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폐쇄사회의 균열 #4
“흠. 과거 여행 경험이 있나 보군. 단번에 알아보다니.”
미카엘 윤이 그녀의 곁에서 흥미 깊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제게 이러는 거예요? 왜 여기에 데려왔지요?”
“왜 그럴 것 같아?”
미카엘은 역으로 류하리에게 물어보았다.
질문을 질문으로 받다니 대화하는 데 있어서 그리 좋은 화법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악마의 화신,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
류하리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당신은 인간성이 빛나는 순간을 즐긴다고 했지요. 아니 당신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악마가. 이것도 그 일환인가요? 여기에 오면 당신이 그런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어서? 뭔가 재밌는 걸 볼 수 있나 보군요.”
“뭐 크게 보자면 그렇지.”
“작게 보자면요?”
“그건 지금부터 보고 당신이 헤아려 보아야 할 숙제지. 당신도 수사관 아냐? 그것도 경찰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보통 경찰대학에서 악마에게 이끌려 과거로 날아간 다음에 수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만?”
“그거 애석한 일이로군. 언젠가 당신이 경찰간부가 되고 경찰대학 교수가 되면 그런 강좌를 열라고.”
미카엘은 그리 말하고 품에 손을 넣어서 돈다발을 꺼냈다.
“....그건?”
“택시를 타야지? 설마 과거에서 신용카드를 쓸 생각은 아니지?”
미카엘은 그리 말하고 돈다발에서 만 원권 몇 장을 뽑고 큰길로 나가 택시를 불렀다.
* * *
잠시 후 택시는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어?”
류하리는 눈앞에 있는 건물을 알고 있었다.
시현 탐정사무소였다.
하지만 지금 간판은 다른 이름이 붙어있었다.
‘영사 탐정사무소.’
“이건?”
그녀는 당황해서 미카엘을 바라보았지만 미카엘은 골목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음 아무래도 여기까지. 역겨운 그 인간의 냄새가 심하군.”
“역겹다고요?”
류하리는 당황해서 간판을 보았다.
영사 탐정사무소. 그런데 어째 눈에 익다.
아니 눈에 익은 건 당연하겠지.
‘늘 보던 시현 탐정사무소와 별로 다를 게 없잖아?’
간판만 바뀌었을 뿐 다를 게 없다.
그렇지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류하리는 버릇처럼 탐정사무소로 걸어가 입구의 도어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대로 번호를 누르자 문이 안 열린다.
번호가 다른가?
“........”
류하리는 도어락에 있는 지문 인식기를 살펴보았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녀는 지문 인식기 위에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문이 열린다.
“아.”
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영업 안하….”
놀랍게도 영사가 안에 있었다.
그는 류하리를 마주 보고 깜짝 놀랐다.
“...류하리 아가씨?”
“아, 안녕하세요. 어떻게.”
“몇 년도에서 오셨습니까? 저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아?”
그는 즉시 창문으로 달려가 창 밖에 미카엘을 발견했다.
“오 맙소사. 위대한 분이 그 권화로,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다니!”
“자, 잠깐만요!”
류하리가 말리려 했지만 영사가 부리나케 뛰어갔다.
“.......”
이래서 미카엘이 같이 안 오려고 했구나.
류하리는 총알같이 뛰어나가는 영사를 보며 혀를 찼다.
어쨌건 영사가 없어졌으니 류하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자기가 어디에 있지?
‘아 아니지, 미카엘도 저렇게 학을 떨면서 싫어하는 데 영사가 여기 있다면 타자기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류하리는 문득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
어째서일까? 이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다행히 내 전화번호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기에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넣어보았다.
신호가 좀 가더니 잠시 후 전화가 걸렸다.
[네. 무슨 일이에요? 영사 아저씨? 뭐 새로운 의뢰라도 들어왔나요?]
류하리 자신의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좀 더 어리던 시절의 그녀의 목소리….
“아….”
[응?]
전화기 너머의 자신이 깜짝 놀랐다.
[잠깐! 전화 끊지 마요!]
“네?”
[당신 누구죠? 왜 목소리가 제 목소리와 비슷한가요?]
“놀랍군요. 보통 자기 목소리는….”
자기 목소리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의 몸을 통해서 듣기 때문이다.
자기 목소리를 자주 녹음하고 듣는 사람, 연예인이나 성우가 아니고서야 단번에 자신의 목소리를, 그것도 전화기처럼 음질 나쁜 도구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유령이나 악령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미래에서 왔나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보통 미래에서 온 자신을 쉽게 떠올릴 수 있나? 류하리는 과거의 자신이 이랬던가 하고 떠올려보았다.
과거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려니….
‘문무겸비, 절세가인, 침어낙안, 인중지룡, 낭중지추…. 왜 이런 것만 떠오르냐. 성신아가 들으면 재수 없다고 학을 떨었겠다.’
류하리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이쪽 전화기의 류하리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냐면 제 목소리 같긴 한데 좀 삭은 목소리로 들렸거든요. 혹시 아줌마가 된 저인가요?]
“.........”
정정.
류하리는 자신도 자신이 재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수와 싸가지를 동시에 말아먹었네. 진짜.’
[지금 학교라서 수업 끝날 때까지 좀 걸려요. 하지만 방과 후에 바로 사무실로 갈 테니까 한 번 뵙도록 하지요. 알겠지요?]
“아 네….”
류하리가 그렇게 말할 때 전화기에서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곤란하지. 내가 이런 말하기도 그렇지만 상식이라는 걸 가지지 그래?]
