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영사의 방식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정훈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진상 새끼. 설마 전액을 다 달라는 거야? 아 진짜. 왜 일은 실패해가지고.”
로비스트의 로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수해야 할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이 사람이 정말 결정권이 있어서 이 사람만 함락시키면 이권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게 확실한 인간에게만 표적으로 돈과 향응을 뿌려야 성공이 가능하다.
이영하는 자신이 정확하게 결정권자를 찾아서 돈을 살포할 수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영하가 매수했던 인물은 생뚱맞게 직장 내 성희롱 문제로 인사이동 당해버리고 대신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그들이 매수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매수에 실패했더니 추정훈 사장은 이영하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해대는 것이었다.
“계속 저러면 경찰에게 신고할까요?”
“으음. 아니 그건 좀. 로비스트인 내가 경찰을 직접 불러들일 수는 없지.”
로비스트인 그가 경찰을 불러 전직 고객을 고소하는 건 아무래도 모양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그를 털어서 그간의 로비자료들, 다른 이들의 정치적 약점을 잡고 싶어 하는 미친놈이 있다면 언제 털릴지 몰랐다.
“이거 참. 미합중국은 로비도 합법인데, 하여튼 이놈의 나라는 미개해서 로비를 불법으로 하니까….”
이영하가 그렇게 투덜거렸다.
직원은 그런 이영하의 불만을 들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미국이야 로비가 합법이라 로펌등이 로비스트로 나서는 데, 한국은 로비가 불법이라 뇌물 먹이는 전직 유흥업소장인 당신이 로비스트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부하직원 입장에선 월급주는 사장을 면전에서 비웃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방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
“뭐지?”
“그냥 실수 아냐”
그러나 그 순간 정말 뜨거운 열기가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방화문 밑에서 갑자기 주위가 뜨거워지고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건물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런!”
잠깐 멍 때리던 이영하는 깜짝 놀라서 컴퓨터를 가리켰다.
“야! 컴퓨터! 고객 데이터!”
너무 급해서 말이 안 나온다.
하지만 직원은 이영하가 뭐라고 말하는 지 잘 알 수 있었다.
이들 로비스트에게 고객데이터는 곧 범죄활동의 증거다.
화재가 나거나 하면 건물 안의 모든 전기제품들은 화재의 원인인지 아닌지 조사하기 위해 경찰들 손에 넘어갈 테고 그 경우 고객데이터가 유출되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고객데이터는 지켜야 한다.
로비스트 이영하와 직원은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본체와 노트북을 들고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있는 건물은 양재동의 5층 건물.
사무실은 4층과 5층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뛰어 내리더라도 죽지 않을 높이다.
문제는 컴퓨터를 들고 뛰어내릴 수 있을까?
“젠장!”
“계단으로!”
로비스트 이영하와 그 직원이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불길이 빨라! 게다가 기름 냄새가 난다. 이거 설마 방화인가?’
이영하는 그 순간 문득 추정훈을 떠올렸다.
‘그 미친놈이 기어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바직!
전기충격음과 함께 직원이 계단 앞에서 쓰러졌다.
“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눈 앞에 방독면 쓴 남자가 있다.
-치이이익!
그의 손에서 가스 토치가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해볼까?”
* * *
“화재현장에 시체를 남기기 위해서 토치로 사람을 죽인다라... 이것 참, 19세기 추리소설만 본 사람이 생각할 법한 트릭이군요.”
최형림은 영사의 보고를 듣고 혀를 찼다.
“아무래도 살인예술가의 능력은 본인이 트릭을 짜내야 발동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꽤 좋아졌습니다.”
영사의 사무실, 텅 빈 그곳에는 현재 그와 영사, 단 둘이 있다.
살인예술가인 지은재는 이미 퇴근한 상황이다.
지은재의 능력을 검증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이니 품평의 대상이 되는 지은재는 당연히 일찍 퇴근 시켜놓았다.
“꽤 좋아졌단 말입니까? 대체 어느 부분이 말입니까?”
최형림은 영사의 평가에 흥분해서 반문했다.
“사람을 토치로 그으면 그 고통은 엄청날 텐데요? 바로 즉사하진 않고 날뛰면서 저항했을 것 아닙니까? 게다가 살해현장은 양재동, 주위에 보행자도 많을 거고 한참 불길이 올라온 시점에선 구경꾼들도 많이 몰렸을 텐데 토치에 타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뛰쳐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보겠군요. 그게 싫어서 밧줄 같은 거로 묶으면 시체에 포박흔이 남을 테고, 아니 애초에 노골적인 방화 아닙니까? 그 시점에서 경찰들이 이걸 제대로 수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답니까?”
“뭐 살인예술가의 경우 ‘트릭’의 성공이나 완성도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중요한 건 사람에게 살의를 실천하게 만드는 그 능력 아니겠습니까?”
영사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덕분에 살인예술가의 능력을 또 세부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인예술가의 능력은 자신의 손으로 살인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청부하는 데에도 발동한다는 것을.....”
“추정훈 씨가 직접 살인을 행한 게 아니로군요. 그럼?”
“네. 물론이죠. 토치로 사람을 죽인다는 우악스러운 짓을 그런 마약에 찌든 도련님이 자기 손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준비한 프로페셔널들이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아 그리고 살인을 청탁하는 것은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
“그런데, 이거 참 죄송합니다. 예상보다 너무 일찍 일을 벌였나요? 결국 근무시간 이후에 또 이렇게 잔업을 하게 하다니 말입니다.”
