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영사의 방식 #10
“역시. 알고 있었나? 왜 가만 내버려두고 있었지?”
“그야 뭐.”
“내 제자 답구만. 좋아. 어느 쪽이건 치명적으로 걸렸을 때 한 번 빼주는 조건으로 하지.”
“치명적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군요. 그냥 차라리 이 계약을 거부하고 악마와 담판을 짓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잘하면 계약에서 승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 타자기의 악마,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으니까요.”
시현은 지금까지 몇 차례나 타자기의 악마의 허를 찔러서 승리해왔다.
그러나 시현이 그렇게 말하자 영사는 정색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시현. 악마들이 허술해 보이는 것은 그들은 우리 세계에 인간성을 가지고 개입할 때는 꿈을 꾸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본질적인 역량과 분리된 채로 투사되기 때문이지. 그게 그들의 진짜 능력이나 성격이라고 생각해서는 위험하다.”
“하지만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해방된 겁니까? 그들이 그렇게 절대적이라면?”
“아. 시현. 나는 인간성을 모조리 불태우고 공허한 재만 남아버렸기 때문이지. 그분들에게는 더 이상 재미없는 존재가 되어서 버림받은 것이다. 반면 너는 다르지. 왜냐면 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데드맨 계약을 인수한 어리석은 놈이니까.”
영사는 그리 말하며 시현을 노려보았다.
우스운 일이다.
시현은 악마와의 계약에 사로잡힌 존재.
그리고 영사는 오래전에 이미 계약에서 해방된 존재다.
그런데 영사는 시현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다.
보통 그 반대여야 하는 게 아닌가?
“네가 계약을 인수받은 순간 네가 사랑하던 여자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모습, 그녀의 육체, 그녀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는 이미 네가 알던 그녀가 아니야. 너는 네가 한때 사랑했던 여자의 껍데기를 위해서 계약을 나눈 멍청이다. 그러니 어찌 재밌지 않을까? 그분들은 네 인간성이 닳고 닳아서 결국 네가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파멸할 때까지 너의 고통을 기쁘게 보아주실 거다. 그 날 까지는 절대로 널 놔주지 않을 거다.”
영사는 그리 말하더니 품에 손을 넣어서 메모리카드 하나를 꺼내더니 시현에게 던져주었다.
“자료는 주겠다. 판단은 네가 해라.”
“내가?”
시현은 받아들고 당황했다.
그러니까 영사는 일단 자료를 넘겨주고 그걸 보고 나서 영사에게 빚을 졌는지 안 졌는지 판단하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류화영을 만족시키는 데 굳이 추정훈이 멀쩡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안 그래? 그녀가 추정훈을 사랑하는 이유를 떠올려 봐라.”
“아.”
그 순간 시현은 자신이 받은 메모리카드에 뭐가 들었는지 눈치 챘다.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영사가 말한 대로였다.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 계약자인데 자신이 생각하기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이 계약자는 계약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독단적으로 생각해서 거부했었다면 악마들에게 패배하게 될 것이다.
“왜?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흔들렸나? 아니면 최근 류하리 양과 사이가 좋아져서 어쩌면 여기서 계약을 벗어던지면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재구축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했나?”
“큭.”
시현은 패배감에 몸을 떨었다.
류화영은 원래부터 영사가 평상시 관찰하고 관리하던 인물이라 그렇다고 하기에는... 계약에서 너무 안일했다.
“이번에는 내가 도와주었으니… 거래는 받아들인 걸로 알겠다.”
영사는 시현을 남겨두고 류화영에게 돌아갔다.
* * *
로비스트 이하영과 그 부하직원들이 살해당한 사건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평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 의심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중에는 물론 추정훈도 있었다.
이하영의 회사 앞에서 돈 돌려달라고 시위를 했으면서 경찰들이 의심하질 않기 바라는 건 좀 무리가 있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추정훈은 경찰들의 수사협조요구를 묵살했다.
물론 수사협조에 응할 이유는 없다.
영장이 나오기 전까지는 법적인 강제력도 없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경찰이 수사협조해달라고 하면 경찰서에 나오곤 하는 데, 이는 경찰이 보복하는 법치기관이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앙심을 품고 보복한다. 그러니 어지간히 켕기는 게 있지 않는 한에서는 수사에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추정훈은 경찰들의 수사협력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로펌을 고용했다.
이상한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이었다.
그런데 그게 먹혀들어갔다.
“이거 뭐 딱히 증거가 있는 건 아니고 정황증거니까.”
“게다가 추정훈 그놈 숙부가 그거잖아. 류장천....”
“그러고 보니 류장천 회장 딸이 경찰로 와 있었다고 들었는데. 마포 경찰서 였지? 분명히?”
나이 진득한 경찰들은 류장천의 수완을 잘 알고 있었다.
건설이 지금보다 더 어두컴컴한 일이었을 무렵 류장천 회장은 건설업체에 건재를 독점으로 공급하다 시피 하고 한국 굴지의 대기업인 SH와의 거래로 성장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SH그룹의 비호, 그리고 인간인지 악마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완벽한 류장천 회장의 수완 때문이었다.
류장천 회장에게 거스르는 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파멸한다.
경찰 수사반장은 갑자기 무능력자로 낙인 찍혀 경질되고.
신문기자는 아이가 유괴 당한다.
요새는 예전처럼 그런 우악스러운 수단은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추정훈이 고용한 로펌은 전직 판검사들이 즐비한 경찰 두들겨 패기 전문 로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잠깐만요.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화재 현장의 증거들은 유실되고 증인들의 기억력도 증언의 명확성도 훼손될 거예요.”
