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폐쇄사회의 균열 #2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최형림은 영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아해했다.
“적어도 류하리는 그를 강남 경찰서 사건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군요.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걸 보면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같이 알던 사이 같습니다.”
“네.”
영사는 최형림이 의문을 품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식과 정보에서 앞서나간다는 이 우월감은 그가 삶에서 느끼는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형림은 영사가 자신에 대해서 우월감을 느끼게 놔둘 수는 없었다.
“혹시 저 악마들이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시간순서, 인과관계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당신들 계약자들만 기억에 남고? 다른 이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거나.”
“호오? 놀랍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주어진 상황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군요. 힌트를 너무 많이 주셨잖습니까? 마치 눈치 채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믿는 법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저 위대한 자들이 우리들이 자유의지로 뭘 선택했던 간에 다시 시간을 되돌려 우리들의 가장 숭고한 선택조차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고 그렇게 절대적인 힘으로 개입할 수 있다면? 그렇게 믿는 다면 매우 괴롭지 않겠습니까?”
영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어보았다.
믿고 싶은 것을 믿을 것이냐. 진실을 믿을 것이냐?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사는 이미 최형림의 질문에 대답했다.
“놀랍군요. 그 탐정은 그럼 정말 류하리를 위해서 그녀 때문에 데드맨이 된 겁니까? 그런데 류하리는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이런, 재미없는 반응을 보이시는 군요. 집중하는 부분이 거기입니까?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조차 무의미하다는 부분이 아니라?”
“네. 예를 들어서 내가 만약 어렵고 험난한 길을 뚫어 어떻게든 최중선 회장에게 복수를 했을 때, 그 후 악마가 나의 시간을 되감고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을 없었던 일로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
“아마 기뻐할 지도 모르겠군요. 복수를 한 번 더 맛 볼 수 있으니까?”
“흐음.”
영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제가 실례했군요.”
당신을 너무 우습게 봤다.
영사는 그런 의미에서 사과를 했다.
최형림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영사는 이번 대화로 알게 되었다.
하기야. 보통 검사가 살인자와 손을 잡고 사람들을 죽여대진 않겠지.
“어쨌거나 최 검사님께서 그녀를 빼앗아 주시지요.”
“..........”
“만약 그녀를 데드맨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면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을 테고, 이제 더 이상 사랑의 마음이 식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면 그건 그것대로 끔찍한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한때의 열정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내놓다니. 하하하하.”
영사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언제나 잘 웃는 영사였지만 지금처럼 진심으로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시현에게, 데드맨에게 고통과 회한을 안겨줄 수 있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쁜가?
“아무래도 당신은 데드맨을 질투하는 것 같군요? 그게 아니면 굳이 데드맨에게 고통을 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현재 그는 저희를 방해하진 않고 있습니다만? 굳이 자극할 필요가?”
“우선... 제가 그를 질투하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인정하지요. 그를 괴롭히는 건 제게 있어선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그것 참....”
“최 검사님의 복수가 포기할 수 없는 개인적인 목적인 것처럼 데드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건 제가 포기할 수 없는 목적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이 지루한 삶을 견뎌내기 힘드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그는 언젠가 반드시 최 검사님의 위협이 됩니다.”
별 근거 없는 확신이지만 영사는 당당했다.
마치 미래를 열어보고 온 사람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였다.
“당장은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두더라도 최 검사님이 정계에 진출하고 점점 마각을 드러내게 되면 우리 앞을 막아설 겁니다. 지금 당장 내버려두는 건 최 검사님이 정계에 진출해야 더 많은 계약자들의 복잡한 운명을 추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정계에 진출하고 마각을 드러낸다?”
최형림은 그 말의 함의에 실소했다.
네가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마’ 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이 아닌가?
물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최형림 같은 이가 정치가가 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있어서 크나큰 비극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정계에 있는 이들은?
그들은 뭐 별반 다를 바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성취 리스트를 보라.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성벽을 위해서 자신들의 딸보다 어린 여자아이들도 기꺼이 약취한다.
소녀들을 꿈으로, 약으로, 돈으로 낚아 그들의 육체를 권력자들에게 향락의 대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이번에 얻은 로비스트의 파일은 또 어떠한가?
로비스트 파일에 있는 이들은 소위 모피아라 불리는 금융관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해외 금융사 등에서 근무하던 검은 머리 외국인들과 금감원, 산업은행, 중소기업청 등과 연결해주며 거의 나라를 수익원으로 만들어 팔아먹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 중 상당수가 성취 리스트와 겹친다.
나라를 팔아먹고 국민들을 등쳐먹으면서 어린 여자애들을 약에 절여 성접대에 동원하는 쓰레기들이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과 손을 잡고 이 땅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에 비하면 최형림 자신이 그렇게까지 박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되겠지.
