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196화 (196/269)

제196화

영사의 방식 #8

“........”

“쳇.”

사이다패스는 그 말을 듣고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도 최형림이 그녀의 미학을 긍정해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미학을 이루기 위해서 미학에 반하는 일들은 몰래 처리하려 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자신을 손바닥 위에 두고 조종하려는 속셈이 있다.

‘아니 뭐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이 남자는 날 조종하려 한다. 문제는 이런 남자가 그나마 가장 쓸 만하다는 것?’

영사는 아예 그녀를 배제하려고 한다.

그걸 생각해보면 그나마 최형림이 낫다.

“이 리스트의 데이터를 분석해야 하니까. 오늘은 이만 하지요. 해산합시다.”

최형림은 피가 흐르는 손을 손수건으로 싸맸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다.

영사는 최형림이 자신의 칼날을 잡자마자 절묘한 힘조절로 그의 상처를 최소화한 것이다.

긁힌 상처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얕다.

하지만 최형림은 의도적으로 상처에 힘을 주어 피가 좀 더 많이 나오게 했다.

“뭐? 나는 아직 저 영감탱이랑 할 말이 남았는데? 아….”

사이다패스는 피가 많이 흐르는 최형림의 손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알겠어. 어쩔 수 없군. 오늘은 네 얼굴을 봐서 참지. 하지만 이번 일은, 애초에 내게 걸릴 정도로 한심한 짓을 한 너희 잘못이야. 나는 계약에 묶여있는 계약자고 내 계약은 이 미학의 위에 있어. 이걸 단순히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날 우롱하려고 하면 큰 코 다칠 거야.”

“후후후. 숨기려면 잘 숨겨라? 그런 뜻입니까?”

영사가 비웃음인지 진짜 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사이다패스는 영사를 노려보다가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그녀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

“필요하시다면, 그녀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영체 상태인 그녀와는 끝이 없을 테니 말이지요.”

“영사.”

“....아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래저래 제가 너무 큰 불찰을 저질렀습니다.”

영사의 눈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들거린다. 최형림은 그런 그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이 남자, 너무 위험하군. 오늘은 날 시험해보기까지 하다니.’

최형림은 영사가 불찰이니 어쩌니 하면서 사과하긴 하지만 오늘의 일이 다분히 고의였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영사가 말한 대로, 그에겐 계약자나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이용하면 사이다패스의 살인 능력은 쉽게 흉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형림이 그걸 승인하면 결국 이 조직의 주도권은 전부 영사에게 가버린다.

지은재는 이미 영사의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거기서 사이다패스 까지 배제해선 안 된다.

그럼 죄다 영사의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 아닌가?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최형림이 사이다패스의 '미학'을, 그녀의 '선언문'을 원하는 것도 사실이다.

“불필요하게 그녀를 자극하지 마세요.”

“그녀의 본체를 찾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본체를 찾아두면 우리의 손에 쥐어질 카드가 매우 많습니다만?”

“그래도 안 됩니다. 그녀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니까요.”

최형림은 그리 말하고 태블릿 PC를 열어보았다.

“이거 참, 전 어떻게든 최검사님께 좀 숨 돌릴 시간을 드리고 싶었는데.”

“이 리스트가 들어왔으니 정보를 분석하고 조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꽤 들 겁니다. 그걸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제게 말입니까?”

“예.”

최형림은 영사에게 파일의 정보 분석을 넘겨주었다.

‘상당히 업무량이 많은 일이다. 수사권을 지니고 있는 내가 하는 게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영사를 번거롭게 만들 필요가 있겠어.’

영사라는 인물이 조금만 고삐를 느슨하게 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물인 이상, 최형림은 그를 좀 더 바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흠. 알겠습니다. 그럼 기쁘게 이 일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영사가 미소를 지었다.

“류하리 아가씨 쪽을 잘 부탁드립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최형림은 피가 멎은 손을 바라보며 손가락 사이로 영사를 바라보았다.

* * *

다음날 아침 추정훈은 아침 뉴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화재 사고 소식을 들으며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로비스트 이영하는 전기충격기에 맞은 후 토치로 코와 입, 호흡기 입구부분을 지져져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화재 현장 안에 있는 시신이니 법의학자가 해부한다고 해서 진상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아주 유능하군. 대단해.”

추정훈은 만족스럽다는 듯 자신의 자택에 찾아온 영사를 향해 말했다.

“원 이사. 정말 수완이 대단하군.”

“아니 과찬이십니다. 꽤 재밌는 방법을 생각하셨더군요.”

한강건재의 원영재 영업이사. 현재 영사의 신분이었다.

그는 추정훈의 치하를 받으면서 창문의 블라인드를 손으로 제쳐 창밖을 보았다.

창 밖에는 경찰차를 끌고 와서 대기하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였다.

순찰용 차량이 아니라 형사들이나 수사팀이 즐겨 쓰는 승합차량인 것을 보니 숨어서 감시한다기 보다는 영장심사 나오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혹시 경찰들이 연락해 왔습니까?”

“아 오늘 아침에 시끄럽게 전화 와서 끊었지.”

“........”

영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추정훈이 로비스트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지나가는 삼척동자도 알만한 사실이었다.

돈 돌려달라고 시위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경찰들은 그래서 그를 참고인으로 조사에 협조해달라고 불렀을 테고 그걸 거부했으니 영장을 청구했을 것이다.