성신아는 시간을 더 들이면 증언을 구하기 힘들어질 것을 경고했다.
어차피 추정훈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직접 살인을 하지 않고 청부살인을 했을 것이다.
청부 살인은 현장 증거로 잡을 수 없다.
꼼꼼한 수사, 목격정보가 필요한데 시간을 끌면 끌수록 증거들과 증언들이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성신아가 그렇게 말하자 나이든 경찰들이 코웃음 쳤다.
“오 성신아 경위. 아주 열혈 경찰 나셨어.”
“하긴, 열혈 경찰이니까 현장에 뛰어다니지.”
다른 주임 급 경찰들은 성신아의 말에 은근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뭘 알지도 못 하는 경찰대학 출신 어린 여자의 발언이라고 무시하는 것이다.
‘아 진짜 이 틀딱들이!’
성신아는 경찰들이 말을 안 듣는 것에 속이 탔다.
* * *
사실 그녀는 전날 시현과 함께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금천구 쪽에 가서 그곳의 폭력조직들과 만났었다.
시현의 정보원이 이미 외국인 폭력배들 사이에 있어서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건 그리 어려지 않았다.
외국인 폭력배들은 자신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모욕하길 거리낌 없이 하던 추정훈에게 화가 나있었다.
‘우리도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지. 허나 고 간나새끼, 매번 우릴 무시하고 가난하니 뭐니 그런 소리 입에 달고 있는데 화딱지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지 뭐야.’
‘여기 그놈 영상을 줄 테니까 어찌 잘 이야기해보 게.’
이렇게 말하는 투를 보면 원래 그들은 살인 청부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는데 상대인 추정훈이 억지로 그들에게 돈을 찔러줘서 그래서 본의 아니게 돈을 받고 차마 되돌려주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
적어도 이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성신아는 바보가 아니다.
이들은 살인 청부도 받는 조직임에 분명하다.
다만 추정훈과의 계약은 거부하고 살인이 일어났다면 그 책임을 전부 추정훈에게 미루기 위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영상도 죄 편집되어서 자기들 모습은 안 나오게 했잖아? 뭐 영상에서 말하는 걸 보니까 나 같아도 화나긴 하겠다만. 추정훈이라는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데. 약물검사하면 100% 걸리겠어.’
어쨌건 일단 청부하던 내용이 있으니 이걸 이용하면 영장청구도 구속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시현이 그 자료를 자기가 가지고 성신아에게는 최저시급만 주었던 것이다.
“아니 잠깐만요. 이게 뭐에요?”
“탐정 조수로서의 아르바이트 비입니다.”
“네? 아니 그 자료 주세요. 그거면 추정훈을 잡을 수 있어요.”
“추정훈은 잠재적 고객님의 아드님입니다. 지금 이건 사전 조사이지 추정훈을 잡아서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 뭐 그런 소리를 하세요? 게다가 왜 최저시급이에요? 설령 최저시급이더라도 지금은 밤 시간이니까 야간 근로 수당을 지불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탐정 업은 야간근로수당 제외업종입니다.”
“네? 정말이에요?”
“...하아.”
시현은 돈을 50% 더 주었다. 돈을 더 주는 걸 보면 탐정 업은 야간근로수당 제외업종이라는 말은 그냥 질러본 허풍인 것 같았다.
“됐습니까?”
“네. 감사합... 아 이게 아니지.”
성신아는 정신을 차리고 당황했다.
시현에게 돈을 받아버린 지금 그녀는 시현에게 약점이 잡혀있는 것이고 그러니 시현이 가진 정보나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러라고 생각하고 한 일이지만 이건 좀, 너무한데?’
그리고 지금, 성신아는 자신의 눈앞에서 추정훈 사건을 대충 뭉개고 묻으려고 하는 다른 경찰들의 태도에 경악했다.
추정훈의 집안이 뭔가 힘깨나 쓰는 놈들인가 보다.
‘그런데 추정훈이 류하리네 사촌이잖아. 류하리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나? 주임 급들이 벌벌 떠는데?’
현장에서 오래 굴러먹은 경찰들조차 꺼려하는 힘이 류하리의 집안에 있다니 성신아는 왠지 배가 아팠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시현이 대낮, 업무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네?”
[혹시 추정훈 씨 잡아넣을 생각이 여전하십니까?]
“글쎄요. 주임들이 다들 벌벌 떠는데요? 저는 하리처럼 집안이 좋지 못해서 경찰 월급도 소중하거든요. 앞으로 계속 쭉 경찰복 입고 지내려면 무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어차피 전 여경이라 여기 현장직 사람들이 날 그냥 순환근무로 스쳐지나갈 사람으로 보고 있기도 하고.”
[그럼 당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야 겠군요. 아쉽군요. 공을 세울 기회일 텐데?]
“네? 공이라고요?”
성신아는 화들짝 놀라서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 * *
추정훈은 자택에서 다음 살인을 위해서 살인예술가와 접촉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선금을 받아먹고 나 몰라라 한 외국계 폭력조직을 죽여 없애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살인예술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에 경찰이 수사에 협조하게 출두해 달라고 전화가 왔었지만 그는 그런 경찰의 수사협조 요구를 거절하고 살인예술가와의 대화에 더 집중했다.
어차피 경찰들은 그가 실제로 살인을 청부 했다는 걸 입증할 수 없으리라.
살인 청부는 정말 입을 싹 닫을 수 있는 믿을 만 한 놈이 있다면 어지간해서는 잡히지 않는다.
경찰의 수사요구 따윈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여기고 계속해서 다음 타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집의 도어락을 누군가가 누르기 시작했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