‘내가 날 정당하다 생각하면 끝장이다.’
최형림은 자신이 악임을 인지해야만 했다.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는 존재임을 인지하고 긍정해야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차피 최 검사님은 류장천 회장님의 지원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뭐 노력은 해보지요.”
최형림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 * *
류하리의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당연하다.
류하리의 고종 사촌 오빠, 추정훈이 살인 교사 혐의로 잡혀 들어갔고 그가 숨기고 있던 사생아가 발견되었다.
경찰의 수사로 추정훈이 마약을 상시 사용했음도 밝혀졌으니 집안 꼴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휴우. 이게 대체 뭔 난리인지.”
류화영은 정작 덤덤한 태도였다.
한때 자신의 아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파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극단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류하리는 그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이해하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류하리는 이 고모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내심 혐오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와 감정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우물 밖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시킬 수 는 없는 법.
류화영이라는 인간은 이미 자신의 세계관이 확고하며 그 세계관 안에서 모든 것이 완결된 존재다.
그녀가 학습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음, 아마도 지금 당장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 후 찾아오는 변화는 성장이나 학습이라기보다는 파괴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 류화영의 세계관에서 그녀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조언을 했다.
“너는 빨리 결혼해서 애를 낳으렴. 최 검사가 바쁘니까 네가 내조를 잘 해야지.”
“내조요?”
“그래. 경찰대학을 간 건 좋지만 언제까지 그런 천한 일을 계속 할 거니? 이만하면 너 자신을 증명하는 건 끝나지 않았니. 이제 그만 남편 내조하면서 여자의 행복을 찾아야지?”
“.........”
자신의 자식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잡혀간 상황에서 어째서 조카에게 빨리 결혼해서 애를 낳으라는 결론이 도출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류하리는 류화영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유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나니까 더더욱 혐오스럽다.
하지만 그녀가 혐오나 분노를 표시한들 이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는 수천 년을 내려와도 살아남은 금자탑처럼 튼튼한 자아라고 할 것이다.
류하리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고모와, 그런 고모를 묵인하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 입을 다물었다.
* * *
고모 류화영의 말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류하리는 경찰 대학 수석 졸업자.
검도 2단에 사격선수 출신, 문무겸전의 엘리트다.
보통 집안의 딸이라면 당연히 경찰 간부 코스를 밟도록 응원해 줄 것이다.
하지만 부잣집에서 태어난 딸은 그 이야기가 다르다.
류하리가 스스로 일군 것보다 그 부모가 쌓아올린 게 무조건 더 크니까, 류하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녀가 무엇을 성취하더라도 젊은 시절 한풀이나 해보라고 방치하고 지원한 것 정도에 불과하다.
고모와의 대면은 류하리에게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 * *
“아 그러니까 뭐야? 집안이 너무 부자라서 정략결혼으로 치워질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시다 이거야? 그런데 그 정략결혼 대상이 동기들 다들 껌뻑 죽는 최형림 선배고? 네가 지금 배가 불러서 죽으려고 그러는 구나?”
성신아는 류하리의 말을 듣고 짜증을 냈다.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류하리와 달리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아니 사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진 않다.
다만 성신아는 부모에게 손을 벌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와 동생이 버려진 걸 발견하고 거두어 준 양부모였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입양절차를 거친 것도 아니다.
버스정류장 앞에 버려진 두 남매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가게 안에 들여 준 중국집 내외가 그녀의 양부모.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가게를 열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양부모님에게 손을 벌려 그들이 벌어들인 돈을 축내는 건 성신아 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죄였다.
성신아 입장에서 류하리의 고민은 그야말로 배가 불러서 터져 죽으려는 놈의 개소리였다.
‘하지만 본인은 진지하겠지.’
성신아도 류하리가 재능으로 충만한 인물이라는 걸 안다.
왜 모를까.
그녀를 젖혀보려고 , 어떻게든 하나라도 이겨먹겠다고 죽을힘을 다 해본 장본인 아닌가?
류하리는 똑똑하고 올곧고 당차다. 이런 그녀가 자신의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집안의 사업을 보좌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하고 커리어를 내려놓는 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선배님은 뭐래?”
“뭐라고 하는 건 없어.”
“그래도 약혼자니까 만날 거 아냐?”
“만나긴 하는데…. 보통 일 이야기를 하지.”
“일 이야기?”
“사이다패스 수사나, 검찰 측에서 그 탐정 수사하는 내용 같은 거?”
“아니 젊은 청춘남녀가 만나서 일 이야기만 한단 말이야?”
성신아는 기가 막혔다.
데드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