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드맨31-202화 (202/269)

제202화

폐쇄사회의 균열 #3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 걸?”

“왜 없어. 좋아하는 게 뭐냐. 평소 뭐 먹냐. 취미 뭐냐. 등등…. 많구만.”

“으음. 아니 네가 말한 거 정보량 얼마 안 돼. 3분만에 다 끝냈지 그건.”

“병신. 그런 식이면 뭐든 금방 끝나지. 이야기를 길게 하는 건 공감하려고 하는 거지 정보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야. 내 취미가 요립니다 하면 넌 요리라고만 말하고 끝이지?”

“내 취미는 요리가 아닌데.”

“아니 하여튼 그렇다고 치고 들어보라고. 요리가 취미다 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어떤 계기로 좋아하게 되었고 어떻게 실력을 쌓기 위해 연습했고 어떤 음식이 취향이고 최근엔 뭘 조리했고 내가 요리에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걸 말하라고.”

“음 전문적인 이야기는 상대가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게다가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하아. 그러니까. 나라고 연애한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안다고.”

“너도 연애를 한 적이 없어?”

“그래. 난 누구랑 달리 흙수저라서 말야. 그런데도 자격증도 따고 운동도 하고 열심히 학교 성적도 내지 않았니? 그런 거 하는 데 연애할 틈이 있었겠냐?”

“.......”

류하리는 공격적인 성신아의 발언에 움찔했다.

그녀는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성신아는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신아는 그녀에게 공격적이어도 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신아가 왜 공격적인지, 왜 운명에 대해서 분노하는 지, 류하리의 언행에서 거슬려 하는 부분이 왜 많은지 이해할 수는 있었다.

복잡한 문제다.

“사실 그동안 남자라곤 쭉 들이대는 남자들만 상대해와서. 남자랑 무슨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세요. 하긴 경찰 대학 제일의 미녀 류하리 양이니까 어련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가만….”

류하리와 마찬가지로 최형림 역시 들이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류하리나 최형림이나 서로 대등한 관계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소리였다.

성신아는 그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류하리를 바라보았다.

“왜?”

정작 당사자인 류하리는 이런 생각까진 미치지 않은 듯 했다.

“아니, 참으로 선남선녀가 쌍으로 재수가 없구나 하고. 특히 류하리 너의 재수 없음에는 감탄 또 감탄하는 바야.”

“웃기지 말고.”

“웃기기는, 나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너 단톡방에 너 뒷다마 까는 모임 만들어진 거 알고 있어?”

최형림을 알고 있는 동기들 사이에서 류하리는 그야말로 공적이었다.

그 전부터 재수 없다. 기분 나쁘다 하고 별 이유 없이 미움을 사던 류하리였지만 그녀가 최형림과 약혼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다들 류하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추잡한 질투심의 발로라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경찰 대학 출신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류하리는 찬탈자다.

경찰 대학의 교육, 학비는 장래의 인재를 위해 국가가 하는 투자다.

그걸 집안도 부유한 그녀가 단지 스펙을 쌓기 위해 와서 빼앗아 간다면?

그녀에게 밀려 기회를 빼앗긴 자 입장에선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동기들 입장에서도 그렇다.

류하리는 수석 졸업을 하면서 동기들이 누려야 했을 상훈을 빼앗아간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경찰 조직 내에서 그 재능과 헌신으로 빛을 내지 않으면 그것은 타인들의 기회를 박탈한 것이고 경찰들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질투나 시기심이 아니더라도 동기들 입장에서 류하리를 미워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선 널 미워하지 않는 놈들이 더 속보이는 거야. 네가 경찰 대학에 지원해서 떨어졌을 사람, 너 때문에 수석 자리를 놓치고 표창장 못 받은 사람들은 물론 경찰 조직 전부를 엿 먹이는 거라고. 물론 그런 짓을 저지르는 데도 불구하고 남자 동기들 중에는 그래도 네 편드는 사람들 많더라.”

“그런 소리 하지 마. 누가 경찰 그만둔대? 다만…. 아아.”

류하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류하리와 성신아가 있는 테이블에 한 청년이 와 있었다.

누가 봐도 잘생긴, 젊은 소년 같은 인상의 청년이다.

아이돌 보이 그룹의 일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투명하고 청명한 인상을 주는 청년은 류하리나 성신아보다도 연하로 보였다.

“최형림 검사와 아시는 분이시죠?”

남자는 그녀들이 자신의 접근의도를 오해할까봐 즉시 최형림의 이름을 댔다.

“어 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명함을 내밀었다.

‘헥사곤 엔터테인먼트, 기획실장 미카엘 윤.’

“헥사곤…..”

류하리는 그 명함을 보고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헥사곤 엔터테인먼트라면 성취에게 투자했던 윤 회장의 회사가 아닌가.

겉으로는 합법적이지만 그 실체는 범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자.

하지만 경찰들 사이에서도 이미 그들이 제공하는 돈과 향응에 절어있는 이들이 많다.

“당신은….”

류하리는 문득 이 남자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 분명히 시현과 함께 있을때 나타나서 스트리머 살인사건때의 계약자를 회수해간 악마다.

그런데 어째서 방금 전까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

“아. 안심해요. 제가 여기 온 것은 당신들에게 뇌물을 먹이자고 온 게 아니니까요. 아 , 아니면 혹시 그런 거 기대하셨습니까?”

“.........”

미카엘 윤을 기억해 내고 당황하고 있는 류하리였다.

