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영사의 방식 #6
“이거 뭐 나중에 수틀리면 장기 내놓으라던가 수명 1년 어치만큼 어디 1년간 감금하겠다던가 그런 거 아니니? 그런 거면 절대 싫은데?”
“.......”
시현 입장에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시현에게 찾아온 계약자들은 다들 몸이 달아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명을 내놓으라는 황당한 이야기에도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약에 응했다.
계약에 돈 달라는 부분이 본질이고 수명 이야기는 수틀리면 그만큼 조지겠다는 '샤일록의 계약'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데 류화영은 다급한 사람이 아니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돈이나 인맥, 권력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그녀는 자신의 수명을 내놓으라는 황당한 조건을 거부한 것이다.
시현도 이 류화영을 상대로는 계약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부모 입장에서 허세라도 부리고 싶을 텐데, 설마 자식을 위해서 하는 일에도 거부하다니.’
보통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서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한다.
그런데 류화영은 자식을 위한 일에도 거부를 하다니.
“그럼 죄송합니다만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시현은 계약서를 거두었다.
“어머. 별꼴이야. 뭐 이런 게 다 있니? 지금 돈 더 달라고 유세 떠는 거지? 그런 식으로 구니까 이런 구질구질한 주택가 상가건물에서 살지. 원 이사! 기분 완전히 잡쳤어! 가자.”
류화영은 시현이 계약을 거부하자 더이상 흥정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돈도 인맥도 있으니 돈으로 해결볼 수 있을 것 같은 지금 상황에서 굳이 수상한 계약을 맺어가며 자식을 구해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계약은 결렬되고 말았다.
* * *
타자기의 악마가 보낸 계약자였지만 당사자가 계약을 거부하면 무효화 된다.
그러나 시현은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류화영은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추정훈이 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몰리고 나면 그때가서는 계약하겠다고 설칠 것이고 그 상황이 되면 시현이 해결하기엔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젠장. 고객만족을 위해서 이러면 안되는데.”
시현은 장비를 챙겨들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시현 탐정 사무소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탕탕.
굳이 열려있는 문을 노크하는 인물은 바로 성신아였다.
“안녕. 탐정씨. 자리에 있어?”
“부재중입니다.”
“아하하.”
성신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안에 들어왔다.
“뭐하는 거에요?”
“고객들에게 명탐정 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사전 조사와 밑 작업이 필요한 법이지요.”
“아 밑 작업하러 간다고요? 놀랍군요. 탐정일이라는 거 보통 그렇게 까지 하나? 너무 열심인 거 아니에요?”
“고객 만족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이런. 오늘은 궁상이나 좀 떨려고 왔는데. 바쁜가 보네요. 아 혹시 아르바이트 생 필요없어요?”
“아르바이트 생이요?”
“조수 하나 고용하는 건 어때요?”
성신아는 그리 말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경찰일은 어쩌시고요?”
“경찰은 지금 전직 차관을 죽인 사이다패스 때문에 다들 정신없으니까요. 그런데 답이 없는 걸? 최소한 뭔가 성과를 내려면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닌가요.”
사이다패스는 지문도, 영상도, 섬유조각도 남기지 않는다.
게다가 살해수법은 지나치게 위험하다.
사람의 두개골을 으깨버리는 강력한 일격을 쉽게 날리는 걸로 봐서 경찰들이 그를 제압하려면 화끈한 화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경찰은 총기 사용을 억제하고 있어서 경찰들 입장에서는 사이다패스와 맞닥뜨리게 되면 오히려 위험하다.
“언론이나 상부에서는 성질만 내면 범인 다 잡는 줄 알지. 결국 경찰들이 지금 해야 하는 건 뭔가 열심히 하는 시늉을 하면서 네네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나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하고 사죄하고 빌고 궁상떠는 것뿐이잖아. 그런 가망 없고 비생산적인 일에 힘을 쏟느니 적당히 농땡이 치는 게 낫잖아요. 겸사겸사 아르바이트도 하고. 후후.”
그리고 만약 경찰을 그만둘 경우 탐정업계도 생각해볼 만하고. 성신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경찰 대학을 나온 그녀가 경찰을 그만두고 탐정이 될 일은 없다.
사이다패스 문제 때문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래도 경찰대학 출신이고 여성 경찰이면서 현장을 뛰고 있는 인물은 타의 모범이 된다.
즉 그녀는 경찰 내에서 빠른 승진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뭐 만의 하나란 거고. 탐정 일은 어떻게 하는 건지 봐둬서 나쁠 건 없겠지.’
그때 시현이 물어보았다.
“뭐 왜 그러는지는 알겠습니다. 오늘 류하리 경위와 최형림 검사가 만나는 날이지요? 그래서입니까?”
“잘 아네요. 그래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당신 일하는 걸 좀 보고 싶어요. 겸사겸사 가외수입도 좀 얻고.”
돈은 반드시 받을 생각이었다.
류하리에게 들은 바로는 시현이 재산이 상당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엉뚱한 일이지만 급료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생긴 것만 봐서는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서 성신아는 조수로서의 급료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공무원이 그런 짓을 하면 곤란할 텐데요? 투 잡 금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 믿음이 가지 않아요? 내 약점을 당신에게 하나 넘겨주는 거잖아요?”