“됐고. 얻어왔습니까?”
“네. 태블릿 PC로 확인해보시죠.”
최형림은 태블릿 PC를 열어서 업로드 된 파일을 살펴보고 있었다.
로비스트 이영하의 로비 관련 리스트와 자료들이다.
추정훈의 복수(?)를 지원한 진정한 목적은 바로 이 파일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흠.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암호가 걸려있군요.”
“암호는 제로원 플래닝의 사업자번호입니다.”
최형림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있을 법한 암호설정이긴 하지만 그렇게 안일하게 암호를 설정하다니?
하지만 실제로 그 암호를 넣고 작동해보니 파일의 암호화가 풀리고 열리기 시작했다.
“놀랍군요. 알고 있었습니까?”
“살아남은 자를 고문해서 알아냈다고 하더군요.”
“.........”
양재동의 소방관할서 위치를 생각해보면 고문을 할 만큼 여유로운 시간은 없었을 텐데?
최형림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실제로 파일이 열려버렸으니 지금은 그 내용을 눈에 새겨 두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컥!
갑자기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사이다패스가 안에 들어온 것이다.
“아 왔습니까? 당신도?”
최형림은 별 생각 없이 사이다패스를 환영했지만 이내 그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마음에 안 들어! 이 자식들아!”
“뭐가 말입니까?”
“뭐긴 뭐야! 이번 일이지!”
“........”
최형림과 영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영사가 말을 꺼냈지만 사이다패스가 코웃음 쳤다.
“오해는 무슨 오해?! 결국 그 파일을 손에 넣기 위해 죽인 거잖아? 나는 그런 게 마음에 안 들어! 복수는 순수하게 복수여야 하고 처벌은 순수하게 처벌이어야지! 그런데 네놈들이 지금 한 짓은 복수에 대한 모독이다!”
“당신의 복수... 말입니까?”
“그래! 지금 이런 식이면 이건 그 파일을 얻기 위한 수단이잖아! 그래선 안 돼!”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하는 살인은 좋은 살인이고 이건 나쁜 살인이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최형림은 반문했다.
웃기는 일이다.
둘 다 살인자다.
아니 정확히는 사이다패스는 살인자이고 최형림은 살인 공모자이지만 살인범에 준하는 범죄자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최형림도 사이다패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사이다패스가 힘을 얻게 해주는 계약, 그 계약에 구애받고 있으니 계약에 맞지 않는 살인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복수를 모독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 일에서는 빼놓았는데, 불만입니까?”
“그래. 이 개자식아! 내가 너흴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해? 웃기지마. 너도 검사야! 내가 죽이기로 결심한 놈들 중 하나라고!”
“잠깐 진정 좀....”
최형림이 사이다패스를 말리려 했으나 그때 최형림의 어깨 위에 손이 닿았다.
영사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이거 아무래도 제 불찰입니다.”
“불찰?”
“예. 요 며칠간 제가 사이다패스와 살인예술가를 관리하기로 했었지요? 그런데 제 관리 하에서 이런 식이라니. 후우....”
영사가 미소를 지으며 사이다패스의 앞에 섰다.
“제 방식대로 버릇을 좀 가르쳐줘야 할 것 같군요.”
싸늘한 살기가 영사와 사이다패스 사이에서 감돌았다.
* * *
“뭐? 버릇?”
사이다패스가 어이없어서 코웃음 쳤다.
데드맨에게 패하긴 했지만 그녀는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눈앞에 이 나이든 남자가....
“그래.”
영사는 양복 셔츠 안쪽에서 나이프를 빼들었다.
“가끔은 내가 직접 손을 써야....”
그러나 그때 최형림이 손을 뻗어 영사의 나이프를 덥석 움켜쥐었다.
자칫 잘못하면 칼날에 손가락이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짓이었지만 최형림은 아랑곳 하지 않고 칼날을 잡았고 실제로 그의 손이 베여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영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칼을 거뒀다.
“그만두시지요. 사이다패스. 우린 당신의 원칙을 존중하기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날 존중해서라고? 이야. 이거 감동 먹겠는데.”
“네. 감동하셔야지요.”
“.........”
“성취 리스트에 있는 놈들도 결국 몇 년 전의 이야기,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창구가 필요해요. 그런데 그 정보를 얻는 데 당신의 원칙에 어긋나니까 저희 나름으로는 최대한 당신을 배려해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거에까지 토를 단다면….”
“하지만 그런 방식은 내가 용납 못해! 이봐. 복수라는 건 미학이야. 미학이 없이 단지 수단이 된다면….”
“당신이 미학을 가지건 말건 우린 빌어먹을 살인자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미학을 지켜주기 위해서 이런다는 걸 왜 모릅니까?”
“.........”
듣고 있던 영사가 최형림을 바라보았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리자면, 그녀의 역할은 단순합니다. 필요하다면 그녀는 배제하고 저희 부하들로 그녀의 역할을 대신 시킬 수 있습니다. 원하는 이들을 죽일 수 있지요.”
“영사, 당신도 허튼 소리 그만둬요. 그녀를 자극하지 말고, 사이다패스에게 중요한 건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그 '미학'이니까.”
최형림은 자꾸만 사이다패스를 자극하는 영사를 입 다물게 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