그 순간 류하리의 손에서 전화 수화기가 떨어져 테이블 위에 충돌했다.
* * *
류하리는 자신의 손에서 떨어진 수화기를 보고 손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류하리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손이 전화기를 잡을 수 없다.
테이블도 투과한다.
말하자면 유령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이런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상식이 있으면 과거의 자신을 만나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드나?”
“상식?”
류하리는 어느새 자신의 곁에 돌아온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카엘의 곁에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시현이었다.
“당신이 상식을 논하다니 놀랍군요.”
시현은 미카엘을 흘겨보았다.
“상식이 있으면 멀쩡한 사람을 굳이 과거로 데려오겠습니까? 게다가 저나 그녀나 당신의 계약자도 아닙니다.”
“잘도 찾아왔군. 데드맨.”
“제가 오길 바란 거 아닙니까? 노골적이던데요.”
시현은 그리 말하고 미카엘과 류하리 사이로 걸어와 그들 사이의 공간을 자르듯 섰다.
“크나큰 실수를 하셨더군요.”
“실수? 무슨 소리지?”
“다른 계약자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건 금지 아닙니까?”
“나는 당신에게 손대지 않았어. 당신이 자발적으로 들어왔지.”
류하리를 손댔을 뿐 시현에게는 손대지 않았다.
미카엘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얄팍한 수작이다.
하지만 이런 얄팍한 수작을 썼다는 것부터가 시현의 말이 옳다는 걸 반증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하는 변명에 납득이 가신다면 뭐 그건 그것대로 좋습니다. 인간적이라 좋군요.”
“인간적?”
미카엘의 눈썹이 실룩거렸다.
자신을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아, 좋아하네.’
류하리는 미카엘의 표정에서 그가 인간적이라 불리는 것에 기뻐한다는 걸 눈치 챘다.
“다만 저와 타자기의 계약에는 그녀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사항이 있었습니다. 즉 당신이 그녀를 끌어들인 것은 타자기와 저의 계약을 망친 거지요.”
“그건 타자기의 실수지 내 잘못이 아니다. 내가 너와 타자기의 계약 내용을, 그 세부사항을 어떻게 신경 쓰지?”
“정말 몰랐다고 할 겁니까? 사실 당신들 끼리 짜고 날 농락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계약자들 치고 잘 버티니까 날 농락하기 위해 그녀를 여기 끌어들이면서 타자기의 악마의 책임이 되지 않도록 당신에게 따로 책임을 분산시켰다면? 계약자의 소원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부수기 위해서 다른 악마들끼리 서로 협력하고 있지 않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
“그러니까 당신의 이게 실수가 아니라면 당신들의 계약은 의미를 잃습니다. 좋겠군요. 전지전능한 힘에 인간쯤은 가지고 놀 수 있으니까 아 그럼 제가 당신들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사라지는 거니 전 그냥 자살하면 되겠군요. 더 이상 당신들이랑 놀아주지 않고 죽어 없어지는 쪽이 그나마 낫겠습니다.”
“죽어도 되살릴 수 있다.”
“그래도 또 죽겠지요. 그 의지조차 없앤다면 당신들은 저와 같은 인형을 그저 가지고 노는 것뿐입니다. 우습군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망상에서는 그 어떤 성취도 기쁨도 없다.
완전히 치트되어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스텝 롤과 엔딩이 나와 버리는 게임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
“그러니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는 게 어떻습니까. 진명의 일부를 알려주는 정도로 타협보시지요.”
“이 자식! 지금 내 진명을 내놓으라는 건가?!”
악마의 진짜 이름, 진명.
옛날 이야기 등에서는 그 진짜 이름을 알게 되면 인간이 오히려 악마를 사역하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 효과가 과연 여기서도 있는가? 류하리는 그게 궁금했었는데 미카엘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진명이 악마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수가 실수이게 하기 위해서도 진명을 내놓으시지요. 고작 한 어절일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제가 당신의 진명을 다 알아내려면 평생 걸려도 부족하겠군요.”
“알겠다.”
미카엘은 마지못해서 진명의 한 어절을 가르쳐 주는데 타협했다.
‘보아하니 자신이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네?’
류하리는 미카엘의 반응에서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솔직히 그걸로도 엄청나게 손해 보는 기분입니다. 이정도 어절로 어느 세월에 당신을 추방하겠습니까? 하지만 당신들 상대로 진지하게 화내봤자 나만 손해니까. 이 정도에서 타협을 보도록 하지요.”
시현은 미카엘에게 기어이 진명의 한 어절을 뜯어냈으면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듯 불만을 토했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놀랍게도 들어선 것은 학생복 차림의 류하리와 시현이었다.
* * *
류하리는 저 교복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립 동성학원 동성고교.
SH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사학 재단의 교복으로 남학생은 정장, 여성은 블레이저와 스커트 차림으로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이라 그런지 그냥 기성품으로 팔아도 무방할 정도로 세련된 복장이었다.
자신 있고 당당해 보이는 류하리와 대조적으로 주눅 들고 연약해보이며 심지어 안경까지 쓰고 있는 시현은 지금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아니 잠깐, 방과 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빠르잖아?’
형사 류하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지금이 아직 한창 학교 수업시간이라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이 당돌한 학생들은 전화해 온 사람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일부러 늦게 온다고 말하고 재빠르게 학교를 이탈, 바로 영사의 탐정사무실로 직행한 것이었다.
데드맨31