나십니까?”

시현은 그리 반문했다.

“음, 잘은 모르겠네만 의뢰를 받아들였다니 다행이군. 잘해주게. 류하리 아가씨도 기뻐할 거야. 믿음직하지 못한 사촌오빠가 살인범이 되는 걸 막는다면 말이지. 그녀의 결혼식에 사촌오빠와 그 친구들도 응당 와서 자리를 빛내야 하지 않겠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의뢰 보수나 책정하도록 하지요.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시현은 그리 말하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 * *

“어머 이게 뭔 소리래? 수명? 무슨 소리니?”

류화영은 시현이 내민 계약서를 보고 당황했다.

보수가 주당 500만원에 필요경비 포함, 이건 납득이 갈 만 했다.

그런데 수명 2년을 달라고 하는 조항이 있지 않은가?

“저희 탐정 사무소의 철칙입니다. 수명 깎일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고객은 받지 않습니다.”

“뭐? 아니 이봐.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모르나 본데. 지금 우리 집안이 사람이 없어서 여기 온 게 아니거든?”

물론 시현도 잘 알고 있었다.

영사가 거느리고 있는 조직폭력배들이라던가 돈만 주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이들이 한강건재 류장천 회장 옆에 즐비하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류장천 회장이 아니라 추정훈 본인이 직접 거느리고 키우는 이들도 있다.

류화영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런 이들에게 이미 추정훈을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시현을 찾아온 것은 그녀 입장에서는 그저 돌다리도 좀 두들겨 보자고 건드린 것인데 이 돌다리 놈이 주제넘게 수명을 요구하다니?

“대체 이게 뭔 소리래? 영사?”

“아마도 그 정도 각오를 하라는 것 같습니다. 도련님이 이미 불법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셨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맙소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수명을 어떻게 받겠다고?”

역시 시현의 예상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현이 알고 있는 류화영의 성격을 볼 때 지금 이정도로는 수명을 내놓으라는 계약에 응할 리가 없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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