“으음. 상당히 심심하신가 보군요.”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습 3개월 입니다. 그동안은 최저시급으로 모시겠습니다. 자 카메라와 도청기, 망원경 세트입니다. 드세요.”
시현은 장비함을 가리켰다.
“와 나 경찰 출신인데? 수습기간이 그렇게나 필요할 리가 없잖아요?”
“일하는 거 보고 결정하지요. 그리고 출신이라고 하지 마세요. 아직 경찰이잖습니까?”
시현은 그리 말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 *
탐정들에게 물어보니 정보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추정훈이라면 한강 건재 사장 조카 말이야? 아 회장 조카 말이지?”
“살인청부를 찾고 있다던데. 소문이 파다해.”
추정훈이 로비스트에 대한 원한을 풀겠다고 한 것은 이미 탐정들 사이에서 빠삭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시현은 어렵지 않게 그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한강 건재는 지금은 그런 이미지가 아니지만 예전에는 꽤 거친 일도 많이 하던 곳이었을 텐데요.”
시현이 그렇게 물어보자 탐정들, 흥신소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자넨 역시, 젊은 데도 잘 알고 있군. 이상한 일이야. 보통 경찰 출신, 아니면 원래 흥신소 하던 사람이 키워야 이쪽의 인맥이나 정보를 갖기 마련인데.”
“아 실은 제가 그 한강 건재 쪽에서 있었거든요.”
“그, 그런가?”
탐정의 출신 중 또 드물게 들어오는 쪽이 바로 대기업 비서실이다.
이것저것 다 하는 대기업의 오너 일족들 입장에서 자신들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주는 해결사 같은 이들을 원하기 때문에 이들의 업무는 종종 탐정의 그것과 겹치곤 한다.
기업 비서실 등에서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이 그만 두면 종종 탐정업으로 흘러들어오곤 한다.
그렇다면 시현의 배경, 어째서 그가 갑자기 이런 실력을 가지고 업계에 등장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래서 왜 한강 건재 쪽에서 자기네 팀이 따로 있을 텐데 굳이 추정훈이 이렇게 여기저기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거야, 추정훈이 밉보여서 그렇지.”
“밉보였다?”
“거 추정훈 그 친구 이거 한다던데?”
중년의 경찰출신 탐정이 손으로 팔뚝에 주사하는 시늉을 했다.
추정훈이 마약을 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 모양이다.
“흠, 그렇군요.”
“그래서 회장에게 밉보여서 자력으로 알아서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지.”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래. 다음에 또 부탁할 일 있으면 주저 없이 오게.”
탐정들은 시현과 인사를 나누고 그를 보내주었다.
* *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신아가 감탄했다.
“와? 의외네. 흥신소 사람들이 이렇게나 끈끈하게…. 게다가 당신을 굉장히 인정하는 분위기인데?”
“제가 저들에게 주는 정보가 더 많으니까요. 평소에 이렇게 상부상조해야 일에 시간이 덜 들지 않겠습니까? 일이 빨리 끝나야 우리 조수 시키는 일도 줄어들고 줘야 할 급료도 덩달아 줄어들지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탐정들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금천구의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한 거리로 이곳에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제하는 폭력조직 또한 함께 들어와 있었다.
“지금 어딜 가는 건가요?”
“추정훈 씨를 협박하고 있다는 외국계 폭력조직을 만나보려고 하는 겁니다.”
“네? 진심인가요?”
“진심입니다. 마침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 조수분이 경찰 신분증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아! 젠장!”
성신아는 어째 자신이 억지를 부려서 따라오겠다는 걸 시현이 받아들였다 하고 혀를 찼다.
알고 보니 경찰인 그녀의 신분을 이용하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와 이거 도저히 최저시급 받고 할 일이 아닌데.”
그러자 시현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성신아에게 건네주었다.
“아, 음. 고마워요.”
성신아는 망설이며 시현에게서 사탕을 받았다.
“사탕이라. 이거엔 안 좋은 추억이 있는데.”
“나중에 듣도록 하지요. 갑시다.”
“마, 말해준다고 안했어요!”
* * *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제로원 플래닝은 로비스트 이영하가 사장인 이벤트 기획사였다.
광고, 로드샵, 기타 각종 이벤트를 명목으로 고관대작들에게 향응이나 금전적인 이득, 강연료 등을 제공하는 이 업체는 지금 난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클라이언트 한 명이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선 불법인 로비를 주로 하고 있으니 이영하에겐 많은 적들이 있지만 이 클라이언트는 다른 이들과는 좀 격이 다른 문제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로비 그 자체가 불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비를 청탁한 이들은 자신들이 불법을 저지른다는 자각이 있고 그렇기에 어느 정도 신사협정이 이뤄진다.
최소한 이 일을 물 밑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수면 위로 떠올려 공론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진상 클라이언트, 추정훈 사장은 그 신사협정을 깨면서까지 이영하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그들 사무실 앞에는 추정훈이 고용한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로비가 실패했으니 로비에 들어간 비용을 환불해 달라.
그런 취지의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런 젠장. 하필이면 걸려도 이런 진상이 걸려서.”
웃기는 점은 이영하는 정말 의뢰금의 일부를 이미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로비가 실패했을 때 로비 자금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건 로비스트에게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추정훈의 분노가 너무 극심해서 뭐라도 저지를 것 같아서 이영하는 어쩔 수 없이 일부 자금을 돌려주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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