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영사의 방식 #9
그 순간 휴대폰에서 음성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아! 내가 선금 분명히 줬냐 안줬냐? 너희 같은 거지새끼들에겐 과분하게 1억이나 줬는데 너희들이 감히 날 협박해? 내가 살인 청부했다고 너희들이 날 고소하면 너희들은 사기에 살인범 새끼들 아니냐! 못 배워서 그러냐? 아니면 너희 가난하고 미개한 동네에서는 사람에게 은혜를 받으면 그 따위로 대접하는 게 스탠다드냐? 아 스탠다드가 뭔 소린지 모르지? 못 배운 새끼들이라서? 선금을 토해내던가 일을 하던가, 둘 중 하나만 해라. 어? 날 호구로 보나 본데 이거 집안에 손 안 벌리고 내선에서 처리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거지 너희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알면 이렇게 못한다. 어?]
아마도 저들에게 협박당한 후 분노해서 반발하는 것 같은데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이 살인 청부를 했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긍정하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걸 왜 당신이 가지고 있어? 이건 우리 애 목소리가 아냐! 그래. 합성! 뭐 그, 그런 거야!”
류화영이 그렇게 말했지만 시현이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자 똑같은 음성과 함께 영상이 재생되었다.
즉 애초에 시현이 가진 파일은 동영상 파일이고 거기서 소리만 떼어 와서 처음에 틀어준 것이다.
절대 자기 자식이 그랬을 리 없다고 주장하던 류화영은 이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시현이 가지고 있는 이 파일은 그것만으로도 추정훈을 감방에 처넣을 수 있을법한 자료였기 때문이었다.
“로비스트에 대한 살인청부를 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로비스트와 회사 비서가 죽었지요.”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어. 우연의 일치에요.”
“우리 애라고 하지 마세요. 추정훈 사장은 벌써 30대입니다. 자기 앞가림은 진작했어야 할 나이입니다. 경우 없이 부모나 친척이 일방적으로 싸고도니까 멀쩡하던 사람도 맛이 가는 거 아닙니까?”
시현은 그리 말하고 테이블 위의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그런 고로 지금은 이 계약은 거절하겠습니다.”
“네?!”
“저희 탐정사무소에도 원칙이 있으니까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시현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추정훈과 같은 살인자는 그의 계약자가 될 수 없다.
지금까지 시현 탐정사무소는 필요하다면 물론 불법적인 수단도 강행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색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법이 구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뛰어든 것이다.
타자기의 악마와 데드맨의 계약에는 그런 특약들이 아주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계약 대상자가 북한에 있어서 만나기 위해서는 월북하라는 걸 할 수 없도록 계약 대상자는 적어도 시현과 얼굴을 직접 맞댈 수 있는 이들로 한정하고, 청원을 이뤄 줌으로서 국가와 사회에서 배제당할 만한 일은 계약이 될 수 없다고 명시해두었다.
그런데 추정훈은 그런 점에서 계약자가 될 자격이 없다.
지금 계약자로 타자기의 악마가 준비한 이는 살인자인 추정훈이 아니라 그 어머니인 류화영이니까 괜찮다고?
그럴 리 없다.
류화영이 원하는 건 추정훈의 완전무죄방면.
시현으로서는 거부할 수밖에 없는 계약이다.
그렇다고 합리적인 선에서 조정될 리도 없다.
류화영은 시현을 모르지만 시현은 류화영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외동아들인 추정훈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며 그 사랑은 끔찍하게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성격의 것이다.
추정훈이 살인교사가 아니라 직접 사람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그녀는 피해자들의 안위보다는 자기 아들을 더 걱정할 인물이었다.
그러니 추정훈의 처벌을 가볍게 해달 라던가 하는 식으로 의뢰 내용을 변경해 계약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마침내....
마침내 해방인가?
‘지금까지 모은 수명이 얼마지? 계약상 타자기의 악마에게 넘겨준 수명 분까지 배로 돌려받게 된다면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되나? 평범한 인간만큼의 삶이 보장되나? 그 이상도?’
시현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대로라면 악마에게서 해방될 지도 모른다. 앞으로 18시간 내에 타자기의 악마가 다른 계약자를 구해오지 못한다면, 혹은 지금 류화영이 시현이 받아들일 만한 내용으로 계약 범위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시현은 악마의 계약에서 해방된다.
그냥 해방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악마에게 바쳤던 수명을 배로 돌려받아서, 확실하게 해방되는 것이다.
오랜 감방생활이나 군 생활에서 해방될 날이 코앞에 다가온 것 같아서 심장이 뛴다.
악마에게 승리하고 자유를 쟁취할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단 말인가?
‘아, 안 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저 악마새끼들은 시간도 공간도 뒤집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놈이야. 여차하면 판을 뒤집어서 수복할 수도 있는데 내가 순순히 이기게 놔주지 않을 거야. 기대하면 실망하게 된다. 그렇지만....’
기대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눈앞에 승리가 아른거리니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아서 흥분된다.
그런데....
“후후후후.”