“실수하셨군요. 그런 때는 자진 출두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제가 알리바이는 만들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날 비난하는 거야?”

추정훈의 눈이 번들거리는 광기를 드러냈다.

약에 취해있는 그는 자신의 일을 도운, 아니 사실상 실무를 도맡아 한 영사에게 성질을 냈다.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할 짓이 아니다.

청부살인을 맡겨두고 그걸 실행한 수행자에게 성질을 내다니.

하지만 이건 그만큼 추정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약을 너무 했군. 왜 요새 부잣집 자식들은 다 이 모양이지. 21세기가 되면서 다들 약을 너무 쉽게 손대는 데… 내가 너무 옛날 놈인가?’

영사는 추정훈의 상태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을 협박하는 추정훈이 무섭다기 보다는 너무 가소로워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그래도 그는 예의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어차피 영장은 곧 나옵니다. 그 전에 경찰에 연락하셔서 자진출두하시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겁니다.”

“아 그렇지. 그게 좋겠다.”

“...네?”

“내가 경찰에 출두해 있는 동안 사건이 또 벌어지는 거야. 그러면 날 의심하지 않겠지?”

추정훈은 여기서 사람을 더 죽이자는 소리를 했다.

참 한심한 소리지만 영사로서는 쌍수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최형림을 더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으니까.

“흐음. 예를 들면? 누구를 말입니까?”

“날 협박한 외노자 새끼들 말이지.”

“그들 말입니까?”

추정훈은 영사와 살인예술가에게 부탁하기 전에 이미 외국인 폭력조직에 접촉해 그들에게 살인 청부를 넣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살인 청부를 받은 외국인 폭력조직은 오히려 추정훈을 협박해 금품을 요구하고 있었다.

살인 청부했다는 사실을 입 다물어 줄 테니 돈을 내놔라.

그런 협박은 추정훈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돈이 아깝다기 보다는 이놈들이 자신을 호구로 보고 얕잡아본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한 것이다.

“그래. 내가 경찰에 출두해있는 동안 그들이 죽어 없어지면 경찰도 날 의심하진 않을 거 아냐? 물론 살인 수법은 달라야 겠지.”

로비스트 때도 그렇지만 추정훈은 앙심을 쉽게 품는 인물이었다.

그 앙심만으로 사람을 죽이겠다니.

‘그런 짓을 해도 이미 기운 사업을 살리진 못할테고 이미 드러난 무능을 덮지는 못할텐데. 뭐 상관없는 일인가.’

영사는 추정훈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타겟은 어디까지 잡을까요? 수법은 얼마나 잔혹하게?”

“그건, 생각을 좀 해보지.”

그렇게 말한 추정훈은 노트북을 꺼내 암호화된 채팅방을 이용해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바로 자칭 살인예술가, 지은재였다.

‘아무래도 일단 살인예술가에게 걸리면 이후 계속 의존하게 되나 보군.’

영사는 지은재에게 의존하는 추정훈을 보며 새삼스럽게 살인예술가란 저 계약자의 강력함에 감탄했다.

* * *

시현은 세면대에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너머 비쳐 보이는 그의 머리 위의 남은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

“계약자를 구해 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설마 이대로 끝인가?”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타자기가 타다다닥 하고 울어대기 시작했다.

[안심하십시오. 곧 계약자가 올 겁니다.]

“.........”

과연 잠시 후 시현의 사무실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놀랍게도 영사와 류화영 부인이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자!”

류화영 부인은 대뜸 서명된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집어 던지는 그녀를 대신해 영사가 계약서를 주워 시현에게 건네주었다.

“놀랍군요. 무슨 심경의 변화입니까?”

시현으로서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서명해서 나타난 류화영이 얄밉기만 하다.

이대로 오지 않았으면 시현이 악마들에게서 승리하고 그 영혼이 해방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악마에게 상납했던 수명들 이상의 보상을 받아 자유롭게 될 텐데.

“말할 필요 있나요? 우리 애를 위해서 수명 정도는 아깝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런데 여기 거는 건 정말 수명뿐이죠? 뭐 나중에 지옥가거나 그러는 거 아니고?”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시현이 그렇게 말할 때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이더니만 묵주를 꺼내 시현에게 내밀었다.

십자가가 매달린 묵주를 시현에게 내밀고 반응을 보는 걸 보니 정말 시현을 무슨 악마의 화신쯤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시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고객만족을 위해서 정말 무슨 흡혈귀 영화의 흡혈귀처럼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하지만 그런 장난을 했다가는 정말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기는 줄 알고 없었던 일로 할 거고 그렇게 되면 타자기의 악마는 '계약자를 구해왔는데 시현이 악질적인 방법으로 내쫓았다.' 그런고로 계약의 실패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발뺌할 여지가 있었다.

“그럼 부탁해요.”

“그런데 말입니다.”

시현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계약서를 받아들고 말했다.

“이미 로비스트는 죽었습니다. 아마도 아드님께서 손을 쓴 걸로 보이는 군요.”

“뭐요!?”

그 순간 류화영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내 아들이 살인자라는 거야?!”

“네.”

“아니 무슨 근거로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야?! 너 당장 증거 대봐! 그런 거 없이 개소리를 한 거면 가만 안 놔두겠어! 알아?! 어유! 기분 나빠!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류화영은 참지 못하고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답 대신 시현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증거 말이지요?”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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