설마 악마가 직접 자신을 찾아올 줄이야.

미카엘 윤이 악마의 화신임을 알고 두려워 하는 류하리와 달리 성신아는 다른 의미로 흔들렸다.

눈앞의 남성이 매우 매력적인 용모,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데 마치 무슨 독무에 휘감긴 것 처럼 현기증이 난다.

이런 사람이 애원하듯 제발 부당한 돈을, 뇌물을 받아달라고 속삭인다면 못 받아 줄 것도 없는데. 마침 돈이 궁하기도 했고.

돈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성신아는 새삼 청렴결백이라는 게 매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돈을 안주겠다고?

“하아. 전 관심이 없나 보군요. 빠질게요.”

“아. 신아야.”

“됐어. 이야기 잘해봐.”

성신아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워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미카엘 윤과 류하리 단 둘이 카페에 남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지요? 경찰인 제가 당신과 만나는 건 부적절한 것 같은데.”

류하리는 일부러 넉살 좋게 말했다.

미카엘 윤의 인간 신분, 헥사곤 엔터테인먼트 윤 회장의 아들이라는 점을 볼 때 경찰과 만나는 건 부적절하지 않은가?

그렇게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류하리의 이마에서 덥지도 않은데 땀이 흘렀다.

눈앞의 존재가 악마라는 걸 알아채고 있으니 허세를 부려도 공포를 감출 수 없었다.

성신아가 자리를 빠져서일까?

미카엘은 더 이상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안심해. 그런 이유로 만나자고 하는 거 아니니까. 어차피 류하리, 당신은 돈도 많잖아? 굳이 더러운 돈 받아서 쓸 만큼 궁하진 않을 텐데?”

“그럼? 왜요?”

“최형림 때문이지.”

“최형림 선배 말인가요?”

“그래. 내가 공들여 쌓아올린 걸 어떤 엉뚱한 놈이 가로채려는 것 같거든.”

“.........”

류하리는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해도 되나요?”

“음? 뭐가?”

“아니 저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최형림 선배에 대해서 긴가민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말해버리면 최형림 선배가 당신과 관계있는 존재, 악마와 거래를 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아. 모르고 있었다?”

“예.”

“흠. 지금 데드맨이 정말 당신을 애지중지하나 보군.”

“네?”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이건 더욱 더 즐겁게 해주는 걸?”

미카엘은 그리 말하고 아주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세상 모두가 정적에 휩싸였다.

번화가 한복판의 카페, 창밖에서는 자동차의 주행 음이 들리고 카페 여기저기에서는 사람들의 속삭이는 소리, 음악 소리가 들려야 했다.

그것들이 일제히 딱 끊겼다.

그 뿐인가.

창밖의 자동차가 멈춰있었다.

당장 이 자리를 떠나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던 성신아의 뒷모습도 우스꽝스럽게 멈춰있었다.

마치 팬터마임의 한 장면 같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아니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시간이 멈추면 빛의 반사도 멈추고 내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을 리가….’

놀란 류하리는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하게?”

미카엘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데드맨을 부를 거지? 좋아. 해.”

“.......”

“아, 시간이 멈춰서 전화가 연결 안 되지? 전화기 꺼내 봐.”

미카엘은 류하리의 휴대폰에 손가락을 튕겼다.

“자 해 봐. 이제 통화 될 거야.”

“당신….”

* * *

시현은 운전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전화기가 울리며 대쉬보드에서 번호가 찍히는 게 아닌가?

류하리의 전화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시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간단히 조작해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으….”

“!”

보통 사람은 장난전화라던가 혹은 주머니나 가방에서 휴대폰이 잘못 터치되어 자동으로 걸린 전화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현은 즉시 전화기를 녹음 모드로 바꾸고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제 목소리도 녹음해서 듣도록 하시고요.”

시현은 그 기묘한 통화를 끝낸 후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2배속, 3배속, 4배속으로 재생하자 점차 류하리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미카엘 윤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스트리머 살인 사건 때 보았던 그 남자에요. 그런데 갑자기 시간이… 멈췄군요.]

[그는 당신에게 전화하라고 웃고 있는데 이거 함정이겠지요? 아 이거 인질이 되어버렸는데….]

[원래대로라면 인질 협상에 응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군요. 저는 지금 공덕역 카페 XX하우스에 있어요.]

류하리의 통화는 거기서 끊겼다.

“젠장.”

시현의 눈이 금색으로 반짝인다. 그는 류하리의 태그를 확인해보았다.

류하리는 자신에게 태그를 박지 말라고 했었지만 시현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진 않았다. 태그를 박지 말라고 해서 그녀에게 박았던 태그를 제거했고 그 후 다시 박아 넣었다.

‘죽지 않으면 갑자기 태그가 사라지진 않아. 하지만 미카엘이 그녀를 죽이진 않았겠지. 그녀는 수명이 남아 있었어. 더 이상 데드맨이 아니니까 불사의 존재인 건 아니지만….’

그녀의 남아있는 수명을 미카엘이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가봐야 겠군.”

시현은 차를 꺾어 행선지를 바꾸었다.

* * *

류하리는 골목에 서 있었다.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본래 그녀가 있던 카페는 마포구 공덕동 뒷길의 허름한 다세대 주택이 되어 있었다.

“과거?”

아마도 그녀가 있던 카페는 이 건물을 헐고 새로 지어서 만든 것이겠지.

건물은 바뀌어 있지만 길은 그대로라서 이곳이 자신이 있던 곳의 과거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데드맨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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