영사가 시현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 * *
“자, 잠깐만. 그런데 이걸 보면 우리 애, 아니 정훈이가 청부를 했다가 거부당한 거잖아? 응? 이건 오히려 우리 애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저와 계약하실 필요가 없지요. 무고하신데 왜 굳이 수명까지 지불하면서 계약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고객만족을 위해서도 계약은 안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이미 이 계약에 마음이 떠난 시현은 빈정거렸다.
여기서 계약자를 긍정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서 타자기의 악마가 제때 계약자를 대주지 못했다는 유책사항을 만들면 시현의 승리가 된다.
굳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수정해서 계약을 맺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실례합니다만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그동안 시치미를 뚝 떼고 있던 영사가 나선 것이었다.
* * *
“이 영상을 준비한 걸 보니 계약을 하지 않았음에도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이거 계약을 못하면 그것도 꽤 손해가 막심할 것 같군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서 사전 조사는 제가 담당해야 할 비용이니까요.”
“그래도 계약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고쳐서 저희 류 이사님과 시 소장님 양방 모두 좋은 결과를 도출했으면 합니다.”
“.........”
당신들이야 좋겠지. 시현 입장에서는 계약 안하고 그냥 타자기의 악마에게서 승리하는 게 낫다.
그러나 시현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영사는 시현이 악마와의 계약에서 승리하고 해방되는 꼴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저야 그렇다 쳐도 류화영님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수명을 거는 계약은 계약자의 납득이 필요하다.
아무리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도 자식이 살인교사로 잡혀 들어가게 된다거나 혹시 그 전에 죽는다던가 해서 추정훈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류화영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납득할 리가 없다.
과연, 류화영도 이야기를 진행하는 영사에게 당황했다.
“아니 원 이사.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이 탐정이 가지고 있는 영상만으로도 추 사장님을 감방에 처넣기엔 충분한 증거입니다.”
“!?!”
“즉 이 탐정을 회유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 딱히 이걸로 이익을 취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시현은 자신이 준비한 영상을 오히려 물고 늘어지는 영사를 보며 혀를 찼다.
역시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임기응변이 뛰어나다.
시현의 원칙대로라면 추정훈에게 제안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최대한 감형을 받을 수 있도록 자수시키고 살인예술가에 대한 정보를 뜯어내는 것.
그게 시현이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살인예술가를 잡아낸다면 검경도 기뻐서 사법거래에 쉽게 응할 테니까.
하지만 그 계약을 해도 류화영은 만족하지 못한다.
시현이 살인예술가를 잡아내고 그 공로로 사법 거래를 한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자식이 아예 무죄방면 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영사는 역으로 시현이 지닌 영상을 문제 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현은 계약을 안 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포섭해야 할 상대로 돌변하게 된다.
‘이 작자가 진짜!’
시현은 자신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영사를 보며 내심 분노했지만....
영사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 * *
“잠시 이야기 좀 나눠 볼까요?”
시현은 영사에게 손짓했다.
영사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단 둘이 말입니까?”
“네.”
“...흠?”
영사는 류화영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영사는 시현과 함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무슨 생각입니까?”
“후후. 나는 널 도와주는 거란다. 시현. 아니 데드맨이라고 불러줄까?”
“돕는 거라고요? 이게 말입니까?”
“설마 이 정도로 저 계약을 거부하려는 건 아니겠지? 위대한 존재가 계약자를 대령했는데 그게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거부하는 걸로 설마 정말로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
아픈 곳을 찔렸다.
류화영이 만족할만한 거래가 시현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그건 시현의 자의적인 해석이며 타자기의 악마가 그런 해석을 곧이곧대로 인정할 지는 의문이다.
“아무래도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해서 너무 해이해진 것 같군. 시현. 너는 류하리 양을 대신해 데드맨 계약을 인수했어. 즉 위대한 분들에게는 적어도 네가 류하리 양 이상의 즐거운 소재라는 거지. 그런데 이렇게 쉽게 무대에서 내려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불가능해. 누구도 그분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당신은 성공해서 벗어났잖습니까”
시현은 영사가 과거에는 계약자였으며 계약에서 해방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작 그는 계약에서 해방되었지만 계약자이던 시절, 저 악마들과 연결된 존재였던 그 순간의 일체감을 잊지 못하고 이제는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악마들에게 어떻게든 눈에 들기 위해서 애쓰는 존재.
그게 바로 영사의 본질이었다.
“그러니까 내 조언을 새겨듣도록 해.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인 나를 말이지.”
“조언이 공짜라면, 뭐 못 들어줄 것도 없지요.”
“하하하. 왜 이러나 시현. 이 세상에 공짜는 없지. 내 조언이 효과적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어야 겠어.”
“어떤 대가 말입니까?”
“한 번 눈감아주는 것.”
“사이다패스를? 아니면 살인예술가를? 그것도 아니면 최형림 검사 말입니까?”
“하….”
영사는 시현의 당돌한 말에 혀를 찼다.
놀랍게도 시현은 영사가 그들과 이미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아챈 모양이다.
단지 떠보는 거라기에는 너무 정확해서 영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